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표세인 팀장?”
“고부장님!
고부장이 나를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반갑게 고부장을 맞이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본 고부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찌 고부장의 심정을 모르겠나?
아마도 원치않는 일을 천이사의 압박에 맡게되었으니,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뻔히 알고는 있지만 일단 질문을 던졌다.
“잠깐 시간 되나?”
고부장의 말에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권태인 차장, 나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지난번 영상제작사와의 미팅을 자신에게 일임하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 권태인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고 시나리오 초벌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내정치는 사내정치고, 맡은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저런 타입은 다루기 쉬운 편은 아니지만, 먹음직한 건수를 지속적으로 던져주면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일에 매진한다.
게다가 성능은 이미 검증된 탁월한 장비(?)인 만큼 녹슬지 않게 기름칠을 잊지 않고 잘 관리해 준다면 확실한 성능을 보장한다.
나는 고부장과 함께 회사 밖으로 나왔다.
“근처 카페로 가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은 사내 카페는 원치 않으시는 눈치다.
“그러시죠.”
카페 안에 들어와 주문을 끝낸 후로도 고부장의 표정을 밝지 않았다.
‘이건, 이것대로 신선하네.’
필요하다면, 문이사와 양실장의 요구도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재무부장의 파워다. 부장급 중에서는 아마 원탑이지 않을까?
그런 고부장이 이렇게나 안정감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무척 낯설다.
“표세인 팀장.”
“네.”,
“사실 내가 그렇게 공정한 사람이 아니야.”
“......”
고부장의 입에서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는 사이, 고부장은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들이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개발쪽이야 IT 분야다 뭐다 하지만 재무는 달라. 아니, 경영지원 파트 몇몇은 전혀 다른 분야지.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도 뭐랄까, 전혀 다른 세계지.”
“그렇습니까?”
“지금이야 우리가 모바일 게임 개발에 전념하면서 그런 일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피씨방 사업이다 뭐다 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가···. 아니지, 내가 별소릴 다하는 군. 어쨌든 나도 이래저래 살아남으려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거지.”
부장 직급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로 회사생활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장이라는 직급을 손에 넣기 까지 그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경을 건너왔을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부장 정도 달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지. 그런데 웬걸? 예전보다 더 주변 상황에 휘둘리게 되더군.”
마치 이번 일 처럼.
애초에 덫을 설치하고 이번 일을 연출해낸 장본인이 바로 나였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걸린다.
“평소에도 전무님 입김 들어간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위 버리고, 상무님이 신경쓰는 일에는 숨 막히고, 다른 이사들은 또 어째.”
뭔가 술자리에서나 들어야할 넋두리를 환한 대낮에 커피를 앞에두고 듣고 있으려니, 느낌이 묘하다.
“그거 알아?”
“아냐고요?”
“전에 표팀장 문이사랑 한판 붙은 적 있지?”
“붙었다기 보다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문이사와 붙을 짬은 아니지 않나. 그냥 양실장과 문이사의 승부에 한손 거들었다는 것이 맞겠지.
“그때, 표팀장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
“멋있다니요. 저는 그냥 제 할일 했을 뿐입니다.”
물론 와드 하나 박은 것과, 한팀장을 주연으로 대본 하나 연출한 것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주어진 기획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게 대단한거야. 그게.”
“잘 이해가 안되네요.”
“보통은 그렇게 못해. 문이사 같은 인물과 각을 세운 상황에서, 그저 주어진 일을 수행한다고? 그럴 수 있는 사람 몇 없어.”
“과찬이십니다. 부장님도 지난번 양실장 앞에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담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제가 부장님께 칭찬 받을 수준은 아니죠.”
“흐흐흐. 언제나 말은 예쁘게 한다니까.”
고부장은 싱긋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고부장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다. 그래도 웃을 여유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이번에 천이사님이 나를 찾아와서 과장진급 심사니, 뭐니 하는 일을 꺼냈을 때.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더라고. 말로는 그나마 공정한 인물이니, 맡기겠다 하는데, 이거 결국 재무팀이라는 튼튼한 방패 앞세워서 총알받이 이야기 잖나.”
고부장은 쌓인게 많았던 모양인지, 다시금 얼굴을 구겼다.
“내가 이런 일 맡으려고, 그간 흰머리 늘려가며 아슬아슬 줄타기해온 것이 아니야. 그리고 공정? 지금까지 내가 사내규정에 따라서 처리하겠다고 할 때마다, 갖은 압박을 다 동원하던 양반이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면 안되지.”
“고생이 많으셨군요.”
“나 아직 쉰도 안됐는데, 내 머리 좀 봐라.”
“아, 아직 40대세요?”
“......그럼 몇살인 줄 알았냐?”
주변에 워낙 동안도 많고 요즘은 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보니, 고부장은 유독 늙어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머리가 과장 조금 보태서 반백에 가까운데···..
그간 고생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 절로 실감이 간다.
“나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야.”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 이사 달고 말거다.”
“이사요? 그거야 뭐······”
잘은 모르지만 고부장 정도면 몇년 정도 후에는 자연스럽게 달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대로라면 이사 달아도 꼭두각시라는 생각이 든다.”
“꼭두각시요?”
“문이사만 성격있는 게 아니야. 다른 이사들도 곁에서 지켜보면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성격이지. 뭐, 성격 없는 사람 어디 있겠냐만, 그런데 사실 그들도 그게 원래 성격인 것도 아니지. 이사달 정도로 죽을 고생해서 고개 좀 빳빳이 세울 수 있나 싶었는데, 위에는 또 위가 있고, 이사는 또 파리 목숨이잖아?”
막대한 연봉과 대우의 이면에는 연간 계약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정년 보장은 커녕 당장 내일 책상이 비워질지 모른다는 공포. 그것이 임원들로 하여금 여유를 앗아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문이사처럼 타고난 성향 자체가 열정이 넘치는 성격이 아니라면 그 부담은 더욱 클 것이다.
어떤 개발사는 하도 임원 교체가 잦은 탓에 구조조정 대상을 그냥 임원 자리에 앉혀 버린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이제 숨 좀 쉬고 살고 싶다. 나도 그럴 자격 있다고 생각해. 개발자 출신들이야. 본인들 프로젝트 성공을 이력으로 삼으면 그만이지만, 경영지원 파트들은 그렇지도 않잖아? 하지만 우리도 정말 열심히 일한다.”
“그걸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야에서 애써주는 사람들의 노고가 있기에 개발 현장의 일원들도 성과를 낼 수 있는 법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따금 망각하는 이들 덕분에 알게 모르게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
다른 업계에서야 재무팀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엄지를 추켜세우지만, 게임개발사는 또 구조가 다른 편이라서 지금까지 고부장이 짊어지고 있던 애환이 절로 느껴진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미 고부장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눈치를 챘다. 하지만 정식으로 본인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 할 수는 없는 법.
내 질문에 고부장은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곧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해한다. 쉽지 않은 결정.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투자해 다진 기반을 벗어나, 위태로운 모험에 뛰어들려는 결정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자네가 양실장과 단순한 위 아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네.”
“어떻게 보이셨든, 양실장님이 제 윗선인 것은 맞습니다.”
나 역시 양실장과 나의 관계가 다소 복잡하다고 생각하고, 양실장 본인도 나를 단순한 아랫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내게도 아직 양실장이라는 우산이 필요하다.
만약 언젠가 그의 비호가 필요 없는 날이 온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한 방패가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나는 아직 양실장의 비호 아래에 있는 일개 팀장. 이 포지션을 고수 해야한다.
최소한 연아가 회장자리를 낙점 받거나, 나와 그녀의 관계가 모두에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래야 한다.
“지난번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을 때, 보이더군. 정작 상대쪽에서는 이상무가 나서는데, 그쪽은 양실장이 뒤로 빠지고 자네를 앞세우는 그림. 그거 정말 이상한 그림이거든.”
부장 자리 딱지치기로 딴 것 아니라는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예 파악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재무팀에서 고초를 겪으며 성장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복잡한 회계장부만 들여다보면서도 이 정도 눈썰미는 갖췄으니, 부장까지 오르고 이사 자리도 넘보는 거겠지.
“그리고 이건 정작 인사과도 놓치고 있는 부분인데, 아니, 놓치고 있다기 보다는 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야 겠지.”
“딴 생각?”
“재무팀 입장에서 자네는 무척 괴상망측한 인물이거든?”
“괴상망측이요?”
갑자기 이게 또 무슨 말이지?
“고작 팀장인데, 좀비로얄의 사외이사. 거기에 신규 스튜디오의 대표. 사실 이 정도 이력이면···. 본사 수준으로도 그냥 이사급이거든? 오히려 자네를 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웃기지. 인사팀이야, 그저 위에서 본사 직급 건드리라는 말이 없으니, 자네를 그저 양실장의 오른팔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좀 다르지.”
“어떻게 다릅니까?”
회장님과의 약속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나와 연아의 관계를 숨기는 것이다. 어떤 루트로든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부장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번 자네의 사외이사 발령때, 내가 자네 급여를 이사 수준에 맞추라고 했었지. 물론 이것은 좀비로얄 측에서도 수락한 내용이야. 그러니 딱히 내가 편법을 쓴 것도 아니지.”
반대로 고부장이 나서지 않다는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것. 그랬구나 갑자기 주머니가 터질 것 처럼 빵빵해졌던 것이 고부장 덕분이었는지는 몰랐다.
“그건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런데 이제는 신규 스튜디오 대표까지 됐네? 이것만해도 놀라운데, 지분 70%? 솔직히 깨비몬이 어느정도 프로젝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연아 실장이 전면에 나서자 마자, 디자인 회사를 인수하고 노래까지 제작한다며 회삿돈을 뭉텅 축내더군. 그런데 그렇게 투자한 프로젝트에 자네의 지분이 어마어마하지······ 솔직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거 편법상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위험하다. 재무팀의 시각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그 동안 나와 회장님의 관계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근거를 동반해 온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역시 모르겠단 말이지.”
“뭐가요?”
“편법 상속이라고 하기에는 프로젝트 사전 단계에 자네에게 직접 쥐어지는 돈은 한푼도 없고, 나중에 제임스에게 받은 자료로는 이 프로젝트의 수익 배분은 자네 지분과는 별도 계산이더군.”
“그렇습니까?”
일단 괜한 오해는 비껴간 것 같다. 이 불편한 주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차후에라도 고부장의 사고를 멈출 수 있을까?
“그러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떤 생각입니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정도라면···. 지금 고민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 말씀은?”
“그리고 함전무님··· 솔직히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창업공신이라는 이유로 쉬쉬하지만, 회장님과 고작 한 살 차이에 불과해. 요즘 같이 정년이 짦아지는 추세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환송식 준비라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
“나도 자네 곁에 설 수 있겠나?”
드디어 고부장이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이거 하나는 말해주지.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재무팀. 내 안방이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알다뿐인가.
황금고블린이 황금고블린 하겠다, 이거 아닌가?
< 기능사 1급 자격 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