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과장진급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김인숙의 축하에 홍기도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윗분들은 업무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 같은데, 우리도 잠시 일 이야기 좀 해볼까요?”
김인숙은 은근슬쩍 운을 떼며, 홍기도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은 양쪽 모두 미국으로 향하는 목적은 같다고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함께 손발을 맞추고 있는 깨비몬 프로젝트의 순항을 위해 혹시모를 위험을 방지하려는 것.
그것이 이번에 표세인측과 조연아측이 미국행을 택한 이유일 것이었다.
하지만 표세인측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묘수를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김인숙은 탐색전을 시작했다.
“김비서님.”
“네?”
“혹시 포커 좋아하세요?”
“음······. 솔직히 경험이 없어서······.”
“저는 예전에 자주 즐겼거든요.”
싱가포르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덕분일까? 홍기도는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카드게임에 대한 경계심 따위는 없어보였다.
“사실 카드 게임은 패를 살피는 것보다 상대를 살피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가요?”
눈치 없는 사람은 비서직에 적합하지 않다. 김인숙은 곧바로 맥락을 파악했다.
“만약 수 싸움을 하시겠다면 사양하지는 않겠는데, 김비서님은 본인 패를 공개할 마음이 있으신가요?”
수 싸움이 아닌 낚시를 생각하던 김인숙은 살짝 당황했다.
‘만만치 않네, 이 사람.’
대리급과 과장급은 엄연히 무게감이 다른 법. 비록 아직 높은 직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낮춰보기는 어려운 직급이다.
더욱이 홍기도의 캐릭터는 다소 가볍고 경망 되다는 평이었다.
이런 타입이라면 적당히 대화를 이끌다 보면 미주알고주알 정보를 흘려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홍기도는 평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그쪽 패는 별로 궁금하지 않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제 패가 확실할 때, 남의 패에 신경 쓰는 것은 심력 낭비죠.”
“저희 쪽보다 좋은 카드를 쥐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네요?”
“확신이라기 보다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제 패를 신경쓰시는 것만 봐도 그런 상황 아닌가요?”
“누, 누가······.”
“게다가 조실장님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답이 좁혀지죠. 뭐니뭐니해도 회장님 따님이시잖습니까? 후계자가 신경쓸만한 일이라면야, 뻔하죠.”
“윽······.”
김인숙은 당황했다.
후계자가 신경쓸만한 일이라면 뻔하다. 라는 이 한마디가 묘하게 묵직하게 가슴을 짖누른다.
‘오~ 이게 입질이 오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홍기도는 그저 아무말이나 막 던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조연아의 속내는커녕 표세인의 계획조차 알지 못한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애드립이 아니었던가?
홍기도는 그저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미끼를 투척하고 블러핑을 연발할 뿐이었다.
이것 역시 그가 오랫동안 표세인을 지켜보며 배운 것중에 하나.
“그래도 지금 우리는 한 배를 탄 상황인데, 곁다리 정보라도 주고 받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견제는 빼고? 물론 가진 카드를 전부 오픈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홍켓몬은 테이밍을 시전했다.
“그렇네요. 아군 적군이 명확한 상황인데, 제가 괜한 신경전을 벌이려고 했네요.”
김인숙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현재 상황은 여러모로 골치아픈 상황입니다. 본사가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 맞물려 미국지사 내에서 센터장인 마커스와 문이사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죠. 그런데 여기에 느닷없이 함전무님이 갑작스럽게 미국지사를 방문하신 상황이죠. 게다가 그 뒤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회장님의 장남인 조연준이죠.”
아시다시피라는 단어로 시작된 대화이건만 정작 홍기도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홍기도는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시늉만을 연발할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포지션내에서 서로 힘을 합쳐 상대의 술책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상황이죠. 그러니 손발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정보 공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아직 조연준이라는 인물이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인만큼, 우리는 함전무를 그쪽은 마커스를 상대하는 그림으로 갈 거라고 예상됩니다. 맞습니까?”
마커스가 센터장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표세인의 본목적은 자신 조차 모른다. 하지만 표세인의 패턴상, 조연아 측에서 함전무를 상대하겠다면야, 자연스럽게 남은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홍기도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마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쪽이 생각하고 계신 공략 방법에 대해 정보를 공유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우리는 아마도······.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카드를 전부 오픈하기로 한 것은 아니잖아요?”
빈손인 주제에, 홍기도는 까닥하면 김인숙의 함정에 걸려들 뻔했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표팀장님이 홍과장님을 대동한 이유가 있었군요.”
이미 권태인에게서 홍기도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노련하다고는 듣지 못했다.
얼마전까지 대리급에 불과했던 인물이 이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줄다리기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었다.
김인숙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가는 자신이 홀랑 정보를 넘겨버릴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에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미 지난번에도 표팀장에게 한방 먹었었지.’
지난번 영상제작 미팅 때, 미국지사 인원들까지 대동한 공격에 당한적이 있지 않나? 두 번 당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대충 노선은 확인했으니, 이정도 선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군요.”
“예. 그것만해도 어디입니까.”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는 김인숙을 보며 홍기도는 샐쭉 웃었다.
어차피 이 이상 이야기를 진행했다가는 자신이 블러핑은커녕 손에 든 패조차 없다는 사실이 들통날 터.
‘그나저나, 이게 이런 상황이었구나.’
홍기도는 김인숙에게서 낚아낸 정보들을 조합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
*
*
“비행중에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김비서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연아를 챙기기 시작했다.
역시 오른팔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라면 저 정도 충성심을 보이는 법이겠지.
그에비해 우리 홍켓몬은······.
“역시 기내식은 별로예요. 근처 맛집 알아놓으셨죠? 내 리스트랑 겹치면 안 되는데······. 지난번에 문이사님이 사주셨다는 유명한 스테이크 전문점 거기부터 가는 건가요?”
우리 일하러 왔다는 것은 알고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미국지사에서 사람들을 보냈다고는 들었는데, 일단 그들을 찾아야겠군요.”
“모두 피곤한 상황이니, 엇갈리거나 헤메지 않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연아와 김비서가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한걸음 뒤에서 그녀들 너머 게이트 바깥을 살펴보았다.
[May the Force be with you(포스가 함께하길)]
순간 이곳이 공항이 아니라 코스플레이 행사장이 아닐까 싶은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포스가 함께하길’ 이라는 괴상망측한 환영 팻말을, 다른 손에는 플라스틱 광선검을 손에든 범상치 않은 무리가 게이트 정면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저, 저 사람들은 대체 뭐죠?”
“그, 글쎄요.”
김비서와 연아는 설마 저들이 우리를 마중나온 미국지사 인물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냥 모른척 택시타고 가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제다이 무리들은 너무도 쉽게 우리를 발견해버렸다.
“저, 저기 왔다!”
“제대로 줄서! 확실하게 해야지.”
나를 발견한 제프리 팀은 잠시 허둥대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는 일사분란하게 제다이식 인사를 건넸다.
“포스가 함께하길.”
이들의 갑작스러운 퍼포먼스에 주변의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더러는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까지 시작했다.
‘진짜, 장난아니네······.’
정말로 찰나의 순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까 했지만, 지난번에 도움받은 일도 있고, 무엇보다 이번에도 이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임이 떠올랐다.
“포, 포스가 함께하길······.”
“!”
“!”
“?”
김비서와 홍기도는 뜨악한 얼굴이었고 연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귓바퀴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나름 뻔뻔한 편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버겁다.
하지만 부끄럽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힐끔 연아의 눈치를 살폈다.
“······.”
여, 연아야. 그런 짜게 식은 눈빛은 보내지 말아줘.
연아의 눈빛은······. 대체 미국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거야?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비, 비겁자······.”
이때 홍켓몬이 요상한 헛소리를 내뱉었다. 머리 복잡한데 넌 또 왜그러냐.
“혼자만 이렇게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거죠?”
넌 이게 샘나니? 너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도 저런거 살거에요!”
“아니, 안 돼.”
너까지 이러면 정말로 머리 아프다.
“왜 저는 안되냐고요! 나름 제가 파다완 포지션 아닌가요? 미래의 오비완 아니냐고요!”
“네가 오비완이면 내가 콰이곤-진이라는 거냐, 이 미친 놈아?”
하필이면 금방 끔살 당하는 캐릭터를 갖다 붙이다니!
게다가 우리가 그 역할이면······. 나중에 다스베이더 키워야 하는 것은 알고 있냐?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프리는 내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다들 이렇게 나와도 되는 겁니까?”
“다들 자진해서 반차를 냈습니다.”
뭘 또 그걸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겁니까.
“가시죠. 버스를 대절해 두었습니다.”
버스를 대절해? 아, 하긴 인원수가 많긴 하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제프리의 안내에 따랐다.
“오오오!”
“이, 이건······.”
“······.”
홍기도는 이번에도 환호하며 눈을 반짝였고, 김비서는 놀란 얼굴, 그리고 연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제프리가 전세한 버스는 차체 전체를 다스베이다 이미지로 도색한 검은 버스였다.
이쯤 되면 일일이 놀라기도 지쳤다.
“그런데, 제다이라면서 다스베이더?”
“······단일 캐릭터 인기는 최고니까요. 이거 투표하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모두 야근시간까지 어찌나 열정적으로 논의했는지 모릅니다.”
이게 오래 걸릴 일이냐? 그리고 이런 일로 야근하지 마라.
“다른 것도 아니고, 제다이의 귀환 아닙니까? 이런 빅이벤트를 그냥 넘기면 저희가 면목이 없지요.”
제프리 팀 전원이 동의한다는 듯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흐흐흐······. 마음에 들어.”
아니, 너는 이런거 마음에 들어하는 거, 아니야.
홍켓몬이 폭주를 할까 싶어, 나는 슬쩍 한걸음 다가섰다.
예기치 못한 폭주를 일으키면, 기절시켜서라도 얌전히 만들어야지.
“대체 표세인 팀장님은 뭐하는 사람이죠?”
“······.”
“우리 정보가 너무 부족했네요. 이건 뭐 거의 팬클럽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
“설마 표세인팀장 미국에서 연예인 활동 같은 것 했던거 아니죠?”
“······.”
연아는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든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