89.
이걸영은 점심 식사를 위해 상무실을 나와 로비로 향하던 길에 천준호 이사와 조우했다.
“안녕하십니까.”
천준호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비록 현재는 다른 파벌에 속해있으나, 과거에는 한팀에서 일한 적도 있는 사이였다.
“예. 표세인 팀장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묘한 미소다. 이것은 지난번 양성태에게 패한 일을 두고 조롱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의 표시일까?
‘이젠 이런 것도 구분이 안 되는군.’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 사내 입지 같은 것들에 얽매여 지난 덕분에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기가 어려워졌다.
나와 상대의 개인적 관계보다, 자신의 파벌의 상황을 먼저 가늠한 후에야 상대의 의중을 짐작하기 시작한 것이 대체 언제부터일까?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가장 쉬운 답은 적개심이었고, 자신도 그에 맞춰 경계태세를 풀 수가 없었다.
‘이거 참 우습군.’
파벌의 수장에서 조연아의 보좌로 스탠스를 새롭게 취하니,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긴 걸까?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표세인 팀장. 만만치 않은 친구야.”
“그래 봤자, 팀장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 식사 자리에 양실장도 없습니다. 제임스라고 했던가? 미국지사에서 막 넘어온 부장급 하나를 방패막이로 세울 모양이던데, 수가 참 귀엽더군요.”
순간 이걸영은 머리에 망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제임스라고?”
“네. 제임스. 아! 그러고 보니 아시죠? 원래는 문이사의 오른팔이었다면서요? 요즘 문이사 잘 지낸답니까?”
이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오른팔도 지켜내지 못한 남자를 향한 도발. 원래부터도 무게감이 다른 파벌이었고, 이제는 문이사를 잃어 미국지사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탓에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여기는 것일터.
순간, 조회장이 자신을 조연아에게 붙인 것은 조연아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한 대학교 후배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훗.”
“?”
“천이사.”
“왜 그러십니까?”
“식사 맛있게 하게.”
표세인이 제임스를 방패막이 삼았다? 이건 한 눈에도 덫이 아닌가?
아직 제임스는 공표된 바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이 제임스를 덫으로 활용하기에 가장 유용한 시점이다.
‘표세인, 그 친구 정말 수가 음흉하군.’
겉으로는 운동부 출신에 호탕하고 쾌활해 보이는 이미지이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그 수법이 독사나 다름없다.
언제나 상대의 눈을 흐리게 하면서, 치명적인 한 수를 준비한다.
자신을 향해 조롱을 보내는 천준호가 괘씸하지만, 반대로 곧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모습을 상상하니, 오히려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상무님도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자신 앞에 어떤 덫이 도사리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한 천준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
*
*
“독립 스튜디오라고는 해도, 외부로 나가지 않는 이상 이렇게 귀찮은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군요.”
“그렇죠. 하지만 반대로 이점도 있지 않습니까?”
제임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사 안에 머물러 있기에,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크게는 개발 지원부터, 작게는 재무 관련 업무까지.
하지만 그 결과로 이런저런, 주변의 술수도 감당해야 한다는 거다.
“이사급 압박 버티실 수 있죠? 이런 일은 공정한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말에 제임스는 피식 웃었다.
“미국이라고 직급에 따라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시아는 유독 그 경향이 심한 편이죠. 애초에 다른 개발실 사람이, 저에게 무슨 압박을 줄 수 있겠습니까?”
캬, 역시 네츄럴 본 아이스 콜드 다운 대답이다. 보통은 이사급 인사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기 마련이겠지만.
우리 얼음 나라 왕자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모양.
여러 복잡한 내용 모두 빼고, 인간성 자체의 든든함만 놓고 보자면 제임스만한 인간이 없다.
제임스는 정말로 캐릭터 자체가 견고한 성벽 같은 인물이니까.
“그보다 혹시 저를 이용하시는 겁니까?”
제임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네. 맞습니다. 이용하려는 겁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표세인 팀장님은 좀 다르군요.”
“하지만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제임스의 가정사를 언급하거나 퍼트릴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제 주변에서 가장 주위의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공평한 심사가 가능한 사람이 제임스라서 일을 맡긴 것뿐입니다.”
“정말로 그것뿐?”
“그리고 이용이라는 단어가 조금 그런데, 전 사실 일 하나 부탁했을 뿐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표세인 팀장님이 나서서 제 가정사를 떠든 것도 아니니,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솔직히 이용보다는 사용이라는 느낌이지만, 기껏 장비에 강화 버프 걸렸는데, 이걸 놓치면 안 되지.
“그런데 연아는 회장님과 상호간에 정체를 숨기기로 합의를 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제임스는 굳이 회장님과의 관계를 숨기는 이유가 있습니까?”
“숨긴적 없습니다.”
“없어요?”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묻지도 않는데, 가정사를 시시콜콜 떠들 이유가 있습니까? 게다가 미국은 한국 보다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훨씬 꺼리는 곳입니다.”
이 말은 뭐다?
수틀리면 다까발릴 수 있다는 거지.
현재 제임스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시한폭탄(?)을 들고 천이사에게로 향했다.
“마침 오는 길이었군.”
“저희가 늦었다면 죄송합니다.”
마침 천이사도 이쪽으로 오는 길이라서,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쪽이 제임스?”
“제임스입니다.”
“반갑네. 나 천준호 이사라고 하네.”
“예.”
“?”
설마, 예 한마디로 끝날 거라고 생각을 못 했던 것일까? 천이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한국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천이사는 넌지시 자신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제임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어도, 회사 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이들은 많은 법이죠. 업무 외적으로 방해하는 사람만 없다면, 적응 같은 것은 필요가 없지요.”
-꿈틀 꿈틀.
와, 천이사는 묘한 재주가 있다. 눈썹으로 웨이브를 출수 있는 재주라니!
“부장님. 한국은 어디까지 예절을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이사님께 다소 결례를 범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지켜보던 마팀장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제임스가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마팀장.”
“네.”
“한국에서는 상사 간의 대화에 막 끼어들어도 되는 건가?”
지난번에 마팀장이 제임스에게 날렸던 멘트를 고스란히 갚아주는 한방!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제임스 뒤끝 있는 타입이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나누시죠. 점심시간이란 것이 의외로 길지 않은 법이지 않습니까.”
나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천이사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천이사도 가타부타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그렇게 천이사가 예약한 복어집으로 향했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군. 나이를 먹다 보니, 간이 센 음식보다는 이런 삼삼한 음식이 좋더군.”
“아닙니다. 저는 이런 음식 좋아합니다. 저도 이제 마흔아닙니까.”
천이사의 말에 마팀장이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표팀장은 어떤가?”
“네. 맛있습니다.”
먼저 나온 복어회를 한 점 넣으니, 담백하게 혀를 감싸는 은은한 풍미가 일품이다.
나 역시 이런 음식을 싫어하지 않는다.
운동하던 시절에는 간이 센 음식이 더 좋았는데, 서른 중반쯤 넘어가니, 어른들이 즐겨 먹는 음식들이 입맛에 맞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어떤가? 미국 생활이 길어서 어떨까 싶군.”
“네. 싱겁군요. 제 취향은 아닙니다.”
춥다.
에어컨을 튼 것도 아닌데, 온도가 2도쯤 내려앉는 느낌.
이따금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임스는 그 정도가 아니라 분위기를 아주 싸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것이 의도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너무 솔직하다는 거다.
게다가 이제야 느끼는데,
‘아직 덫 근처도 안 왔는데, 냉기를 풀풀 날리는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치를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천이사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 음식 나왔네요. 이사님 먼저 받으시죠.”
마침 복지리가 나와서 나는 즉시 천이사 앞에 뚝배기에 담긴 복지리를 대령했다.
“음, 맛있네.”
“그러고 보니, 표팀장은 운동했다고 했었지?”
“네.”
천이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림픽도 나가 보셨습니까?”
“아니요. 상비군까지는 이름을 올렸는데, 거기까지는 무리였습니다.”
“운동선수가 메달 하나 못 땄으니, 투자 대비 효용이 별로 없었군요? 부모님께서 무척 가슴 아프셨겠습니다.”
마팀장은 건수 하나 물었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진짜 같잖은 도발이라서 대응하기도 귀찮다.
아마도 지난번 군대 이야기로 한 방 먹은 것에 대한 뒤끝이겠지?
나는 잠시 상대해줄까? 넘어갈까를 고민했지만, 곧바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네. 지금도 가끔은 면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천이사의 의중을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것이다. 허접한 조연에게 심력 낭비를 할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나와는 생각이 다른 모양.
“운동은 좋은 것이죠.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과 극기, 그리고 팀워크를 배울 수 있지요. 한국은 운동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겠지요. 미국에서는 학창시절 운동 경력이 성적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뜻밖에도 제임스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운동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학교 성적도 업무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지요.”
“동의하기 어렵군요. 출신학교와 성적이란 그 자체로 품질보증서 같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 정도로 성실하고 영민하다는 증거죠.”
“사람은 각자 개성이 있습니다. 특히 기획자에게 필요한 창의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성적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게임업계만큼은 학벌 기재란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외국의 많은 회사는 그렇게 하고 있고요.”
걸려들라는 천이사는 안 걸려들고 엄한 마팀장만 혼자서 열을 내고 있다.
나는 복어회가 건조해질까 두려워, 마늘과 함께 쌈을 싼 회를 질겅질겅 씹으며 상황을 주시했다.
이거 참 맛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식사 끝내고 하시지.
“그보다, 식사는 이쯤 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좋겠군요. 이 자리를 마련하신 이유가 뭡니까?”
제임스가 갑자기 화살을 천이사에게로 돌렸다.
“하, 이거 보자 보자 하니까,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그 태도는 뭐지?”
“용건을 여쭌 것이, 딱히 결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정말로 불쾌하군. 아무리 미국물 좀 먹었다고 해도, 부모님은 한국인 아니신가? 거기 가정 교육은 그런 식인가?”
헉! 나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가던 수저를 멈췄다.
누구에게도 부모님을 언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선택이지만, 제임스에게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부모님의 교육방침에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군요.”
“한번 얼굴이라도 뵙고 싶군.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안하무인 같은 태도를 보이는지. 쯧.”
진짜 뵙고 싶으세요? 후회하실 것 같은데.
“천이사님은 저희 부모님 걱정보다는 본인 부하 직원 관리에 신경을 쓰시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만?”
이 +5 빙결덫에는 자체 도발기가 옵션으로 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 말 다 했나?”
“딱히 제 눈치 보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십시오.”
“허!”
“풋.”
제임스의 답변에 마팀장은 헉 소리를 냈고, 나는 실수로 풋 웃어버렸다.
내 웃음에 천이사의 얼굴이 한껏 달아올랐고,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되었다.
그러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기대 이상으로, 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 이제, 내 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