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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91화 (91/346)

91.

천이사와의 식사는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내가 바랐던 최상의 결과랄까?

무려 과장 TO가 두 개라니!

나는 이 사실을 양실장에게 전달했다.

“이거, 이거······. 표세인 팀장님이 파놓은 덫에 제대로 걸렸다는 느낌이군요.”

“기대 이상으로 천이사님과 제임스가 궁합이 좋더라고요.”

만약 그 두 사람이 듣는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날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궁합은 최고였다. 물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라는 전제가 붙겠지만.

“그러면 이제 고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움직이실 겁니까?”

“설마요.”

나는 피식 웃었다.

“다름 아닌 고부장님입니다. 다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는 해도, 크게 어긋남 없는 판단을 내려 주실 분입니다.”

“그렇군요.”

애초에 상황의 경중을 파악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리가 바로 재무부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던가?

괜히 어설프게 접근하는 것보다 믿고 기다리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오히려 한 가지 찝찝한 일이 있는데요.”

“뭐죠?”

“천이사가 제임스에게 이를 갈게 돼버렸달까요? 혹시 제임스에게 불이익이 가거나 하는 일은 없겠죠?”

“같은 개발실이라면 이사 입김이 작용해서 승진 고과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직접적인 압박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상대가 제임스라면······.”

“그렇군요.”

예상대로 천이사가 제임스를 어찌할 수는 없는 모양.

이제 마음 편히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권차장은 잘 길들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실 별로 길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길들일 생각이 없다고요?”

“권차장이 담당하는 시나리오 파트는 독자성이 강한 파트죠. 서열정리만 끝나면 어느 정도 자율성을 보장해 주려고 합니다. 시나리오는 남에게 휘둘리면 안 되는 파트죠.”

이건 진심이다.

내가 맥베스에서 거듭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회장님과 양실장이 나에게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국내 개발사들이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집형 모바일 게임이라는 장르적 특성 덕분이고, 좋은 시나리오가 게임의 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물론 권차장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준 주체가 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킬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양실장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부르셨습니까?”

재무부장 고학현은 갑작스러운 천준호 이사의 부름에 이사실을 방문했다.

“왔군. 잠깐 앉지.”

“네.”

같은 파벌이라고는 하지만,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재무팀의 입장 때문에 고학현은 함전무의 파벌 회식이나 이런저런, 자리에 참석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래서 천준호와도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부름이 얼떨떨한 상황.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함전무의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요즘 함전무 파벌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늑대가 왕이라고 몇몇 이사들은 제 세상처럼 설치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함전무님 지시로 신규팀에 우리 쪽 애들 몇 명 보낸 것은 알지?”

“잘 몰랐습니다.”

재무팀 일이 아니라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는 고학현이었기에 그런 소소한 인사이동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팀에 대리가 4명이라는데, 과장 TO가 두 개 생겼어.”

“두 개나요? 별일이군요.”

고학현의 말에 천준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어쨌든 과장으로 승진시킬 인물들 검토 좀 하려고 하는데, 자네가 이 일 좀 맡아주면 좋겠군.”

“제가요?”

“그래.”

천준호의 말에 고학현은 입맛을 다셨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정치적인 안건이 숨어 있다는 것쯤은 훤히 보인다.

이런 것이 싫어서 함전무와도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지내왔다.

당장 지난번 이상무에게 받은 빚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쥐고 있으면, 언젠가 자신에게 들어올 압박을 벗어나는데 쓸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정도.

“그래도 해줘야 해. 지금 부장급 중에서 양실장 눈치 안 볼 수 있는 인물이 자네 정도 말고 더 있나?”

저도 양실장 눈치 봅니다. 누가 안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고학현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 말 이해하겠지?”

천준호의 뜻은 무척 단호했다. 이 정도 부탁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먼저 선을 그어야 했다.

“이사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래야지.”

“하지만.”

“?”

“제게 맡기신다고 하셨으니, 저는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공정하게, 딱 보이는 대로만 평가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고학현의 말에 천준호는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켜보던 인재들이야. 굴러들어온 돌에 밀릴 애들이 아니라고.”

“그러면 더더욱 문제없겠군요.”

“고부장······. 자네 누구 편이야?”

누구 편.

가장 듣기 싫은 표현이다. 회사의 재무 담당으로, 이런 편 가르기에 휘둘리는 것이 가장 고달픈 일이었다.

그나마 함전무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파벌에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문제 삼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모호한 태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점점 피곤해지는군.’

사회생활에 중립은 없다.

아무리 혼자서 고고한 척 고개를 치켜들어도, 결국에는 위에서 후려치는 망치에 고개가 꺾이는 법이다.

‘나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과연 이사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재무팀은 직급 대비 막강한 권위가 부여되지만, 눈에 띄는 실적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거듭된 게임업계의 불황으로 회사의 지갑을 닫은 바람에, 족족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실적을 내지 못할 때마다, 재무팀이 허리띠를 졸라맨 탓이라며, 애꿎은 비난까지 받는 상황.

‘재무이사는 어차피 꿈도 못 꿀 자리지······.’

재무이사는 다른 이사들에 비해 한 끗발 높게 평가되며, 현재 그 포지션은 함전무가 담당하고 있었다.

“천이사님.”

“말하게.”

“저 재무팀 소속입니다.”

“그게 대답인가? 함전무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제가 별로 예쁨받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천준호는 고학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저 혼자 고고한 척한다며 주변에서도 이런저런 말을 듣던 고학현이었고, 그것은 본인도 동의하는 바였다.

파벌이라는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면, 거기에 걸맞은 충성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제게 맡기시겠습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으름장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것들이 하나 같이······. 지금 나를 물로 보나.’

제임스에 이어 고학현까지 연거푸 자신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세우는 통에 천준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이사가 달리 이사인가? 맡은 포지션을 넘어 다른 이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다.

“좋아. 맡으라고, 맡아서 아주 ‘공평’하게 처리해봐. 내 지켜보지.”

이제 와 물러나는 것이 더 꼴사나운 모습이 아닌가?

천준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바보짓이었나?’

고학현은 이사실을 빠져나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준호와 각을 세운 것은 명백한 실책이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성격인지라, 무작정 휘둘릴 수도 없었다.

“표세인 팀장 좀 만나봐야겠군.”

*

*

*

“TO가 두 개요?”

권태인 차장은 표세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고요?”

권태인 차장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천이사님이 손써주신 일입니다.”

“처, 천이사님이요?”

자신의 뒤를 받쳐주시겠다고는 했는데, 뭔가 방식이 이상하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간 공대리와 민대리 인사평가 하신 자료를 제임스와 고부장님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 그 친구들에 대한 평가할 수가 없으니까요.”

아직 얼굴을 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을 표세인이 평가할 수는 없으니,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상한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난 개발실에서 파트장으로 그들을 평가해왔다. 딱히 준비할 것도 없이. 그간의 인사평과 기록을 제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날을 세웠는데도, 이렇게나 흔쾌히 자신에게 공대리와 민대리의 평가를 맡기다니.

기존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평가기록 따위는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보통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나?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

이것은 자신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

애초에 자신의 뒤를 봐주겠다던 천이사가 난데없이 TO를 하나 더 늘려준 것부터가 권태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깨비몬 영상물 제작관련으로 외부 제작사와 미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권차장님께서 이 미팅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요?”

“왜 놀라세요. 스토리 파트 담당자시잖아요. 영상물 제작사와 시스템 논의할 것도 아닌데, 당연히 권차장님께서 진행해주셔야죠.”

“그, 그건 맞는데······.”

미팅을 진행하라는 말에 권태인의 머릿속은 혼란을 넘어 아예 텅 비어버렸다.

당연한 일.

그 당연한 일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각을 세웠으니,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구석에 밀어 넣기는커녕, 중요한 회의의 진행을 자신에게 맡기다니?

“권차장님.”

“네?”

“일에 집중해 주세요. 제 말 이해하시죠? 쓸데 없는 생각들은 차차 정리합시다. 개발은 시간 싸움인 것 아시죠?”

“네······. 물론입니다.”

표세인은 혼란에 빠진 권태인의 표정을 주의 깊게 주시했다.

기 싸움이야, 기 싸움이고, 그것 때문에 업무가 소홀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모처럼 홍기도까지 팩스처럼 기획안을 쏟아내는 중인데, 이 분위기를 괜한 일로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다.

권태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딴생각할 틈이 없도록, 오히려 권태인에게 일감을 퍼부어줄 생각이었다.

자리싸움? 기싸움?

안타깝게도 표세인에게 권태인은 경쟁상대조차 아니었다.

권태인이 자신을 경쟁상대로 여기며 열정을 불태운다?

표세인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이야기다.

이번 게임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연아의 사표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

자잘한 공로 정도야 누구의 몫이 되든 상관없다.

권태인이 자신을 제치고 이 프로젝트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코웃음밖에 나지 않는 일이다.

‘마왕이 공주로 협박을 하는데, 이것저것 가릴 틈이 어디 있나?’

더 날을 세워라.

그렇게 세워진 날을 휘둘러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것이다.

권태인은 자잘한 문제점을 제외한다면,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장비다.

수저라도 얹어 놓을 생각으로 보낸 것이겠지만, 수저가 몇 개라도 그것을 집어 들 사람은 바로 나다!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표세인의 계획대로일터.

표세인은 권태인을 조련 계획을 그렇게 정리했다.

< 황금고블린이 황금고블린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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