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함전무의 갑작스러운 미국 출장 이후, 함전무 군단의 지휘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움직임을 개시했다.
이미 이전부터 알음알음 물밑 움직임은 시작된 상태였다.
함전무의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언제고 이런 날을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창업공신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회사를 이끌어온 함전무의 빈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지휘관들은 마침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서서히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천준호 이사가 있었다.
연차도 상당하고 사내에서 알아주는 중국통으로 함전무 진영의 중국 시장 공략의 일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여러모로 함전무 진영을 넘어 회사 전체에서도 두드러지는 이력의 소유자인 셈.
“도경우 이사의 움직임은 어떻지?”
천준호는 파벌내 최대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도경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렇군. 역시 아직은 어린가?”
함전무 파벌에 속한 이사 중에서는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도경우는 천준호 자신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한다.
자신이 중국통이라면, 그는 일본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의 유명 IP들을 들여와 연거푸 히트를 시킨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것이 문제랄까? 다른 이사들은 어린 도경우 보다 자신을 선호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문제는 반대로 부장급과 그 이하에서는 도경우가 주목받는 분위기라는 것.
“이번 부장모임에 내가 참석한다는 것은 전달된 상황이겠지?”
“예. 전달되었습니다.”
마팀장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들 반응은 어떻지? 자신들 모임에 갑자기 얼굴을 내민다고 하니, 달갑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중 상당수가 천이사님 라인 아닙니까.”
함전무 파벌지만, 마팀장은 굳이 천이사 라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만약 정말로 천준호가 함전무의 자리를 계승한다면, 자신은 곧장 부장 승진에 이사까지 보장되는 금빛 레일 위에 서게 된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믿으며, 함전무 군단의 소속원으로 꿋꿋이 버텨왔다.
드디어 그 오랜 시간에 대한 보상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회사원의 승진이란 어느 정도 직급 이후로는 누구의 뒤에 서느냐, 앞사람이 얼마나 올라가느냐에 결정되는 법.
마팀장은 드디어 자신도 임원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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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떠십니까? 듣기로 천이사님과 좀 안좋은 상황이시라던데요?”
개발 3실의 하부장은 조심스럽게 고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눈치 빠른 몇몇은 고부장과 최대한 말을 섞지 않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는 눈치.
부장급 정도 되면 임원이냐, 퇴직이냐를 놓고 치열한 눈치싸움에 돌입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하부장은 그런 것은 별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럴땐 말 안걸어도 돼.”
고부장의 말에 하부장이 피식 웃었다.
“저희는 함전무님 라인이지, 천이사님 직속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분위기에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말 조심해.”
근래 함전무 군단의 지각변동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특히 천이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함전무 사람이니, 천이사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공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언변이었다.
“회사생활 참 복잡하네요. 그냥 게임이나 열심히 만들면 좋겠는데······.”
애초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 있다. 사내정치라는 단어에 콧방귀를 뀌던 한팀장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하부장 역시 얼떨결에 팀장을 달고부터 함전무의 눈에 띄어 어설프게 줄을 잡기는 했지만, 애초에 소속감이 투철한 타입도 아니었다.
“그래.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지.”
고부장 역시 기존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표세인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뭐 운이 좋다면, 적어도 눈치 보면서 위장약 달고 지낼 일은 없겠지.’
부장쯤 되면 위장약을 구입하기 위해서라도 약국에 얼굴도장 찍는 것이 생활이 되기 마련.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표세인과 양성태 진영이 자리를 잡으면, 적어도 눈치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앞선다.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뭔가?”
하부장은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기어코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입니까? 매사 조심하시던 분이, 천이사님과 각을 세우신 이유가 뭡니까? 예전에 양실장님과 표세인 팀장이 재무팀을 몇차례 방문한 것은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하부장의 질문에 고부장은 난처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부장과 안면을 트고 지낸 기간이 얼마이던가? 그가 묘한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모를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끄응.’
딱히 자신이 표세인과 손을 잡은 것은 비밀이 아니긴 하다. 어차피 언젠가 알려질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표세인과 양성태 파벌의 입지는 완전히 굳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정말로 만에 하나, 하부장이 천이사에게 붙었고, 자신을 염탐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고부장님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대답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망설이시는 것만으로도 답은 나왔다 싶지만요.”
하부장이 눈치가 빠른 타입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짬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도 대충 상황을 예측한 듯.
“제 밑에 있던 한팀장 기억하십니까?”
“아아, 그 친구 알 수 밖에 없지.”
함전무나 이상무 측에서 그래도 팀장이라고 포섭하려고 몇 번 손을 내밀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대쪽 같은 인물이라서 어느쪽에도 포섭되지 않던 인물.
그런데, 요새는 표세인과 단짝처럼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그 친구가 양실장님쪽에 붙었다더군요.”
“그, 그런가?”
“그런데 참 이상해요.”
“뭐가?”
“지난번에 얼핏 봤는데, 양실장님에게는 데면데면한데, 표세인에게는 껌뻑 죽더군요.”
“그, 그래?”
정작 자신 역시 양성태 보다는 표세인에게 붙은 상황이다. 물론 속내는 양성태 밑에서 빌빌대고 싶지 않아서, 조금 허세를 부린 것이지만, 정작 이부분에서 양성태는 아무 문제를 제기 하지 않았다.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는 양립할 수 없는 법인데······.’
이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설령 피를 나눈 형제라도 권력을 앞에 두면 싸움이 벌어지는 법.
보통 이런 우려가 있는 파벌은 성장이 어렵다. 언제고 두 사람이 맞붙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고부장은 그 부분에서 한가지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문이사도 처음에는 각을 세우던 표세인에게 나중에는 껌뻑 넘어갔었지.’
얼마전 출장 비행기 티켓 가지고 벌어진 작은 소란을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도 그런 케이스지만, 표세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자신도 거기에 배팅한 것이 아닌가?
“저도, 사실 분위기 봐서 양실장님 쪽에 설까 고민중입니다.”
“자네가?”
“네. 뭐 양실장님도 만만치 않은 분이시고, 표세인 그 친구도 장래가 유망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애초에 천이사님은? 다른 이사님들은? 소싯적에 장래 유망하다는 소리 듣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인물들이 한 둘인가? 그것만 볼 거라면 이미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살아남은 이사님들에게 거는 것이 맞지.”
“그건 그렇죠.”
“?”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고부장과 하부장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헤헤헤, 접니다.”
“니가 웬일로 이쪽에 앉았어?”
넑살좋은 인상의 큰 코가 인상적인 남자, 얼마 전, 일본지사에서 건너온 송원일 부장. 그는 올해 막 승진한 덕분에 이 자리에서는 막내였다.
일본에서 넘어온 탓에 딱히 특정한 파벌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저쪽은 분위기가 너무 살벌합니다. 이상무님 파벌은 묵묵히 매의 눈으로 상황을 주시 중이고, 함전무님 파벌은 천이사냐, 도이사냐를 두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귀 아플 정도죠. 그런데 이쪽은 재미있어 보이는 대화를 나누고 계시기에 왔습니다. 자, 한잔 받으시죠.”
송부장은 넉살 좋게 웃으며 고부장의 잔을 채웠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이야기는 끝났는데.”
“에이, 너무 그렇게 밀어내지 말아주십시오. 저 안그래도 왕따인데.”
“누가 들으면 우리가 따돌리는 줄 알았군. 함전무님과 이상무님의 제안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인물이 바로, 자네 본인 아닌가?”
고부장의 말에 송부장은 헤헤, 웃고는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런데 두분 이야기 듣고 있었는데요.”
“귀도 밝군.”
고부장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송부장 같은 타입이 불편했다. 헤실거리는 웃음속에 능구렁이 같은 본성을 숨기는 남자.
더러는 양성태를 두고도 이같은 타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고부장이 생각할 때는 전혀 아니었다.
양성태는 기본적으로 송부장 보다 산뜻한 인물이다. 적어도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숨기는 타입은 아니다.
숨기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심정이나 생각뿐.
하지만 송부장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죄다 숨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음흉하다. 그래,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고부장은 송부장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심 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 이야기를 듣다보니, 한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의문?”
“파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실장님 말입니다. 조실장님도 결국 얼마지 않아 라인구축하시지 않겠습니까?”
조연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고부장과 하부장이 동시에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쪽은 어설프게 접근하면 큰일 나.”
이미 조비서라고 거리낌 없이 부르던 시절이 마음에 걸릴 지경인데, 이제 와 손바닥 비비며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더군다나, 공인된 후계자.
시작부터 사표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누가 있나?
게다가 실장 취임 이후, 정신없이 움직이는 탓에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만약 연만 닿는다면, 일등공신이 될 기회가 아닙니까?”
“그래, 뭐 젊을 때는 도전도 나쁘지 않지. 힘내게.”
“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겁나네요.”
전혀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잘도 내뱉는 군. 하고 고부장은 생각했다.
“천이사님 오십니다.”
“어이쿠, 오셨네요.”
누군가의 말에 자리에 있던 부장급 인사들 전원이 기립했다.
“하하, 다들 앉지.”
천이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아, 이제 가시 방석 시작이구만.’
저마다 천이사에게 인사하며 부산을 떠는 모습을 고부장은 입맛을 다시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지나가길, 고부장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부장, 자네는 나 모른척 할 생각인가?”
천이사는 기어코 고부장을 불렀다.
“오셨습니까.”
“왜, 그렇게 멀리 앉아 있어. 이쪽으로 가까이 오게.”
“아닙니다. 오늘은 몸이 편치 않아서 조금만 마시고 들어가려고······.”
“이리 오라니까?”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눈치 빠른 부장 하나가 슬쩍 천이사 옆에서 물러나, 고부장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시작이군.’
이미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이상, 쉽게 발을 뺄 수도 없다.
‘그러고보니, 표세인······. 마법이니, 주문이니 떠들지 않았나?’
고부장은 자리에 없는 표세인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이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잔 받으시죠.”
“자네도 한잔 받지.”
그렇게 한차례 잔을 교환하고, 천이사가 혀로 입술을 슬며시 핥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고부장.”
“예.”
“그래도 불러주는 사람 곁에 있어야 대접 받는 거야.”
“······예.”
“자네 정도면 알지 않나. 한창때라면 모를까, 자네도 이제 젊지 않아.”
그 말대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표세인을 선택했다.
“······.”
“그거 아나? 배신자만큼은 반드시 응징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야.”
아무래도 지난번 다툼과 과장진급 건으로 단단히 화가난 모양이다.
이미 각오는 했었다. 고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놀라지 말고, 담담히 받아들이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잘 생각하게.”
천이사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모두가 고부장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드르륵.
“아이고, 여기 계셨네요.”
난데 없이 표세인이 등장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들이미나?”
천이사는 미간을 팍 구겼다.
아무리 양성태를 믿고 설친다고는 해도, 일개 팀장급 인사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조차 다소 반감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던가?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고학현 부장에게 용건이 있어서요.”
“지금 내가 고부장과 대화를 나누는 것 안보이나?”
천이사는 어이가 없었다.
“아는데, 죄송하게도 급한 일이라서요.”
설마? 고작 이런 거였다고? 용건이 있다는 핑계로 이 자리에서 빼내 줄 생각이었단 말인가?
고부장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이었다.
반면 천이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 있는 상황.
“제임스란 녀석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대체 부모가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정말이지, 자네들 부모 얼굴이 궁금하군.”
천이사가 특유의 패드립을 입에 담은 순간이었다.
“잠깐 용건이 있어서 불렀는데, 별소리를 다 듣는군.”
“헉! 회, 회장님.”
표세인의 뒤에서 조회장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회, 회장님······. 어떻게 여길······.”
붉게 달아올랐던 천이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린 순간.
“천이사.”
“네.”
“자네는 부하직원들에게 부모 운운하는 습관이 있었군?”
듣는 부모 기분 나쁘게.
조회장은 굳이 그말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는 마왕소환이라는 막강한 주문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HP가 몽땅 깎여나갔으므로······.
< 인지상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