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표팀장이 미국에 갔다고?”
조회장의 질문에 양성태는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문이사는 거기에 맞춰서 발표를 늦췄고?”
“네. 주주총회까지 시일이 빠듯해서 쉽지 않은 상황인데, 표세인 팀장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습니다.”
“6%라······.”
미국지사의 주식 변동은 3%에서 6%로 변동 폭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커스와 함전무의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양성태의 말에 조회장은 이마를 짚으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보나마나, 조연준······. 그 녀석 짓이겠군.”
“······그렇습니다.”
양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는 조회장이었지만, 유독 조연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사전에 양성태에게 귀띰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조연준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면, 즉시 내게 보고하게.’
‘조연준? 혹시······.’
‘그래. 내 아들놈이다.’
과거에는 그 뜻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양성태는 조연준의 행적을 조사해왔다.
한국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인물을 염탐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제법 유명한 인물이었다.
‘월가에서도 제법 각광받는 투자의 귀재.’
행간에 떠도는 그의 소문은 대체적으로 다소 공격적인 것이었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 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가 지나간 자리 뒤로는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의 비명이 이어진다는 것.
그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단순히 IT나 게임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 그를 신경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미국지사에 슬그머니 손을 뻗더니, 이제는 함전무까지 미국으로 불러냈다.
“솔직히 저는 조연준의 노림수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단순한 투자이익을 노리는 것이라면 얌전히 NFT 발표 후 이익을 챙기면 될 것인데, 그 전에 함전무를 호출해서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군요.”
양성태의 말에 조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을 그런 일반적인 잣대로 계산하면 계속 끌려다니게 될 걸세.”
“네?”
“세상에는 말이지. 남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야.”
조회장의 말에 양성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사람이라면 양성태 본인도 한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표세인 팀장이 그렇지요.’
처음 그를 주목하던 시점에 느꼈던 의아함. 매사에 무언가 노림수를 만들어 행동하는 남자.
왜 이렇게까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라는 의문은 그 이후에 벌어지는 놀라운 결과들과 결부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았던가?
“지금 표세인 팀장을 생각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뭐, 그 녀석도 독특한 캐릭터지. 하지만 조연준 이 녀석은 훨씬 더 질이 나쁘지.”
“질이 나쁘다는 것은?”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내 취미인 TRPG라는 게임을 하다보면 말이지, 이따금 질 나쁜 마스터를 만나게 될 때가 있어.”
양성태는 가만히 조회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타인들을 고뇌하게 만들고, 걱정스럽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느끼는 타입이 있지. 자신의 이득보다 남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면 그냥 그것을 선택하는 타입이야.”
“그, 그것은······.”
자신의 친아들에 대한 평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평소에도 조회장이 자신의 자녀들을 냉정한 잣대로 평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가혹한 평가는 내린 적이 없었다.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하는 단어들이 있지만, 이건 사실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야. 정신병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성향의 일부지. 이따금 그것이 다른 성향들을 집어 삼킬 정도로 큰 경우 우리는 흔히 정신병자라고 부르기 마련이야.”
“······.”
“조연준, 그 녀석이 정신병자라고 불릴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명백히 정상인이라고 불리기에도 애매한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기업사냥꾼이라 불리는 월가의 투자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자질이지.”
남들이 싫어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할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고 들이닥쳐, 목을 물어 뜯는 늑대 같은 본성.
게다가 상대의 고통이 자신의 이득이 될 것을 알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연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주변의 호의를 사는 것으로, 제 이득을 지키려는 표세인과는 그야말로 동전의 앞뒷면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성향.
우습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포지션 조차 정 반대다.
한쪽은 게임을 개발해 회사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이득을 취하고, 다른 쪽은 그런 회사들을 집어삼키고 때로는 부숴버리는 과정에서 이득을 챙긴다.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타고난 본성을 따르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성격이라는 것.
“우려가 되는군요. 그렇다면 표세인 팀장을 미국에 보내지 않는 편이 좋을까요?”
현재 표세인이 맡은 역할의 중요도를 고려할 때, 조연준 같은 심상치 않은 상대와의 만남은 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의외로 쉽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육체든 정신이든.
‘지금 이 시점에서 표세인 팀장이 무너지는 것은 안 된다.’
사람은 순풍 항해 중에 암초를 만나게 되면 더 큰 괴로움에 휩싸이기 마련이지 않나?
게다가 같은 파벌 운운하기 이전에, 그가 담당하는 깨비몬 사업은 맥베스의 사할이 걸린 중요 프로젝트가 아닌가?
“그건 모르겠군.”
모르겠다?
천하의 조회장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조연준, 그 녀석이 이빨을 드러낸 이상, 언제고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겠지. 어쩌면 일찍, 마주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가 있어.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실장은 지금 어쩌고 있나? 미국지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을 파악은 하고 있나?”
“김비서를 통해 미국지사의 동향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조실장은 이전부터 외부계열사의 지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요.”
김인숙은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양성태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모든 업무 처리 방식을 지도한 것은 다름 아닌 양성태 본인이었으므로······.
“어쩌면 둘이서 함께 미국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두 사람이요?”
조회장의 말에 양성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같은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개발과 사업으로 나뉜 탓에 바로 얼마 전에도 영상제작 관련으로 기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표세인 팀장이야 누구와도 잘 지낼만한 사람이지만, 조연아 실장은······.’
내막을 알지 못하는 양성태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가 아는 한, 조연아는 자신의 경쟁상대의 등장을 달가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연아가 표세인에게 말했던 조회장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한다.
양성태가 생각하는 조씨일가 구성원들은 선의의 경쟁따위를 기뻐하는 성향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솔직히 그 두사람의 화학반응이 과연 어떤 효과를 이루어낼지······.”
“······뭐, 남자가 여자 앞에서 보일 화학반응이야 뻔하지,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젖먹던 힘이라도 끌어내지 않나?”
“네?”
조회장의 혼잣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양성태가 되물었지만, 조회장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양실장.”
“네.”
“이번일은 표세인 팀장에게 전하지 말게.”
“하지만 그러면······.”
“조연준 그녀석이 골치아픈 것은 게임을 쓸데없이 길게 끈다는 점이야.”
“그러면 더더욱······.”
“그러니까, 첫 만남 정도는 선입견 없이 만나게 해주고 싶군. 이건 괜한 심술이 아니야. 자네도 표세인 팀장을 믿는다면, 이번에는 입 다물고 지켜보게. 애초에 온실속 화초 같은 타입도 아니지 않나.”
“음······.”
양성태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심각한 고심에 잠겼다. 그리고 조회장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쭈 고민해?”
“음······.”
양성태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
*
*
공항.
“살다 보니, 팀장님과 미국을 다 가보네요.”
“그러게 말이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붙어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솔직히 눈에 거슬려서, 출근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른 집에나 가라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는 것이 이런것이겠지.
“미국에 가서도 별건 없죠?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되죠?”
그렇지. 평소대로 임기응변과 어시스트. 그것이 내가 홍기도에게 바라는 전부다.
“맞아. 통역에 더해서 그때그때 상황 봐서 내가 눈치 주면 장단만 맞춰주면 돼.”
“라져.”
홍기도는 경례하는 시늉과 함께 대답했다. 그렇게 나와 홍기도는 출국게이트를 향해 가는 도중이었다.
“어? 팀장님 저기.”
“?”
갑자기 홍켓몬이 내 팔을 잡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연아? 왜 연아가 저기 있지?
마침 그때, 연아의 곁에 있던 김비서가 우리를 발견하고 등을 돌리고 있던 연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표세인 팀장님. 반갑네요.”
반갑다. 맞아. 정말 반갑다.
‘반갑긴 한데······. 왜 어제 말 안해줬어?’
‘서프라이즈?’
정말 서프라이즈 그 자체다.
“조실장님도 미국지사에 방문하시는 겁니까?”
“예. 마침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연아가 이 시점에 미국에 방문하는 이유. 아마도 나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모르는 정보를 추가로 쥐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됐네요. 비행기 안에서 사업관련 미팅 좀 해보기로 할까요?”
“그러시죠.”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한 이후 자리를 바꾸었다. 나와 연아가 옆자리, 그리고 김비서와 홍기도가 옆자리에 각각 떨어지게 되었다.
“진짜 무슨 일이야?”
다행히 김비서와 홍기도는 우리 이야기를 엿듣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서.”
“조금?”
“아직까지는 조금, 그리고 오빠랑 한번 외국 여행도 가보고 싶었거든.”
“그러게, 솔직히 신혼여행 때나 외국여행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쁘지?”
“응. 기쁘네.”
“상황봐서 시간내서 데이트도 하자.”
“오, 항상 바쁘신 여친님께서 이번에는 웬일로?”
“모처럼이니까.”
“나야 좋지.”
아닌게, 아니라 요즘 서로 너무 바빳던 탓에 얼굴도 못보고 지내고 있었는데, 정말로 기쁘다.
“그리고 오빠가 알아야할 것이 있어.”
“뭔데?”
“아마도 지금 미국지사에서 벌어지는 일의 배후에······. 큰오빠가 있는 것 같아.”
“큰형님?”
제임스 때도 그랬지만, 나는 큰형님에대해서도 모른다.
“조연준. 월스트리트에서 나름 각광받는 전문투자자야. 예전에는 유명 증권사를 전전했고, 현재는 몇몇 큰 손들의 후원을 받아 개인투자사를 운용 중이야.”
“뭔가 굉장한 이력이네. 그래서? 고작 이력을 알려주려고 여기 온 것은 아닐 것 아냐.”
“맞아. 지금 미국지부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시작에 불과할거야. 아마도 큰오빠 성격에 반드시 본사까지 치고 들어오겠지. 아마도 함전무님을 부른 것도 그런 이유일걸? 대표나, 부회장 자리를 미끼로 흔들고 있지 않을까?”
“부회장?”
대표라면 몰라도 부회장이라니! 그것이 가능하려면······.
“아빠가 쥐고 있는 지분에 범접할 만한 수준의 지분을 노리고 들이닥치겠지. 아마도 그것 때문에 NFT관련 악성 여론을 조성 중일 테고.”
여론조작과 주가 흔들기로 주식 가치를 다운시킨 후에 매입, 이후 주가가 오르면 되파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투자사의 기본 공격방식 중에 하나.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버지 회사를 그렇게 공격하려는 이유가 뭐지?”
“아마 본인은 별 생각 없을걸?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걸 수도 있어.”
“재미?”
“솔직히 말할게. 가족이라고 소개하기 부끄러운 타입이야. 남매라는 족쇄로 묶여 있지만, 정말 볼 때마다 짜증 나는 사람이야. 아빠와 엄마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큰 오빠와 연락하고 지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걸?”
연아가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까지 날선 비난을 하는 것은 처음봤다.
“오빠도 조심하길 바라, 솔직히 함전무님은 별문제가 아니야. 핵심은 조연준이야.”
이제 더이상 큰오빠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억지로 큰오빠라는 표현했다는 것이 전해진다.
“그래서 오빠가 세운 대책은 뭐야?”
“별건 없는데?”
“없다고?”
연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이다.
지금 바로 조연준이라는 이름을 들었는데, 무슨 대책이 있겠나? 하지만 고려 중인 전술은 없어도 전략은 수립되어 있다.
“우리 뭐 먹을까?”
“뭐?”
“골치 아픈 걱정은 일단 적을 만난 후에나 생각하자, 지금은 그냥 여행을 즐기자.”
“아직 비행기 안인데?”
“비행기도 여행의 일부지.”
나는 승무원을 호출했다.
“와인 한잔하실까요?”
“한 잔만.”
퍼스트클래스, 와인, 여자친구.
이거면 나쁘지 않은 여행의 시작 아닌가? 일단 골치 아픈 일은 접어두자.
조연준이라고 했나?
어떤 인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처가도 가족이라고 한다면, 그와 나는 새로운 형제가 되는 셈이다.
“나는 아직 네 큰오빠에 대해서 모르지만······.”
“?”
“그도 나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지.”
“그렇네, 피차일반이긴 하네.”
나는 잔을 들어 연아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기분 좋은 소리가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울려 퍼졌다.
‘형제 싸움도 나쁘진 않지.’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그에게 새로 생길 새로운 형제는 상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는 것을······.
‘한번 놀아봅시다. 재미있겠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여행이 될 것 같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