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01화 (101/346)

101.

“그런데, 제임스.”

“예.”

제임스는 고부장의 부름에 인사평가서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나처럼 끝물도 아닌데, 굳이 이런 위험한 줄타기를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아무리 양실장님이 뒷배라고는 해도, 천이사님 같은 분과 각을 세워서 좋을 것을 없을텐데?”

“······.”

자신을 염려하는 고부장의 말에 제임스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지 모르는 천이사의 견제 따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실장이 내 뒷배라.’

한배를 탓다는 표현이면 모를까, 뒷배라는 말에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니,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네. 그냥 노파심에 헛소리가 나왔군.”

같은 부장이지만, 두사람의 나이차는 상당했다.

고부장 입장에서는 제임스는 앞길이 창창한 상황.

적당히 융통성 있게 처세를 한다면 훗날 어렵지 않게 임원직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나?

자신처럼 사활을 걸고 위험한 판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괜한 오지랖이 발동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맡은 일만 잘하면 어련히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는 사내 정치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이 자연스럽게 그런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사내정치의 무게감을 낫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임원급 승진을 위해서 사내정치라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가야 한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어련히 해결된 다라······.”

고부장의 입장에서는 앞길 창창한 젊은 인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돌이켜 볼 때, 그저 맡은 일만 묵묵히 해내는 이들이 순탄하게 승진가도를 달리는 경우는 그다지 없었다.

특히 팀장, 부장급 이상부터는 스스로의 업무 역량보다는 팀의 역량에 승진고과가 갈리기 마련.

스스로의 업무 역량만으로는 돋보일 수 없기에, 사람들은 파벌의 문을 두드리고 자신을 세일즈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과장 때까지가 참 일할맛 나지.”

그런 의미에서 사원-대리-과장 정도가 가장 일할 맛 나는 포지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사내정치라는 단어와 다소 한걸음 물러서 눈 앞에 닥친 일들만 처리해도 좋다.

타인의 잘못까지 책임지지는 않아도 되는 적당한 위치.

윗선의 시선과 개인의 노력의 비중이 어느정도 저울의 수평을 이루는 위치.

“하지만 그러므로 더더욱 리더십 항목을 눈여겨 볼 수밖에 없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고부장의 혼잣말에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그래서 타팀 평가는?”

맥베스의 인사평가는 팀내부와 외부의 다면평가를 모두 수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다면평가에 따라오는 치명적인 단점.

업무와는 상관 없는 친분을 통한 가점이나, 편향적인 악의가 반영될 수 있단 점.

따라서 맥베스의 다면평가는 주로 파트장이나, 팀장급 등, 주위의 평가가 필요한 직책에만 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고부장과 제임스는 이번 과장승진 심사에 이부분을 적극 반영하기로 했다.

“독립스튜디오가 제대로 체계를 잡기 위해서는 팀의 주춧돌 역할을 맡아줄, 과장급 인재의 리더십이 중요할 거야.”

“동의 합니다.”

제임스 역시 고부장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업무역량 평가는 끝났으니 이쪽으로 넘어가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며, 같은 부장급이었지만 제임스는 의외로 고부장에게 키를 넘기고 그의 리드를 따라가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의외로 고분고분하기만 하구만.’

고부장은 제임스를 언급하며 이를 갈던 천이사를 떠올리며 혀를 끌끌찼다.

‘나름 연장자를 우대하는 모습도 깍듯하고.’

그것은 고부장의 착각이었다.

제임스가 고부장의 리드에 따르고 있는 것은 연장자에 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은 본사의 인사평가 방식을 잘 모르니까, 효율성을 위해 일단 고부장의 방식을 지켜보려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부장의 방식은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딱히 흠잡을 곳 없이 합리적이고 공정했다.

따라서 두사람의 일처리는 무척 원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단 남궁원 대리. 이 친구는 진짜······.”

“예. 좀비로얄측에서 보낸 평가서는 정말이지······.”

일을 잘한다는 것쯤은 알겠다. 이전 회사의 평가서에서도 에이스라 불렸다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좀비로얄 측의 인사평가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후했다.

“리더십, 업무역량, 커뮤니케이션, 상황대처······. 이게 연봉 책정 심사였으면, 이 친구는 임원급 연봉 받아야겠군.”

“미국지사라면 정말 그랬을 겁니다.”

제임스의 말에 고부장은 피식 웃었다.

“이런 보고가 올라오면 그냥 주나?”

마침 같은 회계 출신이다. 미국 스타일의 일처리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인사담당자에게 면접을 보도록 지시하겠지요.”

“연봉협상 기간이 아니더라도?”

“네. 대부분은 일괄처리하기 마련이지만, 이 정도 평가라면 연봉인상 폭이 너무 클 테니, 따로 관리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본사는 직급체계가 연봉을 크게 좌우하지만, 미국지사는 팀장 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팀원이 드물지 않으니까요.”

“감독 보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인기선수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인가?”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발 파트는 직급을 떠나 독보적인 스킬이나 성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확실히 한국과는 접근 방식이 다소 다르군.”

“예.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이상 눈에 띄는 인물이라면 그냥 임원으로 승진시켜 버립니다.”

“그, 그렇게 한다고?”

“선택하게 하는 거죠. 임원을 달겠느냐, 아니면 그보다 못미치는 급여에 합의하겠느냐.”

“그러면 임원이 넘쳐나겠군.”

“의외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임원은······.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애초에 해고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미국의 풍토였다.

어지간히 사고를 치지 않은 한, 임원직을 차지하면 철밥통을 쥐게 되는 국내와는 상당히 다른 정서였다.

“어쨌든 이 친구는 더 볼 것도 없이 올려야겠지.”

좀비로얄 개발사의 지나친 푸쉬가 아니더라도, 표세인을 대신해서 좀비로얄 개발을 진두지휘했다는 눈부신 성과를 내지 않았나?

그 좀비로얄은 현재도 디젤 스토어 베스트셀러에 당당히 그 이름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

“표세인 팀장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정규 승진 시즌에는 1순위로 승진했을 만한 인재야.”

“동의합니다.”

기존 평가에 있는 열정적인 경향으로 이따금 타팀과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는 단점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애초에 리더십과 열정이 강한 인물치고 개발 중에 타팀과 언성을 높이지 않는 인물이 드물다.

“그럼 문제는 공주혁 대리와······.”

“······홍기도 대리겠죠.”

“이건 좀 어렵군.”

애당초 4명의 후보 중에서 남궁원의 평가는 압도적이고, 민슬해 대리는 다소 평가가 낮았다.

자연스럽게 남은 한 자리를 두고 공주혁과 홍기도, 이 두 사람을 비교해야 하는 상황.

“공주혁은 다면평가에서 이렇다할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는군. 전형적으로 조용조용히 제 할 일 잘 해내는 타입이야.”

무엇보다 그가 담당하는 파트가 기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레벨디자인 파트라는 것도 가산점을 줄 수 밖에 없다.

기획파트에서는 드문 수학 전공인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홍기도 대리는 평가가 극과 극이군요. 특히 그래픽팀에서는 평가가 월등하고, 프로그램팀에서는······.”

“이 친구는 프로그램팀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군.”

“게다가 거쳐온 업무 방향도 정 반대입니다.”

“그렇지, 한쪽은 하나의 게임에서 쭉 성장했고, 다른 한쪽은 외주개발? 이거 뭐, 대체 몇 개나 개발한거야?”

“자잘한 프로젝트였다고는 하지만, 정말 여기저기 손대보지 않은 일이 없군요.”

한쪽은 큰 프로젝트에서 레벨디자인이라는 큰 파트를 맡아 꾸준히 성장한 인재.

다른 하나는, 이전 회사에서 표세인과 함께 갖은 외주들을 미친 듯이 쳐내며 성장해온 홍대리.

같은 기획인데도, 정말 하늘과 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난감하군.”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보통 이렇게 상반된 인재들을 선별해야할 때, 본사가 신경쓰는 주요 포인트가 따로 있습니까?”

제임스의 말에 고부장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있기는 있다.

하지만 입밖에 내는 것이 다소 국내 개발사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망설여졌다.

“있기는 있는데······.”

“뭡니까?”

제임스는 고부장의 심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곧장 채근했다.

“보통 학벌을 보기마련이지.”

“그렇군요.”

“미국은 다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게임개발사는 다소 다르지만, 특정 명문대 출신만 선발한다 광고하는 회사들도 많습니다.”

하버드 출신만을 고용한다는 것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로펌이나, 투자사 등이 즐비한 것이 바로 미국이다.

애초에 명문대 중심의 대학 서열화가 가장 심각한 곳이 영국이며, 미국은 영국 사회의 이러한 병폐를 받아들였다.

그 유명한 아이비리그라는 단어 역시, 옥스브릿지나, 골든트라이앵글 러셀 그룹 등의 단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던가?

“흠, 그렇다면 공주혁 대리가 다소 앞서겠군. 이러니 저러니해도 서울대 출신의 재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시죠?”

고부장의 말에 제임스가 반문했다.

“무슨 말이냐니? 공주혁 대리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출신이야. 그에비해 홍기도 대리는······. 뭐 일단 유학파이긴한데 동남아쪽은 아무래도······.”

“설마 싱가포르 국립대의 위상을 모르십니까?”

“그거 유명한가?”

고부장의 말에 제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한국은 자국 대학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지나친 경향이 있다.

“서울대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30위 권 중반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그거면 아시아에서는······.”

“반면 싱가포르 국립대는 11위 권입니다. 아시아 최상위고요.”

“!”

제임스는 놀란 얼굴의 고부장에게 인터넷에 올라있는 세계 대학 평가 순위를 보여주었다.

“대학평가라는 것이 정확하다 볼 수는 없지만 기준이 글로벌 평가라면, 이건 게임이 안됩니다.”

“그, 그건 몰랐군.”

고부장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역시 한국인이기에 국내 대학들에 대한 자부심에 눈이 멀어 있던 것.

“하지만 업무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학벌 가산점은 어불성설이지요.”

제임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그렇지.”

“일단 이 부분에서는 저희가 논점을 맞춰야겠지요. 행실보다는 행동, 입지보다는 성과를 놓고 염두에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의하네.”

하지만 그래서는 결국 평행선 아닌가?

“행동과 성과라면 과정 역시 중요할 수 있겠지요.”

“과정?”

“일단 지금은 특별 심사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신규팀을 지원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히 해두는 겁니다. 그리고 신규팀은 오롯이 표세인 팀장의 역량을 극대화 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도요.”

“그렇지, 그 친구가 여러모로 두각을 드러내니, 회장님께서도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으셨던 게지.”

“그렇다면 보다 표세인 팀장에게 유용한 인재를 승진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곁에 있던 홍기도 대리가······.”

“단순히 옆에 있던 시간이 길어서라는 이유로 승진시키는 것은 우습지요. 뭐, 가산점 정도는 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뭔가?”

이제 리드는 고부장에게서 제임스에게로 넘어갔다.

제임스가 본사의 사정을 듣기 위해 고부장의 말을 경청했었다면, 반대로 이번에는 표세인의 주변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제임스의 말을 고부장이 경청할 차례.

“아시겠지만, 현재 본사에서 사활을 건 프로젝트인 깨비몬. 그리고 이 깨비몬 개발의 핵심키는 다름 아닌 표세인 팀장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나?”

고부장이 표세인에게 가진 개인적인 호감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표세인의 입지는 확고한 상황.

“게다가 표세인 팀장은 더 이상 일개 팀장이 아닙니다. 사내벤처라는 독립 사업체를 이끌어가야할 입장이기도 하지요.”

“그렇지.”

고부장은 제임스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마이다스의 손이라도 얻은 것처럼, 손 댄 프로젝트마다 연거푸 성공시키며 압도적인 실적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 표세인 팀장이 개발에만 전념할 수 없게 되는 상황. 이것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특진 심사인 셈이죠.”

“그렇지. 독립 스튜디오를 이끌게 되면 단순히 개발일에만 매진할 수는 없겠지.”

“이해가 일치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물론 개발 이외의 자잘한 일 처리는 자신이 해결할 것이다.

표세인이 지닌 기획자로서의 탁월한 감각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조회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이자, 표세인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렇군. 그렇다면 그를 대신해 개발 전선을 이끌어갈 야전 지휘관 타입이 필요하다는 거로군.”

“예. 이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춘다면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공주혁 대리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는 한 프로젝트를 온전히 리드한 경험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권태인 차장의 비호아래서 자신의 역량을 빛낸 것이 전부지요.”

“그에 비해, 홍기도 대리는 외주개발 시절부터 홀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다, 이거로군.”

“예. 홍기도 대리는 일단 프로젝트를 홀로 시작부터 완성까지 끝낸 경험이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모두의 부동산의 매출 신장을 이뤄냈다는 실적도 충분하고요.”

결국 이래저래 홍기도를 낙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고부장은 잠시 이것이 제 사람 감싸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출신 대학에 대한 가점제를 주장하거나, 표세인과의 인연등을 어필했으리라······.

이것은 공정한가?

그렇다.

이것은 수긍할만 한가?

그렇다.

이것은 본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인가?

그렇다.

모든 면에서 납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홍기도 대리가 학벌이 이렇게 좋다는 것은 몰랐는데?”

보통 학벌이 좋은 인물들은 크던, 작던 다소 티가 나는 법인데, 홍기도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아마 본인 스스로가 학벌에 대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별일이군.”

“그 친구, 의외로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제임스는 지난번 한국에 와서 홍기도와 처음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의외로군, 이 친구에게서 이정도 평가를 받을 인물이었단 말이지?’

제임스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쉽게 누군가를 호평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럼, 결론이 났군.”

각성한 홍켓몬의 성과!

진급 경쟁의 최종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