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늦어서 미안.”
“아니야 괜찮아.”
나는 읽고 있던 타블렛을 내려놓았다.
“영어 공부?”
“이, 흐흐흐. 좀 해둬야 겠다 싶어서.”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좋네. 미국 출장이 의미가 있었나보네.”
“그것도 그렇고, 우리 결혼하면 제임스와도 한 가족이 되잖아. 미국인 친척이 생기는 셈인데,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아 싶어서.”
“······그렇지.”
이번에도 여지없이 씁쓸한 말투였다. 연아는 가족이 언급되면 이렇게 풀이 죽어버린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너무 티가나서, 나는 지금까지도 굳이 캐묻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연아가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굳이 묻지 않고 있다.
“요즘 일은 어때? 아주 잘하는 모양이던데.”
“그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는 거지. 아, 다음 주부터 캐릭터 프랜즈 샵들에 깨비몬 상품도 들어가게 됐어.”
“오오!”
저렴한 상품들은 이미 시중에 풀렸지만, 캐릭터 사업에 걸맞은 진짜 라인업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것들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되려나 보다.
“오빠도 잘하고 있지?”
“모두 열심히 해주고 있어서, 무리없이 이번 쇼케이스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거든.”
한국 게임스타 페스티벌에서 깨비몬 게임도 정식으로 선을 보인다.
예전에도 몇 번 게임스타에 출품한 적이 있지만, 메인 디렉터에 내 이름을 걸고 출품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도 살짝 긴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남궁원과 홍기도 두 사람의 버닝모드와 권태인을 중심으로 한, 레벨디자인 파트도 순조롭게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함송희가 만든 빼어난 개발툴 덕분에 일처리 속도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 넘은 상황.
“순조로운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내 눈치를 살핀 연아가 실풋 웃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첫 사업이 순항중이라는 사실에 안심하는 눈치.
지금 분위기 나쁘지 않다. 이쯤에서 용건을 꺼내도 괜찮겠지.
“제임스가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고 하는데 말이지.”
“식사?”
“제임스네 가족들이 한국에 왔으니 함께 식사해야지.”
“아, 그렇구나······.”
“너는 예전에 봤을 것 아냐?”
“오래전에 한번 본 것이 전부지.”
“조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사진으로 밖에 못봤으니까.”
연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불안해.”
“왜?”
“예전에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모였을 때, 별로 좋지 않은 분위기였거든.”
“그래서 안 봤으면 좋겠어?”
“아니, 보긴 해야지.”
연아의 반응에 나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연아가 우리 집에서 보이는 밝은 모습의 절반만 해줘도, 연아는 문제없다 싶지만······.
“회장님과 제임스도 이번 만큼은 제대로 해보고 싶어 하셔.”
“제대로?”
“일단 겉보기라도 화목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연기한달까?”
“연기라······. 확실히 연기할 수 밖에 없겠지.”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연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람은 누구나 성격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계 개선에 노력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지. 계속 연기를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진짜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럴까?”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게 어른스럽지 않은 느낌이다.
사실 연아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 쪽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거야.”
“뭘 시작해?”
“내 새로운 가족들이 좀 화목했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이것저것 해보려고.”
“아빠랑, 오빠들이 과연 순순히 따를까?”
연아는 조금 염려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조회장과 제임스 모두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다.
남이 시킨다고 순순히 따를 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하지만 연아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들은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기회를 놓친 채로 지내왔을 수는 있지만, 옆에서 등 떠밀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움직일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거 제임스가 먼저 부탁한거야.”
“정말로?”
연아는 진짜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응. 그리고 회장님도 내 각본에 따라주기로 하셨어.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조합인데.”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래서 정확히 뭘 어떻게 할 건데?”
“별 것 없어. 제임스는 그날 하루 웃는 얼굴만 유지하고······.”
“웃는다고?!”
뭘 그렇게 놀라나?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제임스도 사람인데······.
“일단 연습은 시켜놨으니, 어느 정도는 사람처럼 웃는 모습을 배워오겠지?”
“난 둘째 오빠에게 안면근육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그 정도로 안 웃었어? 그럼 지금 성격이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거야?
잠깐 제임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봤다. 어후, 이거 소름인데?
“그럼 아빠는?”
“회장님은 손녀 바보 연기를 하기로 하셨지. 좀 웃길 수도 있지만, 절대 그 앞에서 비웃지마.”
“크크큭.”
저기요? 벌써부터 그러시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하는데, 절대 회장님이나 제임스를 보고 비웃으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이 쑥스럽다고 연기 멈추면, 내 각본 그냥 아웃이야.”
“노력해볼게.”
“노력으로는 부족하지. 확실히 할 수 있어야해.”
“못하면?”
“너 그날 출장 갈래?”
내 말에 연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크큭, 농담이야. 하지만 진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야. 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건 알겠는데, 난 배역이 뭐야?”
“아주 중요한 배역이지. 나 영어 못하는 것 알지?”
“응.”
“그런데 제임스의 와이프, 로렌스라고 했던가? 미국인이잖아.”
제임스와는 달리, 진짜배기 금발에 푸른 눈(진짜로 그런 색인지는 모른다)을 지닌 내츄럴 본 아메리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언어의 장벽만큼은 내가 어쩔 수 없다.
가족 모임에 통역 붙이고 상대하는 것도 우습지.
그러니까.
“나는 로렌스를 맡아라?”
역시 똑순이다.
우리 여친님 눈치 하나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지.
물론 부족함 없는 부분이 눈치 하나는 아니지만.
사실 스펙으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외모로보나, 성격으로 보나,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지.
“왜 갑자기 그렇게 이상하게 웃어?”
“좋아서.”
“갑자기 뭐가 좋아?”
“네가 좋아서.”
“······알아.”
그래. 넌 항상 다 알고 있지.
“어쨌든 너는 로렌스를 좀 부탁해, 같은 여성끼리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게 친근하게 대해줘. 어차피 다들 연기하는 편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음······. 꼭 연기는 아니지. 어쨌든 새언니인데.”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 좋지.”
“그런데······.”
“응?”
“우리 가족들 죄다 연기시켜놓고 오빠는 뭐할건데?”
“아, 나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분위기를 띄워?”
“외국인들은 홈파티 할 때, 연상퀴즈나, 보드게임 같은 놀이를 한다던데.”
나는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꺼내 들었다.
“게임을 하겠다고?”
“꼭 게임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이런저런 사항들을 준비해서 대응해야지.”
기획서를 쓸 때,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하는 것이 바로 예외처리가 아니던가.
언제 어떤 돌발변수가 발생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나는 그날 광대 역할을 맡아야겠지.”
“오빠가 광대 역할? 풋, 그것도 안 어울린다.”
“왜? 나도 할때는 잘해.”
타고난 덩치가 큰 캐릭터일수록 필요할 때는 남들 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세종이에게도 누누이 그것을 가르쳐왔다. 그 가르침이 지금의 세종이를 만들지 않았나?
따지고 보면 내 죄가 크다.
필요할 때, 광대 역할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시도때도 없이 그렇게 살라는 것은 아니었는데······.
“좋아. 그럼 캐스팅은 끝났네.”
“······잘 될까?”
“물론이지.”
“하긴 엄마와 큰오빠도 없으니······.”
“이번에 기반을 잘 다져놓으면 나중에 그분들이 방문하실 때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
이런 또 어두워졌다.
조회장과 제임스만해도 캐릭터가 만만치 않은데, 대체 장모님과 큰형님은 어떤 케릭터란 말인가?
“혹시 원치 않아? 역시 그냥 출장갈래?”
“뭔소리야.”
내 말에 연아가 내 팔을 툭 쳤다.
그래, 웃으라고 한 말이야. 진짜로 갑자기 출장 핑계로 발빼면, 그거야 말로 분위기 싸해지지.
“엄마랑, 큰오빠가 없을 때는 그나마 괜찮아.”
연아의 표정에 장난기 따위는 없었다. 진짜로 큰 걱정을 안고있다는 것이 전해진다.
아, 산넘어 산이구나.
대체, 조씨집안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 아니지. 그사람들 보다 당장 눈앞의 일이 우선이지.”
“무슨 말이야?”
“난 아빠와 오빠가 맡은 배역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데?”
연아는 마치, 너는 그들을 믿어? 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음, 내가 굳이 그들에게 미션 운운하면서 역할을 제시한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조씨집안 사람들 특징이 일은 열심히 한다는 거지.”
“일?”
“아마, 일하는 기분으로 노력하지 않을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는데······. 그냥 막연한 믿음은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니, 나름의 노력은 아끼지 않을 것이다.
*
*
*
“양실장.”
평소와 똑같은 호명이었지만, 음성에 담긴 온도가 달랐다.
이런 미세한 차이를 양성태는 정확히 캐치했다.
“무슨 우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양실장의 말에 조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자네 부모님께서······.”
부모님?
양성태는 당황했다.
비록 조회장과 자신이 다소 가까운 관계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개인사를 질문한 적은 없었다.
“손자를 예뻐하시나?”
“네?”
“자네 여동생이 아들만 셋이라고 하지 않았나?”
양성태는 결혼을 일찍 했지만 아직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반면 그의 여동생은 아들만 셋.
이따금 방문하면 인세 지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광경이 연출된다.
“네, 무척 예뻐하십니다.”
“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그게 무슨?”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부모와 조카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 딸바보라는 단어가 있지 않나.”
대화가 계속될수록 점점,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이건 짐작이 불가능한 종류겠지. 그러고보니, 어제 표세인 팀장과 제임스가 회장님을 방문했었지.’
표세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면 양성태는 생각을 멈춰버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차피 자신이 머리를 굴려봐도, 도통 짐작이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니까.
그래도, 표세인이란 이름 옆에 나쁜 일이 따라 붙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골치썩지 말고 흐름에 몸을 맡기자.
양성태는 체념과 동시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을 멈추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다니, 이것이 무척 낯설면서도 즐겁다.
“네, 압니다.”
“그 파생형으로 손녀 바보라는 단어도 있는 것 같더군.”
“그렇습니까? 확실히 손자, 손녀를 끔찍하게 아끼는 조부모들은 많지요.”
양성태의 말에 조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맞는 거지. 나라는 녀석도 참, 모자란 구석이 많아.”
“······.”
이건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되는 혼잣말이다. 양성태는 침착하게 조회장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예시 자료 좀 구해주게.”
“예, 예시 자료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손녀 바보 노릇하는 할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가능하다면 연기 포인트까지 구해준다면 좋겠군.”
“여, 연기 포인트요?”
조회장의 심복이라 불리며 지내온 지금까지 양성태가 이렇게나 조회장의 속내를 읽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말이지······. 웃는 얼굴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에게 밀리면 안 되지 않나?”
“?”
어차피 자신은 진심으로 손녀와의 만남을 반기고 있다.
따지고보면 100% 연기도 아닌 셈이다.
‘흥, 맡은 배역을 잘 수행해? 감히 누구에게······. 다들 놀라 자빠질 걱정이나 해두거라.’
TRPG 경력 수십 년의 중견 배우의 자존심이랄까?
조회장은 불타고 있었다.
< 각성 효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