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국내 게임쇼 진행을 맡았던, 권태인과 남궁원은 예상했던 대로 훌륭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두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째릿!
음······. 서늘하다.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최대한 화사한 미소로 그녀들을 반겼지만, 돌아온 것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초리뿐이었다.
“진짜······. 어휴.”
권태인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고, 남궁원은······.
“진짜 싸움 잘하게 생기셔서 다행인줄 아세요.”
나름 참는 노력이겠지.
“하하, 미안해.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야.”
미국지사에서 유명 스트리머들과 홍켓몬이 기대 이상의 영상을 업로드한 이후, 깨비몬에 기대감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국내 게임쇼까지 영향을 미쳤다.
“살면서 받을 명함을 그날 전부 받은 느낌이에요. 가방이 명함으로 가득 찰 뻔 했다니까요?”
“하하, 무슨 농담······. 좀 많긴 하네.”
남궁원이 가방을 펼치자, 정말로 미어터질 듯이 빼곡한 명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여성용 가방은 워낙 작으니까······.
“요즘 같은 경기에, 투자하겠다고 투자자들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다니······. 진짜 미쳤네요.”
“애초에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던 일이잖아. 조실장님의 활약 덕분에 캐릭터 브랜드는 이미 자리 잡은 상황이었지. 거기에 게임과 영상과의 연계가 기름을 부은 격이 된 거지.”
“예상하셨다면, 조금 언질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말했잖아.”
“언제요!”
“믿는다고······.”
쉬울 거라 생각했다면 그런 말 안 했지.
“어쨌든 잘 해냈잖아. 믿고 있었어. 우리팀 에이스 둘을 동시에 출전시켰는데, 감당 안되면 곤란하지.”
“에이스?”
“갑자기 왜 그러냐?”
“확실히 저를 에이스라고 생각하세요?”
남궁원이 득달같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 그럼······. 너 원래도 에이스 소리 듣던 녀석이잖아. 뭘 새삼스럽게.”
“아니, 팀장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냐고요.”
“물론이지. 그럼 설마 내가 홍기도를 에이스라고 생각하겠어?”
그건 나에게 너무 잘 못 하는 거다. 그러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일말의 걱정도 말끔히 사라졌네요. 행사관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어요. 다른 게임사 부스들에 미안할 정도로 우리쪽에 인파가 몰려들어서요.”
“미튜버 효과도 그렇고······. 화제성은 충분한 타이틀이니까.”
“가만······. 맨날 팀장님. 팀장님. 하고 부르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이 스튜디오 대표셨죠?”
“어? 그렇지.”
“세상에······. 팀장님 이제 돈방석에 앉으시겠네요.”
아! 그렇구나!
“뭘 놀랐다는 표정이세요! 당사자이신 분께서?”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그쪽으로는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게다가 깨비몬 게임이 벌어들일 예상 패키지 판매 수익에······. 케릭터 로열티에······.
“큰일났다.”
“네?”
“나 엄청나게 부자 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걸 왜 이제와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다. 항상 회사 수익으로만 생각하던 어마어마한 금액.
그 금액의 일부가 이제 내 것이라니?
이거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라,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미안······. 부자가 돼 본 적이 없어서······.”
“여친분한테 선물이나 사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비싼걸로?”
“비싼거라······. 좋아할까?”
“비싼 선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대학생에게 초등학생 용돈 수준의 선물이 뭐 얼마나 감흥이 있겠나?
“여자친구가 부자라서······.”
“역시 부자들은 재수가 없군요.”
“······이의있다! 내가 언제부터 부자였다고.”
“이제 곧 부자잖아요! 로또 한 10장 맞은 수준으로 돈 버시게 되는 것 아니에요?”
“아니지.”
“?”
“한 100장쯤 맞은······. 아니, 잘난 척이 아니라, 지난번에 기대 수익 계산했었잖아.”
나름 겸손해봤다. 레퍼런스를 워낙 전설적인 것으로 삼지 않았나? 그 반만 돼도, 로또 100개도 우습다.
“······저 보너스 많이 주세요.”
“어? 어. 그래야지. 아니, 그것보다 이참에 너희들 소속도 옮겨야겠다.”
그동안 이래저래 바쁜 탓에 미적거렸는데, 이제 출시가 코앞까지 닥친 시점이니, 슬슬 독립 스튜디오라는 이름 대로, 포진을 새로 갖춰야 한다.
“권팀장님 쪽은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너희는 내 쪽으로 올 거지?”
“그걸 말이라고!”
아따, 이 녀석 오늘따라 무섭네. 부자가 되면 서민들 눈초리가 두려워 진다더니 이런 건가?
어제까지 서민 1호로 살았던 탓에 감이 잘 안 오는데, 돈 많다고 유세냐! 라는 식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그런데 홍기도는 어디있어요?”
“글세? 그 놈 이야,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녀석이라서······.”
아까까지는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이 놈은 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낙엽마을 탈주 닌자 부활이냐?
*
*
*
“미국일은 잘 마무리 하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양성태의 말에 홍기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듣기로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고 들었는데, 영상에서는 훌륭하시더군요.”
“아닙니다. 지금도 저때를 생각하면 손이 떨리는 걸요.”
홍기도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들어보였다.
“그 정도였습니까? 솔직히 영상에서는 워낙 자연스러워 보이셔서, 전혀 못느꼈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스타워즈 놀이하는 제프리 팀들의 유쾌함에 살짝 취한 덕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리머들 뿐만 아니라, 촬영 스텝과 제프리 팀원들까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작되더라고요. 허벅지를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멍이 들어버렸습니다.”
흥건하게 젖은 홍기도의 손을 보며 양성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세인 팀장님도 운이 좋으신 분입니다. 정말로요.”
아마도 홍기도는 자신의 속내를 표세인에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양성태는 듣지 않아도 그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일에는 호들갑이면서도 이런 일에는 대범함을 보이는 인재.
‘확실히 훌륭하다. 오른팔이라······.’
어쩌면 자신과 문이사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이사님쪽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네. 안 그래도 문이사님의 연락을 받았기에 홍기도 과장님을 호출한 것입니다.”
잘 해결 되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영상이 업로드된 이후, 미적지근하던 주주들의 반응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그간 호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안전제일주의로 보신에 급급하던 마커스는 단숨에 신용을 잃었고, 문이사는 발표 자리에서 곧바로 센터장 취임까지 끝내버렸다.
“그런데 그러면 전 센터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계약해지와 함께 회사를 나서게 되겠지요.”
“살벌하네요.”
“임원이지 않습니까. 높은 자리에는 그만한 리스크가 동반되는 법입니다.”
과거 표세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홍기도에게도 넌지시 가르침을 내려준다.
이런 부분에서 양성태의 그릇의 크기와 연륜이 느껴졌다.
“임원이라······. 아직은 감이 안 오네요.”
“그리 오래걸리지 않을 겁니다. 홍기도 과장님도 표세인 팀장님 곁에 계시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위치에 도달하시겠지요.”
“아······. 그런 머리 아픈 일 없이, 적당히 월급 루팡 노릇만 하고 싶었는데.”
장래 임원직에 오를거라는 말에 이런 대답을 한다는 것도 무척 독특하다.
홍기도의 집안 내력쯤은 알고 있는 양성태였지만, 보통 그런 집안사람들일수록 권력욕과 자리 욕심에 열을 내기 마련인데, 홍기도는 이런 면에서 표세인만큼이나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이게 본건은 아니죠?”
“네. 맞습니다. 두 개의 안이 있습니다.”
“두개나요?”
“하나는 사실 홍기도 과장님이 직접 나설일은 없는 건입니다. 승진에 관련된 안건이니까요.”
“승진이요?”
“네. 조만간 사내에 대격변이 시작될 겁니다. 함전무님께서 이번 분기를 끝으로 퇴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아······. 미국과 관계된 일인가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함전무의 거취에 관한 문제는 홍기도 조차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을 가지 않은 양성태가 상황을 더욱 정확히 추측하고 있는 상황.
“함전무님은 여러 가지면에서 사내입지가 대단하신분입니다. 이건 단순히 전무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전무군단 파벌 내부를 너머 사내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군요.”
사내 정치에 관한 부분만큼은 타고난 자질 이상으로 경험이 중요한 법. 홍기도는 자신이 의견을 낼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얌전히 양성태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도 함전무님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 것입니다. 아마 속속들이 새로운 파벌이 대두될지도 모르지요.”
“상당히 시끌벅쩍해지겠네요.”
“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우리 쪽에는 큰 기회입니다. 이상무님도 조실장의 뒷배가 되기로 결정을 내리신 이후에는 거의 파벌 관리같은 것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잠재적으로 우리 쪽이 가장 큰 세력이죠. 승진건을 통해 우리의 역량을 주변에 알리는 것은 무척 중요한 계기가 될 겁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뭐죠?”
“양실장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에 주체는 역시 표세인 팀장님이 맞죠?”
“네. 그렇습니다.”
“대체 양실장님은 왜 표세인 팀장님을 그렇게까지 지원해주시는 거죠? 마치 표세인 팀장님이 윗사람처럼 보일 정도예요.”
“정답입니다.”
“네?”
“머지않아, 저 양성태는 표세인 파벌의 일원으로 여겨지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제 바람이기도 합니다.”
“어째서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체 양실장이 뭐가 부족하다고 표세인의 아래를 자처하는가?
“회장님 곁에 있다 보면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회사를 보게 되기마련입니다.”
“다른 시각?”
“경영자라는 것은 의외로 제 손으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조회장님의 빈자리는 함전무님이나, 이상무님 같은 분들께서 메꿔주셨죠. 물론 때로는 과열 경쟁이나, 견제도 있었지만요.”
“음······.”
알 듯 말 듯 하다.
그들의 빈자리를 표세인이 메꿔주길 바란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애초에 한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격한 경쟁 사회로 이름이 높다.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 고분고분히 자리를 내어주는 습성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이건 한국을 넘어 세계 전체를 뒤져봐도 찾기 어렵다.
“한때, 회장님은 저에게 그 역할을 기대하셨더랍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죠. 그러던 차에 표세인 팀장님을 만나고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역시 이해가 안 돼요. 그렇다면 표세인 팀장님을 아래에 두는 방법도 있지 않나요? 애초에 처음 그림은 그런 느낌이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저라는 사람의 성향이 문제가 됩니다.”
“성향?”
“세상에는 직접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더러는 그것보다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게임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스포츠팀에 맹목적인 사랑을 보내는 팬들도 있지 않은가?
물론 이 경우에는 단순 팬의 입장이 아닌, 매니저나, 코칭 스탭 같은 느낌이겠지만······.
“곁에서 지켜본 표세인 팀장은 능력 면으로 보나, 개인의 매력으로 보나, 너무도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양성태는 그늘 한 점 없는 맑은 얼굴로 자신의 속내를 담담히 드러냈다.
“······음. 우리 경쟁자였군요?”
그걸, 이제야······. 양성태는 대답 대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저희는 현재 경쟁 중이고, 저 아직 포기할 생각 없습니다. 오른팔.”
조회장의 곁에서 배운 것. 선의의 경쟁 속에서 최고의 결과가 탄생하는 법.
홍기도에게도, 문상훈에게도, 양성태는 양보할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