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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08화 (108/346)

108.

함성준은 미국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밝은 표정이었던 적이 없었다.

‘대체 내가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함성준은 자신이 미국까지 오게 된 원흉. 조양길 회장의 장남 조연준이라는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오만하고 남을 깔보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남자.

함성준은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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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권을 드리는 거라고 말씀드리면, 좀 편하시겠습니까?”

눈빛 하나, 제스쳐 하나에도 빠짐없이 상대를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회장이나 조연아와는 너무도 다른 기질. 그들은 오히려 지닌바 입지에 비해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연준은 그들과는 본질부터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입지와 상대의 처지를 이용하며 압박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조롱까지 더한다.

“내가 이 일을 회장님께 전달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어째서 내가 자네 쪽에 설 거란 것이 전제된 거지?”

“아니요. 전무님께서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사실을 전달하실 것도 계산에 있습니다.”

쪼르르라니······.

당장이라도 욕 한마디 내뱉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상대가 꺼낸 카드의 무게감이 함성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그 경우는 편지지를 아끼는 셈이겠지요.”

“편지지?”

“도전장? 선전포고? 뭐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족인데 최소한 예고는 해야지요.”

이제는 아예 자신을 편지지 취급하고 있다. 이쯤되니 오히려 화가나긴 커녕,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관없다 이거로군.”

“그래도 기왕이면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왕 여기까지 발걸음했는 걸요.”

“음······.”

“뭐 이 근처 스테이크가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니, 거절하시면 그거라도 맛보는 것으로 위안삼을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미국까지 날아온 상대방이 아니라, 미국에 거주 중인 자신의 시간 낭비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고민하실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설마 즉답을 기대하셨습니까?”

함성준의 말에 조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고민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중국 판호가 막힌 시점에 함전무님의 입지는 나날이 약해지실 텐데요. 게다가 나이도 문제지 않습니까?”

“······초면에 말이 지나치군. 이래 봬도 자네 아버지와 나는······.”

자신과 조회장이 어떤 인연이던가? 공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형, 동생 하는 사이다.

그런데 그런 삼촌뻘인 자신에게 이런 태도라니?

“이런 자리에서 쓸데없는 개인사는 접어두죠. 피차 좋은 관계도 아닌데.”

“좋은 관계가 아니다? 아니, 자네는 몰라도 나는 회장님과 나쁜 관계가······.”

“그래서 아직도 전무십니까?”

“!”

“대학 시절부터 함께 고군분투한 창업공신을 제쳐두고 외부에서 대표를 영입해오는 분입니다.”

“그, 그거야 전문분야가······.”

“부회장자리는 단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던 자리 아닙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폐부를 찌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참이었다.

덕분에 조회장과도 은연중에 멀어지게 되었고, 파벌 구축에 더욱 열을 올린 것도 그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남의 입에서,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상대에게 듣고 있으려니, 위가 쓰릴 지경.

“의리니, 정이니. 그런 어쭙잖은 감정놀음은 접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에 대해 아실 만큼 아시는 분 아닙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선 그으신 겁니다. 그분 안에 전무님의 가치는 딱 거기까지라고요.”

그래,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용도는 전무까지, 그나마도 중국판호가 막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역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었겠지만······.

“그래서 끝난 마당이니 회장님 등에 칼을 박고 제 그릇을 챙겨라?”

“정확하십니다. 사실 뭐 이 정도에 칼 운운하는 것은 좀 과하다는 느낌이지만요.”

진짜 칼은 이정도가 아니다. 이런 느낌이 물씬 전해지는 말투였다.

‘확실히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지.’

굳이 자신의 속내를 숨길 마음도 없어 보였다.

명백히 조연준은 제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을 의지가 충만해 보였다.

의문인 것은 대체 왜?

어쨌거나 장남이 아니던가? 친부와 이렇게까지 각을 세울 이유가 어디 있나?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함전무는 도저히 이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긴요.”

조연준은 별소릴 다 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러는 김에 좀 즐기고요.”

즐긴다.

언뜻 듣기에는 조회장 특유의 장난기어린 말투가 떠오른다.

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은, 영문모를 악의가 느껴진다는 것.

“어차피 나중에는 자네 남매들이 물려받을······.”

“가장 큰 파이는 연아의 몫일 테니까요. 그걸로는 부족하죠.”

“음······.”

조연준은 낮게 신음을 흘리는 함성준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제 걱정하실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가 무슨 나쁜 꿍꿍이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투자사가 투자 좀 하겠다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단순한 투자이익을 노리고 자신까지 불러들였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이건 아주 큰 파장을 일으키겠다는 의미다. 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몹시 불안했다.

“아버지의 회사가 아닌가?”

“그래서요?”

조연준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부회장 자리, 정말 관심 없으십니까?”

함성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미국에 가신다고요?”

“응. 그냥 며칠 정도.”

“어, 그러면?”

“그래. 바로 그거지.”

“아, 바빠지겠네요.”

“그렇지.”

“하아, 또 두 분이서만 시시덕 거리는 거에요?”

나와 홍켓몬의 대화에 남궁원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다른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일 이야기 하는 건데?”

“맞아. 업무적인 대화야.”

“업무적인 대화를 왜 둘이서만 알아들을 수 있게, 하냐고요. 함께 해야죠.”

“미안하다. 기능사 자격 떨어진 너에게는 조금 어려웠겠네.”

“갑자기 뭔 기능사 타령이냐.”

남궁원의 말에 이번에는 홍켓몬이 아닌, 함송희가 대신 답했다.

“지난번 팀장님 기능사······. 그거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송희야.”

“네.”

“쟤 말 받아 주지마.”

“······네.”

함송희는 찔끔 물러났다.

“어쨌든 남궁과장 말대로 저희도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맞아! 이제야 정상적인 팀원들이 들어와서 다행이에요.”

“······과장님 저도 정상적인······.”

“너도 요즘 아슬아슬해.”

함송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미안. 이 녀석하고 둘이서 지낸 지가 오래돼서 이상한 버릇이 들어버렸네. 일단 말한대로 내가 미국에 잠시 다녀올 일이 생겨서, 업무 분담을 해야 한다는 거지.”

“팀장님 없이 게임쇼 준비하려면 타이밍 빠듯하겠네요.”

홍켓몬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맞아. 다행이지.”

“또 저런다. 권차장님 보셨죠? 저와 함송희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해되시죠?”

“맞아요. 맨날 둘이서만 눈빛 교환하고.”

“······그러네요. 대체 이게 무슨······.”

권차장은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민대리와 공대리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미안, 아무튼 권차장님.”

“네.”

“게임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 그건······.”

게임쇼의 종류와 프로젝트 규모에 따라서 중요도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깨비몬 정도의 프로젝트라면 두말할 것 없는 큰 프로젝트다.

보통은 팀장급이 아니라, 이사나, 실장급이 주도하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

“정말 제가 진행해도 되는 건가요? 이거 경우에 따라서는 큰 실적이 될텐데요?”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잘로 이런 말을 하는 구나.

게다가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이런 자잘한 실적 따위를 신경쓸 레벨은 한참 지났다.

조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의 안위를 걱정하는 중에 자잘한 실적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남궁과장.”

“네.”

“네가 권차장님 보조를 맡아. 잘할 수 있지?”

“그럼요.”

남궁원은 즉답했다.

“권차장님.”

“네?”

“믿어도 돼죠?”

권태인과 남궁원에게 맡긴 일이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게다가 게임쇼라는 것은 꼼꼼하게 준비만 잘 한다면 별일 없을 일이다.

“하암, 정말 다행이네요.”

홍켓몬은 기지개에 이어, 하품을 했다. 이 녀석 요즘 서서히 빌드가 갖춰지면서 어깨가 한 결 가벼워진 모양이다.

“그리고 기도야.”

“아, 귀찮은데······.”

“그래. 고맙다.”

“또 뭐에요?”

남궁원이 또 한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홍켓몬이 나 대신 대답했다.

“나도 미국가야한대.”

“뭐?”

남궁원이 화들짝 놀랐다.

“내가 아직 영어가 부족한데다가, 이번에는 투트렉 좀 해야 할 것 같거든. 작전 수행능력이 좀 필요해.”

“작전······. 큭.”

남궁원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원도 유학 경험이 있는 만큼 영어야 잘 하겠지만······.

미안하게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지난번에는 문이사의 일을 거들어 주는 정도였기에 통역을 이용해서 버틸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를 도와줄 확실한 폴스 나인(가짜 공격수)이 필요하다.

이건 애석하게도 홍켓몬 외에는 불가능하다. 남궁원과도 그간 많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척하면 척인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도 여유 있을 때 공부 좀 하지 그랬어?”

“무슨 공부?”

“지난번에 말했잖아. 표세인 기능사······. 어? 내 몸에 손대면 난 진짜 인사과 달려간다.”

“와······. 진짜 회사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언니, 저도 아직 기능사는······.”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불길해. 점점 저쪽에 물들고 있어.”

“어? 정말요?”

활짝 밝은 표정을 짓는 함송희를 보며, 남궁원은 침묵에 걸렸다.

다행이다. 파이터는 침묵에 걸려도 업무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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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대로, 미국지사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혹시 주식 관련인가요?”

“네. 벌써 3%나 변동이 발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3%의 변동은 별것 아닐 수 있겠지만 연아에게는 아니었다.

이미 외부계열사들에 대한 본사의 지분확보율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연아였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긴 할 모양입니다. 문이사가 갑작스럽게 NFT 관련 발표를 뒤로 미루려고 한다더군요.”

“문이사님에게는 여유가 별로 없을 텐데요?”

수비 측과 공격 측은 다소 마음이 다른 법이다. 더군다나, 현직 센터장 자리를 손에 쥔 것은 마커스인 만큼, 문이사는 한발 먼저 나서야했다.

게다가 문이사 본인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한발 물러서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느낌.

“게다가······.”

“더 있다고요?”

미국에서의 일이라면 이것 외에 뭐가 더있을 수 있지? 하고 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세인 팀장도 조만간 미국 출장을 다녀올 모양이더군요. 덕분에 게임쇼 책임을 맡게 됐다며 권태인 차장이 한껏 신난 상황입니다.”

“미국······. 넷플릭스.”

순간 연아는 지난번 표세인이 미국출장 중에 겪었던 사건 하나를 기억해 냈다.

“분명 이름이 아나라고 했었지?”

“아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김비서의 질문에 연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김비서님.”

“네.”

“저 미국 출장 갈 일 없나요?”

김비서의 표정을 해석해보자면······.

‘그걸 왜 나한테 물으세요?’

라고 적혀있는 것 같았다.

< 형제 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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