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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90화 (90/346)

90.

천이사의 으름장에 눈치 보실 필요 없다고 응수하다니, 이거 센스있는 답변이다.

나중에 기 싸움할 일이 있으면 써먹어야겠다.

메모. 메모.

그리고 이건 홍켓몬이나, 남궁원에게도 가르쳐주면 좋겠네. 좋은 스킬은 널리 퍼트려야지.

이것이 바로 올바른 트레이너의 자세!

‘그래도 이 정도면 덫에 걸려들었다고 봐야지.’

이미 상대는 열이 오를 만큼 올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나 혼자 식사 끝냈다.

그런데, 천이사와 마팀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임스도 별로 식탐이 없는 편인가?

사돈댁은 회장님을 필두로 모두 날씬한 편이긴 하다.

-탁.

나는 의도적으로 젓가락을 탁! 하고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점심시간도 끝나가는데, 이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시죠. 제임스. 함께 가시죠.”

제임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은 이쪽입니다만?”

“화장실 가려고 나온 것 아닌데요?”

제임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가게 밖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 연기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금연 직후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대단하시네요.”

“표세인 팀장님은 담배 안 태우실 것 같은 이미지였습니다만.”

“담배 안 피우고 사회 생활하기 쉽지 않죠. 그래도 이제 눈치 볼 일도 크게 줄었으니, 슬슬 끊을 준비 해야겠네요.”

연아는 제 앞에서만 안 피우면 담배를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슬슬 건강을 위해서라도 끊어야지 하던 참이었다.

“이만하면 제 역할은 다 한 겁니까?”

“설마 연기였습니까?”

“아니요. 다만 표세인 팀장님 의중을 어림짐작해서 좀 세게 나가봤습니다.”

“크~ 제임스 의외로 연기력이 출중하시네요.”

“글쎄요. 말씀드렸다시피, 순수 연기는 아니었습니다. 유치한 시비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고요.”

그렇군. 자기가 할 수 있는 배역만 선택하는 타입이라 이거지? 기억해 두자.

“그래서 이만하면 무대는 갖춰진 것 같은데, 표세인 팀장님의 노림수는 무엇입니까?”

“노림수?”

“설마 정말로 과장 직급 따위를 방패막이로 삼으시려는 것은 아닐 테고······.”

“크큭, 별건 아니고 그냥 저쪽 손 좀 빌릴까 해서요.”

“손을 빌려요?”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저는 가능하면 홍기도와 남궁원 두 사람 모두를 진급시키고 싶네요.”

“두 사람?”

“네.”

“하지만 TO를 2개나 받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그렇죠. 그러니 저희는 그 하나 손에 넣고······.”

“······남은 하나는 저쪽에서 가져오도록 하겠다?”

“빙고.”

“크크큭.”

맙소사······.

제임스가 웃다니······. 근데 웃는 표정이 뭔가 좀 이상하다. 하지만 어쨌든 웃은 것은 웃은 거다.

“정말이지, 사내 정치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군요.”

“불쾌하진 않으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주어진 일만 수행하며, 인간관계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상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제임스는 분명히 그런 타입이다.

그저, 내 경우에는 상대의 수를 읽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이 몸에 밴 타입이고, 원체 틈만 나면 이런 꼼수를 떠올리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제임스에게 어떻게 보일지 다소 걱정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제임스에게서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저는 아버지와 잘 맞지 않습니다.”

“······네.”

아니,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나?

“그분은 남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몸에 밴 분이시죠.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얌전히 제임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이건 귀한 정보다.

제임스가 워낙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타입이 아닌 탓에,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아버지는 저희 남매들에게도 항상 그런 식이었죠.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려고 하셨습니다.”

흉계.

조회장님의 게임이 자식들 처지에서는 흉계라고 느껴질 수도 있구나.

“하지만 표세인 팀장님은 그런 거만한 시선 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꾀를 내십니다. 마치 항상 고양이를 농락하는 생쥐 같은 귀여움이 느껴지네요.”

“애니메이션도 보십니까?”

“딸이 좋아해서요.”

고양이와 생쥐 이야기. 나도 어릴 적에는 참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이다.

“어쨌든 재미있네요.”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제가 할 일은 끝난 겁니까?”

“예. 나머지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제는 내 턴이다.

자, 천이사님.

저희는 함정카드 깠으니까, 이제 그쪽 수를 좀 보여주시죠.

뭐, 딱히 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

*

*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고작 부장 따위가 바득바득 토를 달아?”

“이사님 고정하십시오. 미국지사에서 막 건너온 녀석이 뭘 알겠습니까?”

천준호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화를 다스리려 애썼다. 그리고 그 곁에서 마팀장은 최대한 천준호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양실장 하나 믿고 저렇게 설치는 꼴이라니.”

현재 임원진 중에서 양성태를 좋아하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회장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반대로 주변 모두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

그것이 양성태가 표세인 등장 이전까지 파벌을 꾸리는 일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팀장의 질문에 천준호는 이를 갈았다.

솔직히 따로 수를 궁리한 것은 없었다. 자신의 직급을 이용해 은근히 압박을 넣으면 어련히 자기 뜻대로 풀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대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냥은 못 넘어가.’

천준호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가 뭔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던 표세인과 제임스가 다시 돌아왔다.

“자,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시죠.”

표세인은 조금 전까지, 천준호와 제임스의 기 싸움 같은 것은 없었던 일처럼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점은 저희 팀 과장 진급에 관한 일이겠지요?”

“그래. 솔직히 함전무님이 갑작스럽게 그 친구들을 보내시긴 했지만, 나는 원치 않던 일이었어.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네만 그 친구들 하나같이 좋은 인재들이야.”

이미 그들의 인사기록을 숙지하고 있던 표세인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과장진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설마 싶더군. 표차장.”

“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란 것은 알아. 하지만 일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지.”

“공정이요?”

“그래. 우리 애들에게도 기회는 줘야지.”

우리 애들이라는 말에 표세인은 짐짓 웃음을 흘릴 뻔했다.

우리 애들이라니? 이미 자신의 팀원이다.

더군다나, 자리가 잡힌 이후에는 아예 자신의 사원이 될 예정인 이들이다.

아직은 기틀이 잡히지 않은 탓에 그들 스스로가 표세인의 팀원이라는 자각도 희미하겠지만, 표세인 자신은 이미 그들을 자신의 팀원으로 여기고 있다.

자신 휘하의 인재들을 함부로 ‘우리 애들’이라고 언급하는 천준호의 말이 내심 거슬렸다.

운동선수 출신들은 대개 같은 그룹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표세인 역시 그랬다.

어려서부터 계속 주장을 맡아왔기에 자연스럽게 길러진, 소속감과 영역에 대한 애착.

다소 현대 사회의 흐름에는 맞지 않는 이 성격은 다른 이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표세인만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

“공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왜, 뭐 문제라도 있나?”

“이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공정이란 어떤 의미이십니까? 말씀해 주신다면 가급적 적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놈은 말이 통한다.

조금 전까지 제임스 때문에 끓어올랐던 노기가 다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 미국물 먹은 놈의 건방이야 어쨌건, 국내산(?)은 이래야지.’

천준호는 물잔을 들어 살짝 입을 축였다.

“간단해. 이번 과장 심사를 제임스 혼자에게 맡기는 것은 반대야. 제임스는 어쨌든 그 쪽 사람 아닌가?”

“본사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서 가장 공정한 시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 그렇게 윗사람의 의견을 물어오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천준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간단해. 우리 쪽에서 하나, 그리고 제삼자 하나. 이렇게 3명이라면 충분히 공정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어? 뭘까? 이 기분은?

자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표세인에게 왈칵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바람에 옷깃 여미다 보면 별것 아닌 햇살에도 감동하게 되는 걸까?

표세인에게 좋은 감정 따위는 없던 천준호였으나,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자네는 말귀가 통해서 다행이군.”

“예. 그런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공정이라고 하셨으니, 천이사님께서도 손을 써 주시는 거겠죠?”

“손을 써?”

표세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천준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공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저희 쪽에서 과장 TO 하나, 천이사님께서도 TO 하나. 이렇게 흘러가는 것 맞죠?”

“어? 어?”

“역시 천이사님은 다르시군요. 양실장도 TO 하나 마련하기 쉽지 않아 보였는데, 이렇게 곧바로 처리해주시다니, 감탄했습니다. 이것이 실장과 이사의 차이로군요.”

“어?”

표세인은 천준호가 상황파악을 하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양성태의 사내 이미지야, 이제는 표세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양성태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인물이 어찌 문상훈 하나뿐이겠나?

아니, 사실 두 사람 모두 워낙 눈에 띄는 인물이라서 다른 임원진들에게는 똑같이 눈에 거슬리는 인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에 대한 경쟁심 역시 각별할 것.

실장이 할 수 있는 일을 이사가 못해?

“설마 어려우십니까?”

“그, 그것이······.”

설마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은 정말로 실장 이하급 이사로 취급되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과장급 TO를 따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사내 영향력 상당 부분 소모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천준호는 당황한 나머지, 입만 벙긋거리며 말문이 막혔다.

그때였다.

“훗.”

제임스의 짧은 웃음.

‘덫이 닫혔다?’

표세인은 이것이 제임스의 어시스트임을 깨달았다. 그것도 발만 가져다 대면 들어가는 수준의 환상적인 어시스트!

“누, 누가 어렵다고 했나! 양성태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못하겠어? 이사를 물로 보나?”

안 그래도 신경전을 펼쳤던 제임스의 묘한 웃음에 천준호의 뚜껑이 완전히 열려버렸다.

“대신 심사를 맡은 인원은 우리 쪽에서 선별한다. 이의 없겠지?”

“당연합니다. 그런데 혹시 예상해두신 인선이라도?”

표세인의 질문에 천준호는 곧장 대답했다. 이 문제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함전무 라인에도 공정의 대명사로 유명한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와는 달리 그는 어느 정도 유두리까지 갖춘 인사였다.

“재무팀의 고부장이다. 이런 일에는 그만한 사람이 없지!”

“화, 황금 고블린······.”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표세인은 자꾸 씰룩여지는 입가를 숨기기 위해 급히 입을 가렸다.

< 수저가 몇 개든, 다 내가 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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