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영상 속, 소년은 깨비몬들과 함께 블록을 부수고, 부순 블록을 이용해 건물을 짓는다.
폐허와 잔재뿐이던 공간이 어느샌가 멋진 보금자리로 돌변하는 순간에는 가슴을 울리는 오케스트라 풍의 음악이 울려퍼진다.
이후, 텃밭을 가꾸고 요리를 시작하는 모습, 오랫동안 사용한 장비가 깨비몬으로 진화는 장면이 이어졌다.
종국에는 깨비몬을 이용한 전투까지!
“좋다. 좋아.”
나는 감탄했다.
영상제작 관련 미팅에, 과장 진급에, 이래저래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깨비몬 캐릭터 상품은 이따금 여러 언론에도 다뤄질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뜸을 들일만큼 들였으니, 깨비몬을 세상에 선보일 기회가 왔다.
다가오는 게임쇼에서 깨비몬은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확실한 퀄리티의 트레일러 영상이 필요하다.
그 준비는 문이사에게 맡겨 놓은 상태고, 그는 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문이사에게 통화를 걸었다.
-오랜만이군.
“예. 오랜만입니다.”
영상통화로 마주한 문이사의 표정은 다소 피로해 보였다.
-이번 건은 우리도 좀 신경을 썼어.
지난번과는 다르게, 홍보용으로 사용될 트레일러 영상은 미국지사에서 제작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수순이고, 지난번이 다소 예외적이었던 것.
문이사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모로 신경을 쓴 흔적이 느껴지는 퀄리티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이거 함께 가는 프로젝트잖나.
그건 그렇지.
애초에 문이사가 직접 주도하던 사업에 내가 아이디어 하나를 던진 것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다.
현재 그는 어떤 의미에서 한걸음 물러나 NFT와 블록체인 관련 부분만 맡고 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문이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단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알 것 같습니다. 영상 잘 나왔네요.”
-그렇지. 나 문상훈이야.
이것도 오랜만에 들으니 정겹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천하의 문상훈 이사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이유가 뭡니까?”
-많이 티나나?
문이사는 난감하다는 듯이 뺨을 쓰다듬었다.
문이사는 자신의 위기를 남에게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소리치며 허장성세로 주위를 기만하는 타입.
‘마침 함전무의 미국행과도 관계가 있는 거겠지?’
대체 미국지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비몬 프로젝트에 영향이 미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다.
“혹시 무슨 상황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문이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여기서는 좀 그렇고, 한 30분 뒤에 다시하지. 그리고 그때 양성태와 제임스도 불러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나는 양실장과 제임스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본사에 있는 우리 셋은 회의실에서 각자의 노트북 앞에서 문이사의 연락을 기다렸다.
나는 그 사이 회장님의 충고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함전무님이 문이사를 위협할 만한 카드가 있습니까?”
내 질문에 양실장과 제임스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짐작이 어렵습니다. 함전무님은 미국지사와 별다른 연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그렇습니다.”
양실장의 말에 제임스가 동의했다. 본사의 일을 꿰뚫고 있는 양실장의 말과 미국지사에서 근무했던 제임스가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도 확실하겠지.
“뭐 자세한 일은 문이사님께 들어야겠지만, 만약 함전무님께서 미국에 별다른 연이 없었다고 한다면 접근을 조금 달리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그렇군요. 함전무님이 아니라, 미국지사의 누군가가 접근해왔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역시 양실장 답게 곧바로 내 의중을 파악한다.
“그렇습니다. 우선 그 방향으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문이사의 이야기를 듣기전에,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추론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른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의 어림짐작이 때로는 기타 편견 없이 핵심에 접근하기 쉬울 수도 있으니까.
“우선 생각해 볼만한 것은 마커스인데······. 솔직히 저도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더군요.”
고작 얼굴 몇 번 마주한 것에, 그나마 대화조차 통역을 끼고 짧은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마커스라는 인물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 정도가 전부인 상황.
“마커스가 함전무님을 이용한다는 측면은 충분히 고려해볼 법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의문은 남습니다.”
“어떤 의문입니까?”
“지금 상황에서 마커스가 함전무님에게 원하는 것이 뭘까요?”
“저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현재 발표만으로도 주가가 훌쩍 뛰는 NFT와 블록체인이라는 히든카드를 손에 쥔 문이사입니다. 그리고 그와 마커스의 센터장 경쟁은 주주들의 의결권에 달린 일이고, 현재 함전무님이 그것에 영향을 미칠 요소는 작습니다.”
확실히 그 말대로다. 미국지사의 주주들은 대부분이 미국인일 터, 미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함전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금 답답한 출구 없는 고민이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마커스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 보는 수 밖에.
상대가 NFT와 블록체인이라는 강력한 패를 쥐고 있는 상황.
내 손에 쥔 패로는 이 상황을 타개 할 수가 없다.
불리한 판도를 뒤집을 방법이 없다는 가정하에······. 과연 어떤 수를 낼 수 있을까?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염두에 두지 말자. 나는 마커스의 패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뾰족한 수가 없다면······.
“판을 뒤엎는다?”
내 말에 양실장과 제임스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판을 뒤엎는다······. 주주총회를 움직인다?”
“결국 주주들의 동향은 주가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카드를 쥔 쪽에 붙기 마련입니다.”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노림수라······.”
“잠깐 검색 좀 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나는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했다.
[NFT의 종말?]
[코인 하락에 발목 잡힌 NFT의 미래.]
[작년에 비해 눈에 띄게 주목도가 하락하고 있는 NFT의 현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우려하던 메시지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른 신규 상품의 가치가 등락을 반복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네 이상합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검색을 끝마친 양실장과 제임스 또한 내가 느낀 위화감을 눈치챈 모양.
“정작 NFT로 수혜를 본 회사들은 주가 변동폭이 크지 않습니다.”
“개발사들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군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불온한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라는 것은?”
“표세인 팀장님의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거 판을 뒤엎으려는 수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내 추측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다들 모인 것 같군.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양실장과 제임스가 문이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표세인 팀장과 일하는 것은 어떤가?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군.
뭔가 약간 어색한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문이사의 오른팔이었던 제임스를 내가 가로챈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이제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혹시나 새나가면 귀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문이사는 무척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덕분에 나 역시 조금 긴장하게 된다.
-사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냐, 조만간 NFT 관련 발표를 준비 중인 찰나에, 비관적인 뉴스가 쏟아지고 있어. 게다가 주주목록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지. 난 이것들이 묘하게 연관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 예측이 맞는 것 같군요.”
양실장과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주목록에 변화라면 정확히 어떤 상황입니까?”
-3% 정도의 주식에 변화가 생겼더군.
“3%······. 미묘한 수치군요.”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무시하기에는 께름칙한 수치.
게다가 우리는 아직 상대의 노림수도 알지 못한다.
-더 미묘한 것은 마커스와 함전무는 정작 이일에 어떠한 연관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지.
“제 3자의 등장이 우려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솔직히 이 정도 변화라면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NFT 관련 소식을 본격적으로 공표하면 주가는 치솟을 테니까. 그전에 냄새를 맡은 누군가가 나타났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시기에? 공교롭게?
그의 말대로 요즘 같은 상황에서 NFT는 마법의 주문이나 다름 없었다.
발표 즉시 주가의 수십퍼센트가 순식간에 뛰어오르는 마법의 주문.
하지만 문제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주가 변화······.
“문제의 요점은 뭔가 찜찜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정작 마커스와 함전무의 노림수를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군요.”
-그렇지. 아무 이유 없이 함전무가 미국에 왔을 턱이 없어. 게다가 마커스의 초청이라고? 이건 100%지.
나를 포함해 모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질문, 이제 곧 NFT 발표가 코앞인데, 어쩌면 좋을까? 솔직히 미룰 수는 없다는 생각에 뚝심 있게 버티려다가 조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것 같군.
문이사는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노림 수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내 예상대로 상대는 판을 뒤집으려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3%의 지분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문이사님.”
-말하게.
“문이사님 스타일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 스타일?
문이사뿐만 아니라 양실장과 제임스도 무슨 말이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가 판을 엎으려고 들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렇지만 나는 방법이 없고.
“하나 있죠.”
-하나 있다?
“먼저 엎어버리는 겁니다.”
-!
“발표 미루실 수 있으십니까?”
-잠깐, 하지만 지금 때를 놓지면······.
“별다른 시장의 변화도 없는데 안 좋은 뉴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잠시 비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때를 놓쳐서 NFT에 대한 관심도가 식으면······.
“처음부터 미래를 보고 손 뻗은 사업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주총회를 놓치면······.
“미국 센터장을 노리는 것은 조금 어려워 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문이사님의 최종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최종 목표가 아니다?
“어차피 문이사님의 목표는 맥베스 본사의 대표로 취임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걸 위한 계단 한걸음 정도, 잠시 피해 가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준비하는 NFT에는 다른 개발사들과는 명확하게 다른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라도 문이사님의 실적이 빛바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메리트라면 깨비몬 말인가?
“예. 아시는지 모르지만, 이미 한국과 중국에서 깨비몬 상품들이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반향은 이미 상당합니다.”
연아의 지휘하에 깨비몬은 이미 뉴스에까지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정도.
“NFT의 가치를 보증하는 탄탄한 캐릭터 상품. 우리에게 이 카드가 있는 한, 문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작 반짝 발표로 거품처럼 올랐다가 내려앉는 주가 변동 따위가 본 목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문이사는 내 제안에 솔깃한 모양, 하지만 아직 내 말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루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부자연스러워 보이게 연출해라? 노이즈 마케팅인가?
역시 일전에 나의 노이즈 마케팅을 직접 견식한 덕분인지, 바로 내 사고를 쫓아 온다.
“제가 바로 중국과 국내의 깨비몬 열풍에 대한 자료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그렇군! 아예 NFT 발표에 깨비몬을 얹어버린다는 거로군!
“저는 이걸로 주주총회 자체를 미룰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핑계는 제가 보내드린 자료를 통해서 본사 일정에 맞추기 위함이라고 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하지만, 자네는 정말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이렇게 간단히 해결하다니.
원래 뭐든 한걸음 떨어져서 훈수를 둘 때, 판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게다가 문이사의 성향상, 시간을 끈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을테니, 시야는 더욱 좁아진 상황이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 생각에 2주. 딱 2주 정도 시간을 벌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그래. 우리 쪽에서 뭔가 다른 행보를 보이면, 그들도 무작정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
“바로 그렇습니다. 대신 일정 연기에 대해서 확실한 쇼맨십 보여주셔야 합니다. 아주 큰일이 난것처럼 당황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내 말에 문이사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나에게 맡겨.
아직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적은 없지만, 지난번 사이프 앞에서 펼친 연기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나는 문이사가 출중한 배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 조만간에 미국에서 보게 되겠군.
“네. 그렇겠네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미국에 얼굴을 비추고 함께 손발을 맞춰야겠지.
-그럼 나중에 보지.
문이사는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잘 될까요?”
제임스가 우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죠.”
“그럼?”
“성동격서라고 아시죠?”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제프리?”
“예스, 마이 마스터.”
평소에는 살짝 난감한 기분이 드는 대답이지만, 오늘은 묘하게 든든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며 제프리 팀원들과 틈틈이 통화도 많이 했었다. 나도 이제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하다.
“우리, 작전 하나 함께 하시죠.”
“헉!”
왜 이렇게 놀라지?
“혹시 요즘 바빠서 여유가 없습니까?”
“자, 작전명은······.”
“?”
작전명? 갑자기 이게 뭔 소리야?
“오더66이라고 정해도 되겠습니까?”
“작전명은 나이트 폴이지!”
“군단이지! 군단!”
갑작스럽게 스마트폰 너머로 다른 팀원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미국지사······. 정말 괜찮은 거니?
< 저 출장 갈 일 없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