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03화 (103/346)

103.

“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식 1위가 치킨이라 이거지.”

나는 내일 있을 제임스 가족과의 식사를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뭐하세요?”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웬일로 남아있던 홍켓몬이 스리슬쩍 다가왔다.

“아니, 뭐 좀 검색하느라고. 그런데 너 요즘 이 시간에 자주 보인다?”

아차! 말을 하고 나서 실수를 깨달았다. 가급적 홍켓몬 버프 모드는 언급하면 안 되는데······.

“불만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내 엄살에 홍켓몬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표정이 밝아졌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식? 또 미국 출장가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궁금해서. 그보다 UI디자인 끝났지? 잘 뽑힌 것 같아?”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네. 문주 누나도 자신이 넘치시는 것 같아요.”

그래픽팀 팀장으로 승진한 안문주 차장은 깨비몬 디자인 외주 컨펌과 UI디자인 등으로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애초에 아트 디렉터 시절부터 일 잘하기로 소문났었고, 진급 심사 중에 육아휴직을 신청한 덕분에 팀장을 조금 늦게 달기는 했지만, 원래라면 한참 전에 팀장을 달았을 인물이다.

특히 캐쥬얼 게임 디자인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서, 깨비몬의 디자인 컨셉도 무리 없이 컨트롤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만 끝나면 이제 슬슬 알파 테스트 정도는 가능하겠네.”

“그렇겠죠. 그런데 말을 돌리시는 것을 보니, 저에게 뭔가 숨기시고 싶으신 것 같네요.”

아, 역시 이 녀석과 너무 오랫동안 붙어지냈구나.

“보통 이런 경우는 여자친구분 관련일테고······.”

게다가 타고난 눈치까지 보통이 아닌 녀석이라서 단숨에 내 속내를 꿰뚫는다.

“음······. 뒤통수를 세게 때리면 기억을 잃는다던데.”

이제 슬슬 시험해볼 기회인 걸까?

“트라우마라는 것은 의외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법이죠.”

“역시 그럴까? 하지만 또 모르니 테스트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기획자라면 응당 테스트를 시도해보는 것이······.”

“어어, 그러다가 버프 지워져요.”

홍켓몬의 협박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제길, 이 녀석이 열일 버프 받은 상태에서는 공격할 수가 없다.

“그래. 안 건드릴 테니까, 지금처럼 일만 열심히 해다오.”

팀장이 팀원에게 바랄 것이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그런데 팀장님.”

“왜?”

“치킨 말고 닭강정 알아보세요.”

“닭강정?”

“네.”

홍켓몬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닭강정이라······. 확실히 이게 더 나을지도? 일단 치킨 보다는 좀 더 한식에 가까운 느낌이니까.

*

*

*

다음날.

나는 새벽같이 회장님 댁을 방문했다.

“이 시간부터 웬일이냐? 오늘 저녁 식사 아니었어?”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쿵. 쿵.

나는 준비해온 아이스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건 다 뭐냐?”

조회장은 내가 바리바리 싸 온 음식 재료들을 보며 당황했다.

“오늘은 로렌스와 타냐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날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회장님은 오늘 손녀바보 역을 맡으셨고요.”

“······그렇지.”

“손녀를 끔찍이는 할아버지가 손녀를 위해 무언가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설마 돈으로 산, 선물로 퉁치려던 생각은 아니시죠?”

“그, 그렇지.”

뭔가 대답이 점점 약해지는 느낌이다.

“상황상 배역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손녀딸 사랑하시잖아요.”

“사,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을 보아하니, 조회장도 어지간히 애정표현 같은 것을 잘 못하는 타입인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뭘 어쩌자고?”

그래도 손녀 이야기가 나온 상황에서 발을 빼시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겉으로는 까칠해도 속정 깊은 할아버지 유형이다.

“음식 준비해야죠.”

“어? 요리는 이따 제천댁이 와서······.”

“이모님 오늘 출근 안하실 겁니다.”

“뭐?”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것 이상의 환대가 또 있겠습니까?”

“맛없으면 망하는 것 아니냐? 최선보다는 최악을 피할 궁리를 하는 것이······.”

“뭘 시작도 전에 엄살이십니까.”

“뭐 임마?”

엄살이라는 말에 조회장이 울컥했다.

회사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회장과 사원이 아닌, 예비 장인과 예비 사위 모드 아닌가?

“아버님. 여기 회사 아닙니다.”

“윽······.”

조회장은 어째선지, 내가 아버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크게 당황한다.

마치 마왕의 힘을 약화시키는 마법의 주문 같은 효과랄까?

약빨 떨어지기 전까지는 자주 사용해야지.

“공과 사 구분 확실하신 분이시잖아요.”

“으음······.”

평소에도 귀가 닳도록 공과 사의 구분을 주장하신 분이지 않나?

그러면 이런 상황도 예상하셨어야죠.

“예비사위가 이정도 액션 취하는데, 좀 받아 주시죠.”

“······자네 요리 좀 하나?”

어째, 첫만남때가 생각나는 질문이다.

“어디가서 명함 내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자취경력이 몇 년인데! 게다가 이미 엄마 찬스 썼다.

그래도 음식점을 운영하신 경력이 있으신 덕분에 엄마는 꼼꼼하게 레시피를 메신저로 보내주셨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장사하신 덕분에 동생 굶기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경험은 조금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레시피 받아 왔고요.”

내 말에 조회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망하면 출장뷔페 부르면 되지.”

안 망한다니까요.

살짝 자존심 상하네.

“그래서 생각해둔 메뉴가 뭐냐.”

“닭강정과 비빔밥, 거기에 된장찌개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좀 찬이 적지 않아?”

“이런 건 겉보기보다는 정성이죠. 게다가 이 집에 이모님이 해두신 밑반찬 많다면서요.”

“그거야 그렇지.”

“게다가 제임스에게 듣기로 로렌스와 타냐도 그리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집이 좀 입이 짧은 편이지.”

조회장과 연아, 거기에 제임스까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처가 구성원들은 하나 같이 마른 체형이다.

딱 봐도 식탐이 있어 보이지 않는 인상들이다.

“그러니 이거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내 수준에 이 이상의 음식 준비는 무리다.

“그건 그렇다치고 너무 일찍 온 것 아닌가? 연아는 아직 자고 있는데? 깨워야 하나?”

내가 일찍 온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모를 실패 가능성이 두려우니까.

그리고 연아가 자고 있는 사이에 우리끼리 뭔가 좀 해놓으려는 거다.

“연아는 깨우면 안되죠.”

“깨우면 안돼?”

“생각해보세요. 연아가 고분고분 제 각본대로 행동하겠습니까? 그래도 아버님 정도는 되시니까, 이렇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한번 살짝 띄워주고.

“그 깍쟁이가 순순히 따르지는 않겠지.”

좋아. 내심 싫지 않은 표정이다.

마치 ‘그래, 나는 그래도 좀 분위기 맞출 줄 아는 타입이지.’ 하는 표정.

“그래도 책임감은 있는 타입이니, 저와 아버님이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마 연아도 내심 사명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남자친구랍시고 제법 연아 성격은 파악하고 있구만.”

“이해하신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해보죠.”

“흐흠······.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네.”

“나 요리 잘 못한다.”

잘이 아니라 아예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기대도 안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고.

“걱정마십시오.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역할만 해주시면 됩니다.”

간단과 중요에 살작 악센트를 주는 것이 포인트지.

“그래? 그런게 있어?”

눈에 반짝이 이펙트 들어왔다. 이 상태에서는 내 지시에 순순히 따르겠지.

“일단 앞치마와 머리두건 착용하세요.”

“뭐? 그런걸 뭐하러해?”

“앞치마는 기름이 튈 수 있고, 두건은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갈 우려가 있으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끄응······. 그래 알겠다.”

조회장은 표정은 뚱해도 순순히 앞치마와 두건을 착용했다.

“자 재료는 제가 다 준비해왔으니, 일단 제 지시대로 한번 해보세요.”

“그러마.”

“일단 닭 다리 살과 닭 안심 두 가지를 준비했으니, 둘을 반반 씩 섞어 보죠. 아버님은 안심을 토막 쳐 주세요.”

조회장은 어설픈 칼질로 닭 안심을 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 옆에서 양념을 만들 재료들을 그릇에 담아 세팅을 끝냈다.

“다음은 마늘을 까주세요.”

“뭐하게?”

“다져서 양념에 넣어야죠.”

“그냥 다진 마늘 사오면 되는 것 아냐?”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다 가족들의 놀란 얼굴 보려고 노력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님이 만든 음식을 먹고 놀란 표정 짓는 가족들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기왕 하는 것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래, 기왕 앞치마까지 둘렀는데 제대로 해야지.”

조회장은 어설픈 솜씨로 마늘을 까고, 나는 곁에서 마늘을 다졌다.

-쿵, 탕탕탕.

먼저 칼의 옆면으로 마늘을 으깨고, 통통통 다지면 끝.

“제법 칼 좀 쓰네?”

“고깃집 아들입니다. 평생 칼든 부모님을 올려다 보면서 자랐으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정도면 대충 된건가?”

“네. 이제 시작하면 되겠네요.”

나는 커다란 볼을 가져왔다.

“우선 우유를 붓고, 닭고기 투하. 소금과 후추를 넣고 30분간 재운다.”

“간단하군.”

조회장은 내가 읊어주는 순서대로 닭을 재웠고, 나는 그것을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여기까지는 간단하군.”

“이 뒤로도 별거 없습니다.”

재워진 닭고기를 꺼내, 전분가루와 튀김가루를 이용해, 튀김 옷을 입혔다.

“이제 튀기면 되겠네요.”

나는 튀김용 냄비에 기름을 채웠다.

“이거 온도는 어떻게 파악하지?”

“쉬워요. 이렇게 젓가락을 넣어 보는 거죠. 주변에 작은 기포들 생기는 것 보이시죠?”

“그래. 보인다. 그럼 이게 지금 몇 도 쯤 되나?”

“아마, 170, 180도 정도? 이쯤이면 될 거에요. 그럼 이제 닭고기를 넣어보죠.”

“그러지.”

“아, 이건 위험하실 수 있으니 제가······.”

“나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다.”

음, 이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아무래도 노인 취급을 싫어하시는 모양.

“알겠습니다.”

“흥.”

-치지지직.

조회장은 튀김옷 입힌 닭고기를 침착하게 하나씩 기름에 투하했다.

“살짝 노릇해지면 1번 꺼냅니다. 그리고 물기빼고 다시 한번 튀기는 거죠.”

“굳이 2번 하는 이유가 있나?”

“그래야 더 바삭하대요. 레시피에 복종하는 것은 초보 요리사들의 철칙이죠.”

나는 자취생활 동안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아주 가끔 레시피 이상의 맛을 찾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레시피를 충실히 따를 때, 요리 본연의 맛이 보장된다.

“그거야, 그렇겠지.”

조회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채를 이용해 닭튀김을 건져냈다.

그리고 잠시 건조시킨뒤, 재차 튀겨냈다.

“드디어 피날레네요.”

물엿, 다진마늘, 케첩, 설탕,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꿀.

레시피에서 전수받은 재료들을 프라이팬에 올리고 중불로 서서히 달궜다.

그리고 살짝 기포가 생기기 시작할 때.

“지금입니다. 넣고 볶아 주세요.”

“알겠다.”

조회장은 닭튀김을 프라이팬에 넣고 버무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잘게 부순 땅콩을 뿌리면 완성!

“어디, 맛을 볼까?”

-아작, 아작.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진짜배기 닭강정 완성!

입안에 퍼지는 은은한 풍미와 바삭한 튀김의 식감이 일품이다.

역시 레시피대로 성실하게 만들면, 뭐든 먹을 만한 음식이 되는 법!

“어, 어떤 것 같냐? 제대로 된 것 같아?”

조회장은 살짝 염려스러운 눈길이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닭강정 하나를 내밀었다.

“한번 드셔 보시죠.”

“오냐.”

조회장은 조심스럽게 닭강정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맛······이 있군.”

마치 자신이 만든 것이 맛있어서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응? 뭐야, 오빠 언제 왔어? ······두 사람, 그 차림은 또 뭐야?”

마침 잠에서 깬 연아가 주방으로 다가오며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이거 한번 먹어봐. 아버님이 만드셨어.”

“아빠가?”

“흠흠······.”

조회장은 헛기침과 함께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맛있네? 이걸 아빠가 만들었다고?”

“뭘, 두 번씩이나 묻고 그러냐.”

“정말 아빠가 만들었다고?”

“그렇다니까.”

“진짜? 진짜로 이걸 아빠가······.”

연아는 세 번 네 번 반복했다.

일단 조회장님이 평생 주방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이거면 제임스네 가족들도 조금은 감동하겠지?

비빔밥 준비는 닭강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리 준비한 재료들을 침착하게 채를 썬다.

-통통통.

도마를 두드리는 경쾌한 칼질 소리가 한창 이어지고 준비한 재료들이 정갈하게 채 썰어졌다.

이후, 삶을 필요가 있느 재료들만 삶아 놓으면 준비 끝.

“확실히 칼질 좀 하네?”

옆에서 지켜보던 조회장은 넌지시 칭찬을 던졌다.

“오빠, 요리 좀 해.”

연아가 툭 한마디 던졌고, 조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옆에서 지켜보니, 그렇더구나.”

“별거 아닙니다.”

나는 겸연쩍게 대답했다. 진짜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요리 못하는 남자들이 어디에 있나? 나 정도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것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준비 다한거야?”

“응. 찌개는 좀 나중에 끓여도 되겠지?”

“내가 할건 없네.”

“넌 네 임무가 있잖아.”

내 말에 연아가 내 품에 안기며 이마로 내 가슴을 툭툭건드렸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나는 그대로 두 팔로 연아를 감쌌다.

“나 조종하려고 그러는 거지?”

“알면 이럴때는 모른 척 당해줘. 그게 멋있는 거야.”

“나도 알아.”

“그래. 너는 항상 다 알지.”

내가 연아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조회장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

뭐랄까······.

눈꼴시어서 한 마디 해주고는 싶은데, 막상 평소에 공사 구분 운운하던 탓에, 내가 아까 쐐기처럼 박은 ‘아버님, 여기 회사 아닙니다.’ 라는 말이 걸려서 차마 입을 못 떼는 모습이었다.

뭔가 안쓰러워서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시지. 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회사 밖이라 신경도 안 쓰겠지만. 크크크.

< 해일이 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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