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그럼 다녀올게.”
“안녕!”
아직은 한국어가 어색한 타냐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제임스는 사랑스러운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순간만큼은 냉기는커녕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런데 제임스.”
“응?”
아내인 로렌스의 말에 제임스가 고개를 들었다.
“모처럼 한국에 왔는데, 가족들과 식사라도 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군.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야겠어.”
제임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거예요. 갓난아기 때 이후로는 보지 못해서 기억 못 하겠지만.”
“그렇군. 하지만 알다시피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리 유쾌한 분위기는 아닐 수 있어.”
“걱정 마요. 그때는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이제는 나도 잘하잖아요?”
로렌스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더 걱정이다. 그때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자신과 조회장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고, 이제는 타냐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군.’
마침 자신에게도 비장의 한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천이사와의 식사 때의 일은 따지고 보면 빚이라고 할 수 있겠지.’
빚을 받아낸다는 사고방식.
제임스는 어느새 표세인에게 상당히 물들어 있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그러시죠?”
제임스가 보자마자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가족들이 한국에 오면, 함께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저는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제임스의 아내분과 자녀분도 궁금하고요.”
“그녀도 표세인 팀장님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긍정적이시라니 다행이군요. 그럼 가시죠.”
“가요? 어딜?”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서 눈을 껌뻑였다.
“회장실입니다. 아버지께 전달드려야 하니까요.”
“제가 함께 갈 이유가 있습니까?”
내 말에 제임스는 그 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아시겠지만 저와 아버지는 그다지 돈독하지 않습니다.”
네. 그건 뭐 그래 보이더군요. 두 사람은 기질이 너무 다르고 딱히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타입도 아니다.
“로렌스와 타냐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탁이요?”
“연극을 꾸며 주시죠. 그런 것 잘하시지 않습니까.”
연극이라니, 내가 무슨 각본가도 아니고.
“지난번 천이사와의 식사 기억하시죠?”
“네.”
그래, 그때 제임스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사람 속 긁는 재주가 그렇게나 탁월할 줄이야.
“그때, 저를 이용한다고 하셨지요. 이번에는 제 차례인 것으로 하지요. 괜찮겠습니까?”
아, 그러면 할 말 없지.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들어주겠지만.
무엇보다 처가 일이 아닌가. 이건 어차피 전력투구해야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각본을 맡기셨다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도 해주셔야 합니다.”
“각오?”
“각본대로 행동해 주셔야 합니다. 불만사항은 듣지 않겠습니다.”
“······각오하지요.”
제임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둘이서 또 웬일이냐?”
나와 제임스가 함께 방문하자, 조회장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로렌스와 타냐가 한국에 왔습니다.”
“그랬군. 한국에서 지낼만 하다던?”
“네.”
“잘됐군.”
······.
어쩌면 이렇게도 사무적인 부자지간일까? 두 사람 모두 더는 할말 없다는 티가 역력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자고 여기 온 것은 아닐테고, 용건이 뭐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 주십니까?”
“내가 왜?”
조회장은 단번에 선을 그었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회장님이지.
“다행이네요.”
“다행?”
“업무상의 일로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도움을 드릴 쪽은 저니까요.”
“나에게 네가 도움을 주겠다고?”
조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제임스의 가족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가족들끼리 한데 모여서 식사라도 해야지요.”
“그, 그렇군.”
너무나 당연한 일이건만, 조회장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놀란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마왕의 포스를 풀풀 날리던 조회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제임스가 그런 자리를 마련하리라고 생각도 못했었다는 눈치였다.
대체, 이 집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솔직히 회장님과 제임스의 관계는 빈말로도 돈독해 보인다고 할 수 없지요. 그리고 그걸 제임스의 가족들에게까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
“······.”
두 사람 모두 입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런 부분만큼은 부자지간 답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조회장은 아직 살짝 경계심 섞인 말투였다. 아마도 내 꿍꿍이가 불안한 모양.
“제임스는 이번 가족 모임에 대한 일을 제게 맡겼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도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나 역시 말을 하면서도, 고작 가족 모임에 뭐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다.
외국인 아내와 어린 딸을 둔, 제임스의 걱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조회장의 속내는 어떨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면야······. 좋아. 그렇게 하지. 각본 한번 제대로 써보라고.”
“알겠습니다. 아버님.”
“아, 아버님······? 시작부터 쎄게 나오는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아버님이라는 호칭에 조회장은 살짝 당황한 눈치다.
하지만 여기서 나도 같이 당황하면 연출 및 각본 담당으로의 권위가 약해진다.
더욱 뻔뻔스럽게 가야한다.
“겨우 이 정도에 그런 반응이시면 곤란합니다. 아버님. 집안의 수장으로서 소임을 다해 주시지요.”
“무슨 소임씩이나······.”
역시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회장 본인도 모르는 카드가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나.
“아버님은 TRPG를 즐기시는 분이시지요. 게다가 마스터링까지 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게 지금 상황에서 무슨 상관이지? 가족끼리 모여서 보드게임이라도 하자는 건가?”
“마스터에게 가장 싫은 상황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않는 플레이어가 아니겠습니까?”
“!”
TRPG라는 단어 자체가 테이블 탑 롤플레잉게임의 약자가 아닌가?
롤플레이.
즉 역할극이다. 이 게임을 즐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플레이어들이 맡은바, 역할에 걸맞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
“게임, 어수룩하게 하시는 것 싫어하시죠?”
TRPG가 언급되고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이렇게나 공을 들여서 마스터링을 하는 장본인이, 정작 자신의 롤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 이제는 네가 나에게 게임을 제안하는 거냐?”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말투지만, 정작 조회장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미 하시겠다 하셨으니, 제대로 해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재미있군. 안 그래도 조만간 TRPG 준비도 끝날 참이었는데. 좋아, 그래서 내 롤은 뭔가?”
뭐긴 이런 상황에서 부여될 롤이 하나 밖에 더 있겠나?
“바보 역할 좀 해주시지요.”
“바, 바보?”
내 말에 제임스 조차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조회장은 반쯤 넋이 나간 모습.
“바보라니, 지금 날 놀리나?”
“저 진지합니다. 그리고 그냥 바보가 아닙니다.”
“그냥 바보가 아니다?”
“손녀바보.”
“!”
딸 바보가 실버랭킹 쯤 되면 손녀 바보는 플레티넘 쯤은 되지 않겠나?
이거 하나로도 집안 분위기는 완벽히 쇄신된다.
“어차피 예쁜 손녀입니다. 그걸 필터 없이 쏟아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손녀 바보라······.”
“가능하시겠지요?”
“해보지.”
조회장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손녀와 며느리 앞에서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
“역시 당신에게 부탁하길 잘했군요.”
제임스는 조회장의 반응을 보며 내심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럼 이제, 제임스 차례.”
“저요?”
그럼, 뭐 너는 놀려고 했니?
“웃어보세요.”
“······.”
-씨익.
세상에!!!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어색한 사람이 또 있을까?
“웃으라고 했지, 노려보라고는 안 했다.”
“이게 웃은 겁니다.”
조회장의 말에 제임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건 좀 시간이 필요하겠네.
“가족 모임이 있을 때까지, 웃는 얼굴 연습 좀 하세요. 계속 웃으라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기 위한 자리에서 노력 좀 해보라는 건데,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어쩌면 제임스는 이미 나에게 부탁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각본에 복종하지 않는 배우를 순순히 용납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각자 맡은 미션들 잘 수행해주시기 바랍니다.”
“미션이라······.”
“나보다 더 회장님의 아들 같은 성격이시군요.”
제임스는 질렸다는 듯이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네. 생각해보니, 이것도 게임이라면 게임인데, 아무 것도 안걸면 재미 없지.”
“······그렇게 매사를 게임처럼······.”
“제임스 잠시만요.”
나는 슬쩍 제임스 앞으로 나섰다. 모처럼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초 치지는 말아줘.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조회장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단순히 내기에 대한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못 견디는 성미인 탓에 내기라도 언급한 것이리라······.
이 타이밍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면 텐션이 급격히 하락할 터.
가족모임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물론 상품이 탐나기도 하고.
“그 말씀이 맞습니다. 뭐라도 걸려 있어야, 동기 부여가 되는 법이죠.”
“그래. 그래······. 이렇게 하지, 두 사람이 역할을 잘 수행하면, 내가 나중에 자네들 부탁 하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주지.”
간만에 나왔다! 황금 열쇠!
“그러면 아버님께서는요?”
“음······. 아버님이라······. 나는 뭐, 내가 잘 못 하면 자네들 부탁을 그냥 들어주는 거로 하지.”
“잘했을 때의 상품은 없이요?”
우리에게는 포상을 자신에게는 페널티만 부여한다?
“이래야 밸런스가 좀 맡겠지. 내 TRPG 경력이 몇 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실 니들 같은 초짜랑 어울려줄 짬이 아니야.”
하기사, 우리가 조회장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나?
나름 거기까지 파악하고 연장자로서의 아량을 베풀려는 모양이다.
아니면 진짜로 TRPG 경력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것일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덕분에 의욕이 생기네요.”
“······전 오히려 놀아난다는 기분이 드는 데요.”
“하여튼 저 놈은 재미가 없어.”
“회장님은 진지함이 없으시죠.”
여보세요? 다들 이번 가족모임 잘 하고 싶으신 것 맞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 치고, 연아는? 걔도 잘해야 하는 것 아냐? 너 모르나 본데, 걔도 지 오래비들과 함께 있으면 제임스 저리 가라 찬바람 쌩쌩 이야.”
“각자 자기 역할만 신경 써 주세요. 나머지는 각본가인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흠······. 그래, 맡기지.”
연아.
안 그래도 우리 요즘 데이트를 별로 못했지?
자, 뭘로 꼬셔볼까.
< 중견 배우의 자존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