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아아, 완전히 당했네.”
“저도 그런 기분이네요.”
김인숙과 권태인은 바 테이블에 앉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미국지사에서 개발 중이던 영상교체 기술을 몰랐어요?”
권태인의 질문에 김인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완성되고, 적용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무엇보다 표세인 팀장은 문이사와 척진 관계 아니었어?”
본사의 입장에서 미국지사는 문상훈의 홈그라운드였다.
그런 만큼 그와 앙숙지간인 양성태의 오른팔인 표세인은 미국지사의 도움은커녕, 배척수준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라고는 해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의 시연까지 직접 선보이며 표세인을 돕다니?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출장 동안 미국지사 인원들을 구워삶았다? 지금 이런 그림인 거지?”
김인숙의 질문에 권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되죠? 어쩌면 문이사님과도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완전히 당해버렸네.”
김인숙은 한탄했다.
표세인이 꺼낸 제프리팀이 개발한 영상치환이란 카드 덕분에 주도권은 개발 쪽으로 완전히 넘어 가버렸다.
차세대 기술 적용을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검토받아야 하는 상황.
더군다나, 애초에 NFT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과 함께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렇기에 표세인의 말대로 연아라고 해도 이 부분만큼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근래 게임 개발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NFT와 블록체인이라는 단어를 연호하고 있었다.
몇몇 회사는 그저 그 단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주가가 기적 같은 반등을 이뤄낼 정도.
누구도 그 실체와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지만, 신기술이라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더군다나 비트코인이 문을 연, 새로운 골드러시의 개막이 투자자들에게 황금향으로 비춰지고 있는 까닭에 이 흐름에 반기를 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꺼내기만 해도 모두가 침을 흘리는 아이템들이지. 이런 패를 꺼내 들면, 사업부는 아니, 사업부라서 더욱 깨갱 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너 정말로 몰랐어?”
“전혀요. 물론 기획안에 언급은 되고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빨리 완성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 그게 바로 표세인 팀장이 미국지사와 강력한 파이프라인이 완성되어 있다는 거지.”
김인숙은 스스로 말하고도 의문스러웠다. 정작 표세인의 보스인 양성태는 미국은커녕 본사의 개발파트 쪽으로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모든 일을 표세인 혼자에게 맡겨둔 것처럼······.
“설마 이거······. 아니지, 그건 말이 안 되지.”
잠깐 김인숙의 머릿속에 근래 새롭게 대두된 양성태의 파벌이, 실제로는 표세인의 파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작 팀장급 인사가 양성태 같은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상훈은 또 어떤가?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다.
“너도 힘들겠다.”
김인숙의 말에 권태인은 말없이 칵테일 잔을 들어 올렸다.
“천이사님은 네가 표세인을 휘어잡기를 바랄 텐데.”
“그렇겠죠.”
“가능하겠어?”
권태인을 바라보는 김인숙의 눈빛에는 짙은 걱정이 베여 있었다.
과연 권태인이 표세인과 경쟁이 가능한 재목일까?
권태인 하나만 놓고보자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표세인 팀장은 정말로 그릇을 모르겠단 말이지.’
김인숙 안에서 아직 표세인이라는 존재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미팅으로 더더욱 정체를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간단한 기 싸움 정도를 예상하고 나섰던 것이 문제다.
물론 그게 아니었다고는 해도 표세인이 숨기고 있던 카드가 이렇게나 강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니, 달라질 일은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굴러들어온 돌에, 배경은 양실장 하나. 사실 그렇게만 보면, 해볼 만하다 싶지.”
“솔직히 그랬어요.”
권태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과 김인숙 사이에 이미지 관리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까.
“그래서 겪어보니 어때?”
“오늘 많이 당황하셨죠?”
“그렇지.”
“근데 저도 똑같았다니까요. 조금 전 말씀 드렸다시피, 일할 때는 여느 팀장들과 별다를 것이 없어요. 조금 손이 빠르다는 것 정도? 그런데······. 묘하게 대하기가 어려워요.”
“대하기가 어렵다?”
“뭔가 꼬투리를 잡힐 것 같다는 느낌?”
“깐깐한 타입이야?”
“그건 전혀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분위기가 있어요. 정말 이상하다니까요?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하는데도, 가끔 압박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권태인의 말에 김인숙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페이퍼 머신인데, 정치력도 뛰어나고, 부하들 장악력도 탁월하다? 거기다가 손대는 족족 대박행진?”
“그렇게 말하고 보니, 좀 무섭네요.”
“진짜 아깝네. 혹시 애인이랑 정말 문제 없다든?”
“지금 그런 농담할 때에요?”
“나 진지하다.”
“저랑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겠어요.”
권태인의 말에 김인숙은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이지, 제대로 체면 구겼네. 연아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조실장님이요?”
“응, 싫어할 것 뻔히 알면서, 이름까지 팔았는데, 되려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잖니.”
“만신창이까지는 아니지 않았어요? 마지막에는 적당히 서로 웃으면서······.”
“나 웃으러 간 거 아니야. 너희들 얼굴 구겨주려고 간 거야. 그런데······. 어휴, 표세인 팀장, 진짜 능구렁이 같다니까?”
개발의 입장에서 사업부의 횡포에 휘둘린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사업부 입장에서는 결국 주역은 개발이며, 자신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오늘 미팅에서 김인숙은 자신이 정말로 들러리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분명 미팅의 마지막 순간에 표세인은 웃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에 부드러운 손길. 누가 봐도 날카로운 구석 하나 없었지만, 김인숙은 마치 날카로운 바늘에 콕콕 찔리는 기분을 느꼈었다.
마치 영상개발자를 이곳까지 안내한 것이 사업부에게 허락된 역할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늦네.”
“뭐가요?”
“연아.”
“네? 조실장님이요?”
“뭘 놀래. 여자끼리 한잔하는 자린데, 연아만 쏙 빼놓기도 그렇잖아? 걔 일벌레 스타일이라서, 가끔 이렇게 불러내서 바람도 쐬게 해줘야지.”
“실장님은 연애도 안 하신대요?”
“자기 일은 일절 말 안 해. 남자친구는 있는 것 같지만······.”
“그런 분은 대체 어떤 남자를 만날까요?”
“글쎄, 헛바람 든 재벌 2세 좋아할 타입은 아닌데.”
권태인의 질문에 김인숙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사적인 자리에서 자주 만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생활을 늘어놓는 타입은 아니다.
술도 언제나 한 두잔, 입만 축일 정도만 마시는 타입이라서 취중 진담 같은 것을 기대할 수도 없고······.
“사실 걔도 얼굴 빼면 매력 없지.”
“······그거 죄송하네요.”
“엄마야!”
등 뒤에서 들려온 조연아의 대꾸에 김인숙은 화들짝 놀랐다.
높은 바스툴에 앉아 있었기에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했다.
“놀랬잖아!”
“······저도 오자마자 디스부터 듣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이거면 쌤쌤이죠.”
“안녕하세요. 권태인 차장입니다.”
“조연아입니다. 사적인 자리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여기 회사 밖이잖아. 이런 자리에선 회장 딸이든, 편의점 딸이든 똑같지.”
“언니네 부모님 편의점 운영하세요?”
“원래는 동네 작은 슈퍼였는데, 바뀌었어.”
결국 세 사람은 나란히 바테이블에 앉았다.
“아까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정확히 어떻게 진행된 건가요?”
“보자마자 일 이야기야? 여기 회사 밖이야?”
“미팅 끝나자마자, 미안, 한 방 먹고 왔어. 라고만 하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잖아요.”
연아는 피치크러쉬를 주문했다.
“말 그대로야. 표세인 팀장, 쎄더라.”
“쎄다고요?”
“응. 싱글싱글 웃으면서 목을 팍 조르는데, 제대로 당했어. 영상제작쪽은 아무래도 개발쪽 눈치 보면서 진행해야 할 것 같아.”
“그쪽 카드가 뭐였나요?”
“영상치환? NFT로 보유한 유저들의 정보를 영상에 넣어버리는 거라던데······. 예전 기획안에서 본 기억은 있는데, 기술 쪽 이야기는 잘 모르겠네. 태인이, 네가 나보다는 잘 알지?”
김인숙의 말에 권태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죄송해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핵심은 방금 말씀하신 그거겠죠. 유저 정보 값에 따라 영상의 일부를 대체한다는 거잖아요.”
“아, 미국지사에서 개발 중이라던, 그거군요.”
연아는 기억이 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새로운 기술이 접목된 부분 때문에라도 그쪽에 키를 넘겨줄 수밖에 없겠어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이거 내 잘못 아니야. 그렇지?”
김인숙의 말에 조연아는 피식 웃었다.
“애초에 간단한 미팅이었잖아요. 왜 열을 올리신 거예요?”
“우리 실장님 기 좀 살려주려고 그랬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조연아 실장이 책임을 지면, 뭘 얼마나 질 수 있냐고? 표세인 팀장 너무 건방진 것 아냐?”
“그렇게 말하던가요?”
열을 내는 김인숙과는 다르게 조연아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세게 나왔네.”
“어머, 이 상황이 재미있나봐?”
“말은 맞는 말이죠. 제가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나요.”
셔터맨 언급이나, 스스로를 장비처럼 사용하라던 남자친구의 말을 떠올린 연아는 작게 미소지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은 연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낙하산 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써야 할 상황.
다른 사람들이야, 설마 회장이 친딸의 수표를 수리할까? 의심하겠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조회장은 반드시 그 사표를 수리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반길 것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는 그의 철학 덕분에 자신의 정체도, 표세인과의 관계도 숨겨야 하는 이유이지 않나?
“그런데 넌 정말로 기분 안 나빠?”
“기분이요?”
“고작 팀장 따위가 널 업신여기는 것처럼 말하잖아?”
“책임을 지면 뭘 얼마나 질 수 있냐,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그래!”
벌써 취기가 도는 것인지, 김인숙은 텐션이 다소 높아진 상태였다.
‘얼마나 질 수 있냐.’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는 오직 연아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책임도 떠맡기지 않겠다는 결의. 그것을 어찌 모르겠나?
살짝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오, 그 미소 뭐지?”
“네?”
“역시, 한 방 맞고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지. 뭔가 표세인 팀장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지? 역시 내가 모시기로 한 여자! 자 말해봐, 뭐부터 하면 돼?”
김인숙은 한껏 달아올랐다. 반면 권태인은 달랐다.
“그런 이야기는 저 없는 자리에서 해야 하지 않나요?”
“너도 표세인 마음에 안 든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어쨋건 한 팀이고 제 팀장님인데, 다른 곳에서 맞고 오는 꼴은 못 보죠.”
“이런 상황에서 표세인 편 들기 있음?”
“기획팀 불러놓고 팀장 공격하기 있음?”
김인숙과 권태인은지지 않겠다는 듯이 물러서지 않았다.
“권태인 차장님.”
“으음······. 아, 아무리 조실장님께서 압박을 주셔도 팀을 배신하라는 것은 못합니다.”
애초에 천이사의 노림수와는 별개로 자신은 표세인과 선의의 경쟁, 혹은 그를 발판삼아 도약의 기회로 삼으려던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름 얼굴을 부대끼면서 약간이나마 정도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표세인은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것저것 힘을 실어주지 않았나?
“그러고 보면 영상 쪽 진두지휘도 너한테 넘겼지? 너 뭐야. 표세인이랑 벌써 짝짜꿍이냐? 너 애인 있잖아? 바람이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가만, 애초에 그 팀에는 반반한 애들 많지? 걔들 전부 표세인한테 반해있고, 뭐 하렘이고 그런거 아니지?”
“그만 하세요. 조실장님 앞에서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분위기 아니거든요? 뭐, 한 명쯤은 좀 분위기 쎄한 애도 있지만······. 아무튼 다른 이야기 해요.”
“잠깐.”
조연아가 진지한 얼굴로 권태인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네?”
“지금 그 이야기 좀 더 제대로 듣고싶네요.”
“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왜······.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죠?”
육하원칙?!
“맞아! 술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지! 연아 너도 성장했구나, 항상 술자리에서도 일 이야기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건 맨입으로 들으면 안 되지! 한잔 쏘고 시작해야지.”
흥이 난 김인숙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자 연아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여기 술 전부 사면 되요?”
“······너 친구 없지? 애가 왜 이렇게 무섭니······.”
친구 없고, 애인뿐인 여자.
조연아는 흔들림이 없었다.
“왜 아직도 입을 다물고 계시는 거죠? 권차장님?”
급기야 직급까지 튀어나왔다.
‘사, 사적인 자리라고 편하게 말하라더니······.
이제 그런 거 없다.
< 성장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