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판호?”
“네.”
난데없이 판호라니, 그런데 그 소식을 홍기도가 물어왔다는 것이 의외다.
뭐, 나야 이미 조회장님과 함전무님의 대화를 직접 들었기에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훗, 저 홍기도입니다.”
“그니까, ‘홍’ ‘기’ ‘도’씨가 이런 걸 어떻게 아냐고.”
“······그렇게 이름 띄어 부르면 이상하게 들리잖아요.”
“그러니까, ‘홍’ ‘기’ ‘도’씨 똑바로 말 해보세요.”
“탈주!”
“어딜!”
나는 달아나려는 홍켓몬의 뒷덜미를 냉큼 붙잡았다.
“나를 상대로 정면에서 탈주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냐.”
“으윽······. 분하다.”
은신술을 코앞에서 펼치려 하다니! 요즘 고삐를 안 조였더니, 조련사를 우습게 보는 거냐!
“순순히 말해라. 안 그러면······.”
아니, 말 안 해도 나쁘지 않겠는데?
요즘 조련사 노릇도 못 했는데, 오래간만에 야들야들하게 뼈마디를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간만에 특제 스포츠 마사지 한번 고?
“내, 내 어깨에서 손 떼세요! 양실장님이 말해주셨어요!”
쳇, 눈치는 빨라가지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홍켓몬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양실장님이 왜 너에게?”
“그건 제가 오른팔이니까!”
“쉿.”
“왜요?”
“쉿. 남들 듣겠다.”
“지금 제가 부끄럽다는 거임?”
“······어.”
그걸 몰라서 묻나.
“······.”
어라? 이놈이 갑자기 왜 음소거 모드지? 이런 건 보통, 기 모을 때······.
“동네 사람들! 표세인의 오른······. 윽!”
-데롱, 데롱.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기절한 홍켓몬을 자리에 옮겨놓았다.
“오랜만에 꽁트하시네요.”
남궁원은 심드렁하게 말했고.
“호, 홍과장 괜찮은 거죠?”
적응이 덜 된 권태인은 걱정 어린 눈길로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면 안 되죠.”
안타깝지만 이놈 죽은 척이
“네?”
“아, 아니지. 괜찮을 겁니다.”
“누, 눈이 뒤집혔는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점심시간 때쯤에는 돌아올 거에요. 5분 남았네요.”
함송희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저 점심 따로 먹을게요.”
“선약 있으세요?”
“양실장님 좀 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다들 맛있게 먹어.”
“네.”
나는 양실장에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네. 혹시 따로 식사 약속 있으세요?”
“아닙니다.”
양실장은 담백하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비서실장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양실장은 회장님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대비해 보통 식사 약속을 잡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의미는 자주 혼자 먹는다는 의미겠지?
비서란 참 외로운 직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가시죠.”
우리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홍과장에게 들었습니다. 판호? 그게 갑자기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이번에도 짐짓 모르는채하며 양실장에게 질문했다.
굳이 양실장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실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함전무님께서 은퇴를 결심하시면서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얻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저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함전무의 유산(?)이라면 당연히 전무 군단의 몫이 아니겠나?
더군다나 나는 양실장 파벌에 중핵이다. 이 부분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사실 함전무님이 나도 참여시키겠다고는 했을때도 이 부분 때문에 놀랐고,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일이 조금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다?
“함전무님께서 전무군단의 핵심임원들을 불러모아 선언하셨다더군요. 본사가 아닌, 외부에 나가 있는 각 스튜디오의 대표들에게 판호와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물려주겠다고요.”
“그게 전무군단 입장에서 납득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함전무님의 의중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이건 추측입니다만······.”
추측이라면서도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확실히 양실장의 추측이라면 신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
“함전무님은 내심 파벌 내, 고참 임원들을 괘씸하게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아!”
이거라면 나도 아는 바가 있다. 당장 천이사부터가 함전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불온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던가?
“어쨌든 우리에게는 나쁠 것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아닙니까?”
“거기에 표세인 팀장님의 입지가 더해지면 저울이 반대로 기우는 겁니다.”
“제 입지요?”
“맥베스가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에, 함전무님은 자타공인의 에이스였습니다. 3M이라 불리는 다른 회사에도 함전무님 같은 에이스야 존재했었겠지만, 함전무님의 입지는 남다른 편입니다. 국내 최고의 중국통으로 활약하신 분이니까요. 이번 판호만봐도 알 수 있지요.”
“네. 그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함전무님은 그런 자신의 리즈시절의 영광을 재현해 줄 수 있는 후계자를 찾고 계신겁니다. 오너 일가와도 팽팽한 힘겨루기가 가능할 정도의 인재를요.”
오너 일가와도 힘겨루기가 가능한 인재. 확실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그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일등공신이란 절대자에게 무척 계륵같은 존재다.
단순히 그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 인물 조차 대우 받지 못한다면, 어느 누가 충성을 보일까?
‘하지만 이러면 상황이 너무 묘해지는데?’
예전에도 함전무는 나에게 ‘우리 같은 사원들’이라며 직원들 입장을 강조했다.
물론 나도 직원인 것은 맞다. 맡긴한데······. 내 처지를 일반 직원이라고 할 수 있나?
“정말로 좋은 기회입니다. 안 그래도 이상무님이 조실장님 뒤에 선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우리가 함전무님의 영향력을 흡수한다면······. 적어도 어느정도 균형은 이룰 수 있겠지요.”
“균형······.”
함전무는 형평성, 양실장은 균형을 언급한다.
“단순한 힘겨루기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회사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서는 오너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필요한 법이지요. 마치 기둥처럼 회사를 지탱할 수 있는 존재. 이 부분은 저도 함전무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 오랜만에 저 멘트가 등장하는 구나, 회사의 기둥.
아니, 내 꿈인 가정의 기둥이 되기까지 앞으로 한걸음인데, 대체 왜 자꾸 이런 멘트가 튀어나오는 걸까.
“양실장님 이참에 우리 관계를 분명히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회장님의 예비사위인 내가 이 이상 회사에서 입지를 키우는 것도 좀 우려가 된다.
어차피 독립 스튜디오 대표라는 명함도 받았겠다. 서서히 신변 정리를 해보는 거다.
사내 파벌 다툼 같은 것은 양실장을 방패로 삼고 나는 그냥 홀가분하게 내가 원하는 게임이나 만들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만끽하는 거다.
그래! 이게 맞지!
“그렇군요. 확실히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지요.”
양실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슬슬······.”
“네. 이제 슬슬 파벌의 수장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실 때가 되셨습니다.”
수, 수장?
“예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어떤?”
“묻어간다고 했던 말이요.”
“네. 기억은 합니다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양실장이 웃으며 농담처럼 던졌던 말이지 않나?
그런데 이 타이밍에서 왜 그 말이 나오지?
“제가 표세인 팀장님의 뒤에 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설마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내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나를 물심양면 키워주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심이십니까?”
“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파벌의 수장이나, 회사의 정점을 노릴만한 그릇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보좌하는 일에 어울리는 타입이죠.”
“······.”
“예전에 회장님께서 저에게 지금의 표세인 팀장님의 역할을 기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전 조회장님과 함전무님의 대화를 통해서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그릇으로는 무리더군요. 그래서 사양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표세인 팀장님과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
압박감이라는 것은 이렇게 부드러운 호의속에서도 전달될 수 있는 것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내정치니, 뭐니, 무거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조회장님께 갚을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회장님께서 일구신 이 맥베스를 더 크고 좋은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표세인 팀장님과 함께라면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흔들림 없는 양실장의 눈빛에 나도 마음을 다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상대가 이정도까지 마음을 보내주는데, 어떻게 보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양실장님.”
“네.”
“저 게임 개발 외에는 별로 관심 없는 사람입니다.”
“네.”
“조만간 결혼하면 회사 일에 소홀해 질 수도 있고요.”
“이따금 올바른 판단과 돌파구를 제시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아니겠습니까? 밑에서 땀흘리는 것은 저희의 몫이지요.”
“그 말······. 후회하셔도 모릅니다?”
“······후회시키지 않으실 것 믿고 있습니다.”
아니, 아마 까맣게 모르시는 것 같은데······. 차마 부끄러워서, 나중에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겠다는 말은 못 하겠고······.
어쨌든 이 정도면 나는 경고 할 만큼 한 셈이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조금 서둘러서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겠지요.”
“체제요?”
“네. 적어도 표세인 팀장님이 우리 파벌의 수장이라는 것은 우리 사이에서는 공유해야겠지요. 그리고 아직 문이사라는 입장이 모호한 인물도 있지 않습니까?”
“무, 문이사님이요? 그분은 그냥 협력관계로······.”
“표세인 팀장님.”
“네.”
“제가 모시는 분이십니다. 협력은 급이 맞는 사람과 하는 거지요. 문이사님은 그정도 급이 아닙니다.”
문이사가 급이 안 맞아?
양실장은 가끔 배포가 너무 크다. 아니, 나에 대한 점수가 지나치게 후하다고나 할까?
“문이사 호출하시죠.”
어느새, 님자가 빠져버렸다.
“호출이요?”
“네. 그리고 충성 서약 받으시는 겁니다. 아, 그리고 고부장도 그렇겠네요.”
“고, 고부장님까지?”
황금 고블······. 아니, 고부장은 무려 재무팀을 통째로 들고오는 것으로 협력관계를 제안했던 것 아닌가?
“양성태가 리더일때는 그럴수 있지요. 하지만 표세인이 리더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러다 자칫 그분들이 반발하면?”
“그럴일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그 정도도 자신 할 수 없는 분을 모시겠다고 할,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를 믿지 말고 양실장 당신의 판단을 믿으라는 거죠?
뭔가 살짝 오글거리는 멘트라는 느낌도 들지만······.
확실히 사람 끓어오르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런 느낌은 마치 시합 전 코치가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으레 선수들에게 쏟아붓는 아부성 멘트 같다는 느낌이 든다.
‘소싯적에는 나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곤 했었지.’
연륜 있는 코치의 격려는 선수 스스로를 천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양실장의 말은 그에 못지 않은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깨비몬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직 국내 게임 시장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경쟁사들이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주가가 20%씩 쭉쭉 내려 앉는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지 않아, 조연아 실장이라는 젊다 못해 어린 회장으로의 세대교체까지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연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살짝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연아가 회장에 앉자마자, 회사가 휘청인다? 그건 안되지.
“그것을 위해서라도 대들보가 되어 회사를 흔들림 없이 지탱해줄 인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회장님도 내심 표세인 팀장님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게임 업계 사정도 그렇지만, 내부사정만 놓고 봐도, 함전무의 은퇴와 회장 교체라는 빅이벤트가 머지않은 멕배스의 앞날은 전에 없던 혼란이 예상된다.
그리고 사내정치를 떠나, 조연아.
미래의 내 아내가 이끌어야 할 회사가 휘청이는 것을 손놓고 지켜볼 수는 없다.
그래. 연아가 회장에 취임하는 그때까지, 회사가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어설픈 야심 넘치는 직원들의 권력다툼 속에서도 끄떡없는 안정감을 자랑하도록······.
그게 바로 미래의 기둥서방을 꿈꾸는 내 역할이겠지.
애초에 집에서 신선놀음하려면 아내의 회사가 순탄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의욕이 솟구쳤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표세인 팀장?
“문이사님. 아니, 센터장님.”
-그냥 문이사라고 불러도 되네. 본사 직급에 변화는 아직 없으니까.
아직이라는 단어에 묘한 울림이 있다. 내심 자신이 한단계단 승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투다.
물론 그만한 공을 세웠고 자격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만한 야심과 자부심은, 어쩌면 훗날 연아 조차 컨트롤하기 어려운 야생마의 기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고삐를 단단히 쥐자.
“한국으로 좀 오시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자기?
“네. 최대한 바로, 지금 당장.”
-······그렇군. 알겠네. 바로 준비해서 들어가도록 하지.
다행히도 문이사는 즉각 대답했다.
“다행히 바로 오시겠다는 군요.”
“네. 예상대로군요.”
양실장의 예상은 무엇이었을까? 문이사가 순순히 본사로 올 것이란 것? 아니면 내가 강하게 푸쉬할 것이라는 것?
뭐든 상관없다.
고지(결혼)가 코앞이다.
교통 정리 시작한다.
< 얼굴 좀 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