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준비는 이걸로 끝난 것 같네요.”
“......그렇네요.”
권태인은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다른 것은 아니고··· 이번에 표팀장님과 일을 하다보니, 의외로 손발이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건 좋은 일 아닙니까”
표정과 대사가 반대지 않나?
“하지만 전 승부욕이 강하거든요. 무조건 제 사람들 승진시킬거고,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빛나도록 노력할 거예요.”
갑작스러운 선전포고랄까?
부서 이동 후, 권태인은 무척 잘해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프로젝트에 권태인 같은 인재가 참여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던 참이다.
그래서 나는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 말에 권태인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런 선의의 경쟁을 즐기는 타입인 모양.
그래, 그래서 힘이 난다면 얼마든지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주지.
“하지만 일단 이번 경우는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번 미팅은 우리와 사업부의 승부다. 이런 일에 서로를 향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사실 제가 인숙 언니와 친하거든요?”
인숙이라면··· 분명히 연아를 모시는 김비서님의 성함일 것이다.
“그건 몰랐네요.”
“정말 모르셨어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표팀장님은 뭐랄까··· 모르는 것이 없다는 느낌?”
“에이, 저 굴러들어온 돌입니다. 이곳의 세세한 인간관계 같은 부분은 전혀 모를 수밖에 없죠.”
“그런 거로 하죠.”
뭘 그런 거로 해. 진짠데?
“어쨌든 김비서님과의 친분이 이번 미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질 것 같아서요.”
“?”
“저도 언니도 업무적으로 한판 붙을 때, 봐주는 타입이 아니니까. 이번 일 결과야 어떻게 끝나든, 술로 목욕 한 번 할 것 같네요.”
“김비서님 술 잘드십니까?”
“못마시는데, 좋아해요.”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권차장님은요?”
“저는 그냥저냥 마셔요.”
술을 잘 먹는다고 호언장담 하는 사람보다, 이런 타입이 의외로 주당인 경우가 있다.
마치 당구 200 정도치면 막 자랑하고 싶지만, 500 정도 넘어가면 반대로 겸손하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제가 전력으로 서포트 하겠습니다. 파이팅하죠.”
“표팀장님은 서포트 보다는 전면에 나설 때, 빛나실 것 가튼 타입이신데······”
“저 서포트 잘 합니다.”
“그런 걸로 하죠.”
뭘 자꾸 그런 걸로 해? 진짠데···...
세상에 처음부터 장급 달고 회사생활 시작하는 사람 있나? 밑에서 서포트하고 옆에서 서포트하고 그러다보면 전면에 나서게 되는 거지.
“아무튼 상대가 김비서님이라면 저도 전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별 문제 없을 겁니다.”
“표팀장님은 상대 안가실 것 같은데요. 천이사님을 상대로도 할말 다 하시지 않았나요?”
다 못했지.
가릴거 가리고, 숨길 것 숨기고, 그렇게 꾹 참다가 제임스 같은 덫까지 설치해가면서 이리저리 쓸 수 있는 카드 총 동원했었다.
하지만 어쨌든 연아가 상대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에게라도 전력을 다할 수 있다.
“이미 저쪽은 운을 잃었습니다.”
“운이요?”
“제 고삐를 안 가져왔거든요.”
“고삐?”
“그런게 있습니다.”
연아가 상대가 아니라면 김비서쯤이야, 문제 없지.
“그리고 우리 측에는 비밀 병기도 있으니까요.”
“비밀병기요?”
이따가 보시면 압니다. 부디 꺼낼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
*
*
“가이드라인입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측과도 협의를 끝냈습니다. 이 것만 통과하면 바로 착수 가능합니다.”
윤피디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그런데 개발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물론 그쪽은 그쪽 나름의 의견이 있겠죠.”
“그쪽 의견을 수렴하면 불가피하게 착수에는 시간이 더 소요되겠군요.”
“수렴한다면 그렇겠죠?”
“네?”
“그쪽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결국 협상하기 나름이잖아요? 우리는 우리대로 전력을 다해서 최대한 우리의 가이드 라인 대로 흘러가도록 노력해야죠.”
김비서는 권태인을 떠올렸다.
‘이렇게 한판 붙게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하지만 피차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다. 사업부의 입장에서는 빠른 제작을 바라고, 개발측에서는 게임과의 시너지를 위해 자신들과 보조를 맞추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실적을 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이니,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
권태인이 만만치 않은 동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의 뒤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표세인이다.
하지만 자신 역시 만만치 않고 조연아를 배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여러면면들을 따져봐도 자신 쪽에 불리한 요소는 없다. 하지만 왜일까, 일말의 께름칙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
‘실장님을 위해서라도 이 참에 표팀장 기를 좀 죽여놔야겠지?’
근래 사내에서 무서운 속도로 입지를 다져가는 표세인이었다. 깨비몬도 그의 머리속에서 나온 생각이고, 사내벤처라는 파격적인 지원까지 등에 엎었다.
이런 상대는 장래 조연아가 회사를 운영하게 되기 전에 기를 눌러 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조연아를 위한 길이라고 김비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비서는 윤피디와 함께 미팅실로 향했다.
*
*
*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이쪽은 저희 깨비몬의 영상제작을 감독해주실, 윤피디님이에요.”
“윤정훈입니다. 편하게 윤피디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표세인 팀장입니다.”
“권태인입니다.”
미팅실의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김비서는 여유만만한 얼굴이었고 윤피디는 평범했다.
서로가 예상하는 바는 명확하다.
‘결국 정면승부겠지.’
무엇보다 같은 회사,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프로젝트의 성공이라는 목표.
하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원활한 개발프로세스 확립을 위해서라도, 사업부 측에 고삐를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 저희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윤피디는 사전에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주요 골자는 대강 이렇습니다.”
시나리오 플로우에 문제는 없었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모험과 함께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우정, 그리고 깨비몬의 활약과 유대.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개와 구성으로 무장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네.’
주요쟁점은 세계관과 등장할 깨비몬의 종류와 순서, 그리고 시스템적 사안이었다.
“우선 깨비몬이 세계관이 섬 단위의 아일랜드 월드라는 점과 크래프팅 요소의 어필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탐험 요소를 넣어주신 것은 저희도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에피소드 상에 크레프팅을 이용한 야영지 건설 요소가 추가될 수 있을까요?”
“모험을 위해서는 시점 변환이 핵심이고 드라마 구성을 위해서도 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할 수 있는 마을등의 인프라 구성이···”
“외딴 섬, 그리고 그곳에 거주중인 부족민 정도로 해결이 안되겠습니까? 굳이 주인공에게 미션을 주는 대상이 마을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음······ 그렇긴 하지만······ 소켓몬에서도······.”
“우리는 몬스터를 육성한다는 점만을 벤치마킹한 것이지, 그 외에 모든 부분에서 소켓몬과는 전혀 다른 지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배틀 이벤트를 굳이 소켓몬의 트레이너가 연상되는 각 속성의 마스터들로 구성했다는 점은 다소 우려가 되는 군요.”
“그렇다는 말씀은 크레프팅 요소를 좀 더 전면에 세워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고 자신의 주변환경을 구축해 나가는 샌드박스 요소 그대로를 보다 전면에 세워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일견 이해가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협의된 내용의 핵심 요소들을 재 논의해야할 것인데······”
윤피디는 슬쩍 김비서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 게임이든 영상이든, 개발자들은 결국 더 좋은 아이디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김비서는 물주(?)라고 할 수 있는 연아의 심복이다. 아마도 영상제작 일정은 윤피디의 의향 보다 저쪽의 컨펌이 우선이겠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모험 그 자체를 여행에 포커스에 맞추기 보다는 서바이벌에 맞추자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모험이라는 키워드는 분명 강력하지만, 깨비몬은 단순히 아동들만을 위한 컨텐츠가 아닙니다. 세대를 초월해 유저들을 아우르는 강력한 IP가 되기를 희망하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눈을 돌려 권태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권태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신규 장비의 성능을 실험해볼 기회다.
나는 권태인을 조련하기 위한 방향을 칭찬과 신임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권태인의 업무능력 역시 충분히 신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가 자신의 성능을 선보이는 자리에서는 가급적 나는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
“일단 자세한 논의는 저희쪽 의견을 참고하신 뒤에 보다 심도 있는 토의를 진행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권태인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우선 깨비몬 게임버전의 시나리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화면을 넘기자, 외딴 섬과 모닥불, 그리고 스마트폰 형태의 깨비몬이 등장했다.
“낯선 섬에서 눈을 뜬, 유저는 스마트폰에서 각성한 깨비몬과 만나게 됩니다.”
권태인은 명료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시나리오, 거기에 시스템과 컨텐츠 적 특성을 빠짐없이 소개되도록 섬세하게 퍼즐을 조립하듯이 완성한 시나리오.
오직 영상만을 위해 제작된 시나리오와는 결이 다르면서,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본연의 재미 요소를 지키기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자신의 작품을 그녀는 막힘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식수와 식량, 거기에 도구와 거주지. 주인공은 깨비몬과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씩 자신의 거처를 완성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에서 주요한 포인트는 처음 주인공이 접한 낯선 세상에 떨어졌다는 난처한 감정을 희석하고 이것을 새로운 모험의 장으로 여길수 있도록 개연성 있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게임 보다는 윤피디를 향한 조언일 것이다. 권태인은 이런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일처리에 능숙한 인재다.
“에피소드의 전개 방향에 따라서 필요한 물건이 생기고, 그것을 제작한 도구를 만들고 채집하고 생산하고, 그것으로 자신과 주변에 기쁨을 주고, 때로는 필요한 재료를 위해 탐험하고, 더러는 습격자들에게서 본거지를 방어하는 등의 이야기들로 플롯의 여러 변주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연결고리가 미약한 단순한 모험 보다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올 수 있겠군요.”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서 세계관과의 연결고리가 미약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지요. 확고한 세계관이 성립되어 있지 않으니, 자유롭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감정은 잊고 있었다 뿐이지, 어른들에게도 남아 있지요.”
“그런 심리를 공략한다라······.”
윤피디가 서서히 권태인의 이야기에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좋아. 잘 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어른들에게는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주요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로움을 덜어줄 깨비몬이라는 유용한 펫은 이런 논지에서 무척 유용한 어필 코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내가 첨언한 부분이었기 때문일까? 권태인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자신의 역량이 어떠냐는 듯한 자부심과 내가 첨언한 부분을 제대로 전달했느냐는 질문이 모두 섞여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감정은 누구나가 가질 법한 대중적인 정서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깨비몬은 단순한 펫 이상입니다. 때로는 펫으로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반자이고, 때로는 도구가되어 주인공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주요 장치로 활약합니다. 게다가 탈것이 되어 주인공의 이동수단이 되거나, 주인공이 옮길 수 없는 물건을 운반하는 주요 운송수단이 될 수도 있지요.”
“깨비몬 어필에 관해서는 저희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다만?”
“맞습니다. 그 점 감사드립니다. 다만 순서와 종류에 대해 조금만 논의드리고 싶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깨비몬 디자인과 컨셉은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는 상황이니, 그쪽에 전달된 자료들은 다소 올드버전일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흠, 흠. 그렇군요.”
“게다가 깨비몬 육성도 빠질 수 없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을 어떻게 재미나는 퀘스트로 엮을 것인가? 물론 게임속 퀘스트를 애니메이션에 그대로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을 하나의 소스로 삼아서, 윤피디님께서 보다 멋진 이야기로 승화시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권태인의 준비는 완벽했고 설득 또한 물들인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윤피디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래, 그녀 역시 기획자인 것이다.
누누히 말했듯이 기획자는 탱커인 법. 그런 그녀가 나의 장비로 활용된다면 당연히 그녀는 훌륭한 방패일 것이다.
상대의 어떤 요구나 문제에도 흔들림 없이 기획을 지켜내는 견고한 방패.
-띠링!
+3 방패(속성 없음)를 손에 넣었습니다.
처음으로 공격이 아닌, 방어용 장비를 획득했다.
아직은 길이 덜 들었지만, 성능만은 확실한 장비!
나와 권태인은 서로를 보며 실풋 웃었다.
나를 발판 삼아 도약하려는 권태인과 그녀를 길들이려는 나.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우리였지만······.
‘슬슬 타이밍을 재볼까?’
안됐지만, 조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비밀병기를 등장시킬 타이밍을 계산했다.
< 모두 내가 먹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