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 제임스 :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래전 문상훈과 표세인이 처음 갈등을 빚었을 무렵······.
아니, 그보다 한참 이전부터 제임스는 표세인과 그의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홍기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동생이 선택한 남자.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제임스는 내심 여동생인 조연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형이 어머니를 따라 미국행을 선택했을 때, 너무 어렸던 연아는 한국에 남았다.
그리고 그대로 부모는 이혼했고, 한순간 그들 남매는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별한 끈끈함이 없는 다소 차가운 관계. 거기에 물리적인 거리까지 멀어지니, 어쩌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그러는 사이, 표세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여동생이 선택한 남자.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하려고 해도, 절로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에 오게 되면서, 표세인이라는 남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그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한 홍기도에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홍기도 : 오케이.
홍기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법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홍기도가, 여자도 아닌 남자의 술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그 시점에 제임스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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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시는군요.”
“대학을 싱가포르에서 나왔어요. 어떻게든 부모님 손에서 벗어나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외국으로 달아났죠.”
“명문대 출신치고는 그런 티가 나지 않아서 좋군요.”
싱가포르 국립대라면 아시아 최고를 자부하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기도는 자신의 학벌을 직접 언급하기는커녕, 별것 아닌 짧은 유학이었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제임스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왔다.
사실 아이비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스탠퍼드를 졸업한 제임스에게 알량한 학벌 자랑은 언제나 눈꼴사나운 것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저 엄청 건방진 놈입니다.”
“?”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표세인이 들었다면, 그래도 알고는 있었구나. 라는 대사가 튀어나왔겠지만, 홍기도라는 캐릭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임스로서는 상당히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이전 회사를 지원한 것은 제 학벌에 비해 다소 급이 낮은 직장이니, 적당히 월급도둑이나 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때는 어차피 나중에 아버지 회사 물려받게 될 팔자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회사를 물려받는다.
홍기도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어쩐지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자신도 그런 것이 싫었다.
누군가는 금수저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업을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연아도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녀가 후계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자식이라는 사명감 때문이 아닐까?
애초에 자신 이상으로 게임이라는 산업에 관심이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데요?”
“그런데······. 사수랍시고, 웬 체대 출신의 괴물 같은 사람을 만난 거죠.”
“표세인 팀장?”
“네. 그 사람 보고 깨달았어요. 대학 다 헛거구나. 영어단어, 수학 공식 몇 개 외웠다고 까불면······. 아니, 다른 거로 까불어도 죽을 것 같기도 했고······. 처음에 표팀장님 진짜 무서웠거든요.”
“무서웠다?”
제임스는 잠시 표세인을 떠올렸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하지만 반듯한 이목구비와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 덕분일까?
딱히 무섭다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런 인상은 아니었는데요.”
“아니요. 진짜로 달랐습니다. 제임스는 아마 모를 거예요. 예전 팀장님······. 아니지, 과장 진급을 앞에 둔 시점, 표대리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요.”
“흥미롭군요.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신의 말에 상대가 흥미를 느낀 것에 조금 흥이 돋는 것일까?
홍기도는 브랜디로 살짝 목을 축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일단 눈빛이 다르죠.”
“구체적으로 어땠습니까?”
“제임스도 눈매가 사납다거나 하는 이야기 종종 듣는 편이죠?”
홍기도의 질문에 제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노력하는 편이지만, 지금도 가끔 아내가 미간을 걱정하는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제임스의 인상은 그 시절 팀장님 곁에 두면 솜사탕 같은 느낌이랄까요?”
“잘 상상이 안 가는군요.”
“그 시절 팀장님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과장 진급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송부장이라는 양반이 난데없이 외주개발팀으로 보내버렸으니까요. 나름 기획팀 에이스 소리 듣던 사람을요.”
“확실히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었겠군요.”
“심기가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죠. 프로그램팀에서 시비 걸면 멱살 잡을 기세로 소리치고······. 한번 윤과장님이 시비 걸다가 맞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윤과장님이 브레이크 타이밍을 습득해서 다행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요.”
“사람을 때리기도 합니까?”
제임스는 지난번 표세인이 마커스의 얼굴에 니킥을 꽂아 넣었던 일을 떠올렸다.
폭력성은 회사원으로서도 문제지만, 여동생의 남편이 될 남자라면 더욱 문제다.
“그건 아닌데······. 그때 윤과장님과 프로그램팀 인원들이 표팀장님께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이었죠. 아마 송부장님의 사주였을걸요?”
“대체 송부장이란 사람은 왜 그렇게까지······.”
“그거 아세요?”
“?”
“한걸음 떨어져서 팀장님을 관찰해보면 의외로 얄미운 구석이 많거든요.”
“얄밉다?”
“키 크지, 얼굴 반반하지, 몸 좋지. 거기에 일도 잘하는데, 평판까지 좋아. 그런데 막상 자기에게는 뭔가 고분고분하지가 않은 것 같네?”
“으음······.”
살짝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송부장뿐만이 아니라, 표팀장님을 두둔해주던 상무님 파벌이 통째로 퇴사하게 되면서 더 그랬죠. 그러니까 에이스 소리 듣던 인재를 외주개발팀 같은 곳으로 등 떠밀어도 구원해주는 사람이 없었죠.”
“그러면 외주개발팀에 가서부터 사람이 지금처럼 순해진 것입니까?”
“아니요. 진짜 장난 아니었죠. 더 심해졌어요. 외주팀 일이라는 게, 진짜 타팀에 구걸해가면서 일정 맞춰야 하는 시스템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래서는 답이 안 나오니까, 그냥 미친개 컨셉으로 전환하더라고요.”
“그러면 언제쯤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겁니까?”
제임스의 질문에 홍기도는 다시금 피식 웃고는 술잔을 비웠다.
“환상종을 만나고부터?”
“환상종?”
“아, 팀장님 여자친구분 별명이에요.”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했다.
혹시 홍기도는 표세인의 여자친구, 즉 조연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그 여자친구에 대해 뭐 들은 것은 없습니까?”
“전혀요.”
“전혀?”
“무슨 연예인이 사생활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거 하나만은 아주 꼭꼭 숨겨요. 아니, 기본적으로 사생활 이야기는 잘 안 하는 타입이긴 한데, 그래도 예전에 운동 그만둔 사정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는 친해지면 그래도 좀 흘리긴 하는데······. 여자친구 이야기만은 죽어도 안 해요.”
“······그렇군요.”
절반의 안도감과 절반의 위화감.
안도감은 연아의 일을 비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위화감은······.
조회장과 자신, 그리고 연아까지 이어지는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습성에 더해.
‘게다가 성향적으로는 나와 연아 보다도 훨씬······.’
순간 표세인과 함께 조회장을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보다도 더 조회장의 아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인 내 입장에서는 다소 우스운 일이지만 말이지.’
친자식들보다도 사위 될 사람이 더 아들 같다는 사실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샌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아무튼 저는 그 전까지 표팀장님과 기싸움을 하고 있었거든요.”
“기싸움이라 어떤식이었습니까? 일을 안한다거나?”
“아니요. 그게 웃긴게, 저는 야근이나 철야할 생각 없다고 하니까. 정말 딱 그 시간에 제가 끝낼 수 있는 만큼만 일을 분배해주더라고요.”
“나름의 배려입니까?”
제임스의 말에 홍기도가 실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니라, 저를 신용하지 않는다는 다고 노골적으로 말한 셈이죠. 어차피 제가 처리한 일은 검토후에, 자기 손으로 수정해야하니까······. 뭐랄까, 넌 아직 별 도움이 안되니 상관 없다는 느낌?”
“분했습니까?”
“네. 분했어요. 제가 이래 봬도 어디 가서 눈썰미와 일 못 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 편인데······. 근데 또 표팀장님 일 처리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까. 이전 팀장에게는 충분히 통과될 수준으로 처리했는데도, 일을 끝내면 어느샌가 사내 인트라넷에 거의 탈바꿈 수준으로 변신한 제 기획서가 올려져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더욱 기를 쓰고 일찍 퇴근했습니다. 그 대신······.”
“그 대신?”
“집으로 일감을 가져가서 미친 듯이 일했죠. 제 기획서에 단 한 줄도 수정하지 못하게 해주겠다. 뭐 그런 오기였죠.”
“그래서 결과는?”
“제가······. 일을 좀 잘하게 되었더라고요.”
“재밌군요.”
“재밌다는 표정 맞나요?”
세상에 재미있다는 말을 이렇게나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봤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여자친구 덕분에 세상 밝아진 표팀장님은 서서히 저를 조련하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조련이라······.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그때 깨달았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표팀장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깨닫도록 하질 않죠.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시작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업무 절반쯤을 제가 붙잡고 낑낑대고 있더라고요. 아마, 본인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해야 하니, 그렇게 유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생각에는. 크큭.”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아, 이건 좀 나중에. 나름은 비밀이라서요. 제가 빚을 지게 됐고, 그 후로 표팀장님이 은근히 텐션을 제게 맞춰서 놀아주기 시작하시니까, 안 친해질 수가 없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만으로 진위를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홍기도의 말에서 다른 의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사람은 정말로 표세인을 좋아하고 따른다.
그러고 보면 제프리들도 그랬다. 문이사 조차 어느샌가 표세인이라는 인물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가?
비밀이라는 부분이 다소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캐묻는 것도 제임스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곧 아시게 되시겠지만, 표팀장님 주변의 다른 사람들 모두, 그분의 힘이 되고 싶어 하는 분위기죠. 남궁원이나, 함송희씨는 물론이고, 한팀장이나 양실장님 같은 분들까지도요.”
그것은 굳이 홍기도의 말이 아니더라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 제프리 팀의 일화만 떠올려도 알 수 있지 않나?
처음에는 갑자기 웬 코스프레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낙오자 그룹이라 불리던 이들이 순식간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존에 없던 생산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으신 것은 확실한 것 같군요.”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오래전 조회장이 표세인을 평가했던 그대로 그를 평했다.
“재주가 많은 분이지시만, 그거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그런데 의외군요.”
“어떤 것이요?”
“홍기도 대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시시콜콜 내심을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만.”
제임스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홍기도의 의중을 의심하고 있다는 티가 역력했다.
“표팀장님이 제임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좀 다르더군요.”
“다르다?”
“그 눈빛은 양실장님이나 다른 누구를 보는 것과도 조금 달랐어요. 정말로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고작 그 짧은 출장에서의 인연으로 그런 관계가 구축될 정도라면, 저도 가까워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걸 눈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직감의 영역이 아닐까?
아마도 표세인과 조연아의 관계 덕분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표세인의 심정이 일반 동료직원들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 완전히 친근한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요.”
“정확하십니다. 확실히 눈썰미가 있으시군요.”
“잘난 누나 밑에서 자란 덕분이죠.”
홍기도의 말에 제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잘난 형에 치여 지낸 것이 어린 시절의 작은 트라우마가 현재 인격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만 말씀드리죠.”
“뭐죠?”
“만약 인간관계 같은 것에 문제가 생기면 한번 표팀장님께 의지해 보세요.”
“인간관계라······.”
갑자기 한가지가 떠오른다.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서먹한 관계. 아니, 자신의 가족 전체에 관한 문제.
“표세인 팀장님이 그런 문제를 해결 잘한다는 거군요.”
“귀신이죠.”
홍기도는 단언했다.
‘정말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군.’
로렌스와 타냐.
아내와 딸에게는 아버지와의 서먹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우려해서 신경을 쓸 아내의 모습도 싫고 어린아이 특유의 민감함에 화목하지 못한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가 감지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어머니와 형도 없다. 그러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조씨집안의 구성원들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던 오랜 문제.
하지만 여기에 전에 없던 표세인이라는 요소가 추가 된다면?
어쩌면 이것이 기대 이상의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물론 자신 조차 표세인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재주는 이미 몇 번이고 제임스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제임스는 조용히 술잔을 바라보며, 조회장과 연아가 함께 한 자리에서 딸과 아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 혼자야, 서먹한 분위기 때위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아내와 어린 딸에게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도움을 청해봐야겠군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홍기도와 제임스는 잔을 마주쳤다.
<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