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96화 (96/346)

96.

권태인은 선전했다.

윤피디의 질문들을 모조리 받아내며, 자신이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을 확실하게 상대방에게 각인시켰다.

게다가 어차피 윤피디 역시 크리에이터다. 보다 나은 소스를 제공 받는 상황이 기분 나쁘거나,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는 권태인과 윤피디의 대화 보다는 김비서에게 집중했다.

개발자들이야, 프로젝트의 퀄리티를 향상시킬 소스를 발견하면 눈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사업부 쪽에서는 어떨까?

시간은 곧 돈이다. 이미 자신들 선에서 검토가 정리된 내용이 변경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게다가 영상물의 제작이 늦춰지면 거기에 연관된 여러 사업 계획 일정에도 다소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흠흠.”

드디어 김비서가 침묵을 깨고 목을 가다듬었다.

“말씀하신 내용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의문이 있네요.”

“어떤 의문이시죠?”

“다른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기존에 저희가 선별한 영상물에 등장할 깨비몬들 리스트까지 교체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우려가 되네요. 알고 계시죠? 저희는 이 리스트에 맞춰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브랜드와 협력해 제품 출시 계획이 진행중이고, 그 후에는 연예인들까지 해당 제품을 방송에서 피피엘로 내보낼 계획이죠. 이거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닙니다.”

나왔다. 그래 결국은 돈이다.

그리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엄청난 금액이 들어간 일이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사업부 입장에서는 사소한 계획 수정, 하나라도 쉽게 용납하기 어려울 터.

“원래 계획은 깨비몬이 레퍼런스로 삼은 소켓몬 애니메이션의 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입니다.”

“하지만 깨비몬은 몬스터를 육성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소켓몬과는 전혀 다른 타이틀입니다.”

“그렇다고 검증된 방식 대신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권태인 차장님께서 말씀하신 방향대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끝났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소켓몬의 플롯을 따라 만들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 않나요?”

“맞죠. 하지만 저희는 책임을 지죠. 그쪽은 어떻죠? 책임질 수 있습니까? 권태인 차장님이? 아니면 표세인 팀장님이?”

김비서는 오만한 눈빛으로 나와 권태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건 그거네······’

책임 운운 한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은 주도권 싸움을 위해, 이 사업의 방향키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그 방향키를 쥔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주지시키려는 것.

조연아 실장.

갑작스럽게 조회장의 딸이라며 정체를 밝힌 연아였다. 그 이름의 무게는 어떤 의미에서 현재 회장님의 이름 만큼이나 무겁다.

후계자로 여겨지는 연아게에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이건 연아의 스타일이 아니지.’

아니, 연아가 아니라, 가풍 자체가 그렇지 않나? 노력없이 얻은 권위 보다 스스로의 능력을 선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고, 비서실이 아니라, 부사장 정도 직함을 달고 땅콩 봉지를 흔들었으리라······

오히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이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장본인이 바로 연아일 것이다.

그런데······ 연아의 오른팔인 김비서가 그것을 모를까?

아니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하고 있다.

아직 사내에 연아의 됨됨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회장 직속 비서였던 탓에 타팀과의 교류도 극단적이었고, 제임스만큼은 아니라도 연아 역시 회사에서는 새침한 모습으로 자신의 속내를 숨겨왔었지 않나?

‘이러면 너무 쉬운데?’

김비서가 확신을 갖고 꺼낸 카드는 하필이면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아니, 반대로 이용해먹기 딱 좋은 카드가 아닌가?

“책임이라니······”

권태인 차장은 살짝 혼란에 빠졌다.

‘이참에 권태인 차장과의 기싸움도 해결될 수도 있겠는데?’

그녀가 감당 못 할 상황이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라니······ 이건 웬 떡이란 말인가?

“결국 결정은 책임자의 몫이겠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만, 영상 제작관련해서 어디까지나 그쪽의 포지션은 소스 제공 정도라는 점을 명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권태인의 프레젠테이션이 어느샌가 파워게임에서 소스 제공으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권태인은 그저 어버버하며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미팅의 목적이 이거였군?’

처음부터 개발 파트에서 사업부의 진행에 왈가왈부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개발이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상하 관계를 정립하려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으리라.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자유로울 수 있는 회사원이 있을 턱이 있나? 그녀의 그림은 문제가 없다.

물론 그녀의 노림수가 뻥카임을 모른다는 전제조건만 지켜진다면!

“그럼 표세인 팀장님께서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이번 회의는······”

“전혀 동의가 안 되네요.”

“네?”

“책임? 책임을 누가 진단 말씀입니까? 설마 조실장님이 책임을 진다거나, 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시죠? 고작 실장급이?”

“고작 실장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조실장님께서는······”

“회장님 따님이시라고요?”

“음······”

김비서는 분명 연아가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원치 않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내가 먼저 쐐기를 박아버린다.

어차피 네가 꺼낸 패다. 네가 연상시킨 거다.

조연아가 회장 딸임을 앞세워 타부서를 압박하는 그림을 네가 그린 거다. 그러니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

“조실장님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합니까?”

“뭐, 뭐요?”

“회장님 따님입네하고 외치면, 유저들이 불같이 달려들기라도 한답니까? 아니면 애니메이션이 알아서 더 재미있게 만들어지기라도 한답니까?”

“표팀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는 그저 책임 소재를······”

“그러니까.”

나는 의도적으로 조연아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조연아 실장이, 책임을 지면 뭘 얼마나 질 수 있다는 겁니까?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잘 안 되는 걸 뭐 어떻게 할건데요?”

“이 프로젝트는 조실장님께서 직접 자신의 사활을 걸고······.”

“프로젝트 엎어져서 사표 쓰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막말로 조실장님이 사표 쓰는 것과 제 커리어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죠?”

물론 연아가 사표를 쓰는 일은 내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겠지만······.

그것 역시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쪽은 사업부가 아닙니까. 깨비몬 캐릭터 상품 만들고 외부 영상물 제작은 그쪽입니다. 하지만 주요 디자인과 플롯컨셉은 저희 역할입니다. 이거 오해하시면 선 넘는 겁니다. 혹시, 지금 선 넘어오시겠다는 신호입니까?”

내 말에 김비서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이렇게 공격당하는 순간에 나오는 반응이야말로 상대의 진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과연 김비서는 어떻게 나올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지난번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회식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기억한다.

정작 본인이 해외 출장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특유의 당당함과 시원시원한 느낌은 인상 깊었다.

‘연아와 각별한 관계라고 했었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비단 이번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연아의 심복이기에 호기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표팀장님.”

드디어 김비서가 입을 열었다.

“네.”

“멋있으시네요.”

“네?”

“차기 회장 이름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배포, 프로젝트의 성공을 향한 열정. 진짜 아쉽네······. 여자친구랑 사이좋아요? 혹시 문제 같은 것 없어요?”

“여자친구와 사이좋습니다. 곧 결혼할 예정입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짝.

김비서는 갑자기 손뼉을 마주쳤다.

“좋아요.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마음이 조급했던 탓에 실언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깜끔한 사과를 통한 빠른 태세전환.

순간 권태인이 안심한 듯 내 쪽을 바라보았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김비서는 자신의 패가 통하지 않을 경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차라리 득달같이 달려들었다면 요리하기가 쉬웠을 텐데······.

확실히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마주 사과했다.

“저도 조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무례를 범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사과했는데, 나만 계속 뻗댈 수는 없다.

그래도 상대의 가장 강력한 패를 꺾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이제 다음 턴의 움직임에 주시해야 할 때.

“하지만 그렇다고 영상제작의 일정을 개발쪽에 온전히 맡길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너무 완벽함을 갖추려는 것보다는 정해진 일정을 준수하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일 경우가 많으니까요.”

글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업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사업부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목표와 개발이 바라보는 목표 간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어서 불안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애니메이션 개발 일정에 대한 주도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윤피디님께서도 개발쪽의 요구사항은 파악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능한 한 오늘 주신 소스들을 이용해서······.”

설마 이대로 미팅을 끝내겠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아직 미팅을 끝내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습니다.”

“무슨 더 하실 말씀이라도?”

“영상물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 있더군요.”

“그게 뭐죠?”

“마침 담당자가 대기 중이니 그와 말씀을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담당자?”

권태인 조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노트북에 설치된 영상통화 앱을 실행했다.

그러자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지부 인원들의 얼굴이 크게 출력되었다.

‘아······. 이 미친놈들······.’

화면 속 제프리와 그 팀원들은 지난번 내가 미국 출장 중에 보았던 그대로, 제다이 분장을 하고 있었다.

“제프리, 그리고 모두들 오랜만입니다. 그럼 시작해주세요.”

괜한 헛소리가 나올까 두려워, 나는 곧바로 시연을 부탁했다.

“예스, 마이 마스터.”

그리고 일제히 플라스틱 광선검을 아래로 내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닌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나와 영상속 제프리팀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이 따가웠다.

‘진짜 이것만 아니길 바랐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주위의 시선은 모른척했고, 제프리와 아나 역시 그들이 준비한 것을 시연했다.

“이것이 제프리팀이 새로 개발한 상호연동형 영상물의 테스터 버전입니다.”

제프리의 노트북에는 급조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출력되었다.

스마트폰 형태의 깨비몬이 화염을 발사하는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제프리는 화면을 정지시켰다.

“여기 보시는 이 모형은 차후, 깨비몬 완구에 들어갈 바코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이 시작되기 전, 이 바코드 하단의 코드를 입력하면······.”

조금 전에는 화염을 발사했던 스마트폰 형태의 깨비몬이, 이번에는 게임패드 형태의 깨비몬으로 바뀌어 전격을 발사했다.

“이, 이건 대단하네요······. 그런데 이러면 박진감 넘치는 연출은 상당히 제약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윤피디는 크게 인상을 받았다는 듯이 감탄했다.

“현재 버전에서는 전투 중의 카메라 워크를 완전히 잘라 붙이는 수밖에 없지만, 차후 저희의 목표는 주인공까지도 몇 개의 바리에이션에 따라서 교체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맙소사······.”

“누구나가 자신의 캐릭터에 더 애착을 갖기 마련이죠. 여기에 필요한 리소스전환 작업은 저희가 고안한 AI의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치환됩니다. 저희는 이것이 차세대 애니메이션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진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좌우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NFT를 통해서 자신만의 유니크한 캐릭터를 손에 넣은 유저들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가치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어쨌건 미국지사가 보유한 우수한 기술력을 어필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더 이상 쓸데 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나는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습니다. 제프리.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포스가 함께하길.”

방금까지 딱 좋았는데······. 결국 마지막은 이런 촌극 같은 대사로 마무리하는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김비서와 윤피디는 경악하는 얼굴이었으니까.

게다가 권태인까지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미국지사 개발자들이, 표팀장님에게 무척 우호적인 것 같네요.”

“네, 뭐 그런 편입니다. 이제 일정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부하직원 조련, 영상매체 개발 주도권, 사업부와의 기 싸움.

이번만큼은 단 하나도 양보 못 한다.

모두 내가 먹어야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연아의 사표가 걸린 일이지 않나?

이건 결코 남의 손에 넘길 수 없다. 지금의 나에게 그 정도 카드로는 어림도 없다.

< 이제 그런 거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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