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보정훈 보다는 성진규가 낫겠지.”
천이사는 외부 스튜디오의 대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실적을 지닌 두 사람을 비교했다.
“최기환도 있지만······.”
실적으로는 두 사람에 비해 뒤지지 않는 최기환이라는 남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쪽은 포스트 문상훈이라 불릴 정도로 컨트롤이 불가능한 타입이었다.
“예의 주시할 인물은 보정훈과 성진규겠지.”
지금까지는 잠재적인 경쟁자라는 생각에서 각을 세웠다.
물론 최대의 경쟁자는 도이사였지만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함전무에게 물을 먹은 상황 아닌가?
“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적을 물어다줘?”
얼뜨기 같은 다른 이사들은 함전무의 말에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였지만 천이사는 달랐다.
그는 그 말 속에 숨어있는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다.
“가만히 앉아서 떠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신세를 잘도 포장했지.”
자신 보다 한참 젊은 신진들의 눈치를 살피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뒷방 늙은이 신세도 하루 이틀이다.
게다가 게임 업계는 비단 사원들만 교체가 빠른 것이 아니다.
신생업체이기에 아직 눈에 띄는 세대교체가 목격된 적이 없다뿐이지.
임원들이 하루가 멀다고 교체되는 회사들도 한둘이 아니다.
애초에 해고하고 싶으면 임원 계약을 하라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나는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순 없어.”
그동안 함전무라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창업공신 아래서 칼을 갈아온 것이 대체 몇 년이던가?
이제 겨우 고개를 치켜들 시점을 맞이했는데, 함전무의 은퇴와 함께 뒷방 늙은이 신세로 만족하라고?
“제가 무슨 황제쯤 된다고 생각하나? 순장이라니, 어림도 없지.”
이건 마치 고대 황제의 붕어와 함께 치러지는 순장의식이나 다름 없다.
시대는 물론이고 함전무의 입지는 결코 그정도는 아니지 않나?
“조금 늦어지더라도 서둘러 움직이면 충분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어.”
상대는 아직 본사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임원생활을 모르는 애송이들이다.
충분히 자신의 경험과 연륜, 연줄을 비싸게 구입할 구매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
“표세인······. 아깝기는 해도······.”
그놈의 과장 진급 때문에, 무려 조회장의 눈 밖에 나버린 상황.
게다가 표세인 곁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제임스라는 외국놈이 붙어있지 않은가?
‘내 언젠가 제임스 네놈만은 질근질근 씹어주리라······.’
제임스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천이사는 이를 갈았다.
“부르셨습니까?”
“아, 왔군.”
천이사는 함전무 파벌 내에서 오른팔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어도, 연차로는 분명한 이인자였다.
그의 호출을 받은 임원진들이 줄줄이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우리끼리 따로 회동을 갖는 것은 전무님께서 좋게 생각하시지 않으실 텐데요.”
도이사가 염려섞인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천이사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무님께서 은퇴 선언을 하신 상황에서 내가 뭐 불순한 논의라도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좀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봅시다. 솔직히 우리들 모두 팽된 상황 아닙니까?”
“토사구팽······.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답답하기는, 판호로 이룰 실적에 전무님의 영향력을 이어받은 그치들이 우리 같은 꼰대들을 곱게 볼 것 같아? 나는 그들이 우리를 눈엣가시로 여길 것 같은데?”
“아······. 하지만 우리가 지원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끄덕이는 척 하겠지. 하지만 차츰 제 사람들로 갈아치우려 하지 않겠나? 게다가 조연아 실장의 나이를 생각하세요. 이건 회사 전체가 세대교체가 이뤄질 판이라고, 이중에 몇이나······. 아니,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으음······.”
천이사의 말에 임원들 전원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천이사의 말대로였다. 이미 스물스물 세대교체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임원들의 모습에 천이사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자신이 중심에 선 것 같은 만족감이 싫지는 않았다.
“어차피 능력 있는 녀석들은 건방지고, 우리가 길들이기 쉽지 않지.”
“그말씀은?”
“차라리 아예 우리 꼭두각시가 될 만한 녀석을 찾아보면 어떻겠나?”
“꼭두각시?”
“그래. 솔직히 말해서 전무 군단에서 그 군단이 누구야. 우리 아니냔 말이지. 그동안 그 밑에서 고군분투한 우리는 팽하고, 한참 아랫것들 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말이나 돼?”
“······저는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음, 죄송합니다.”
도이사가 천이사의 눈초리를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자고, 함께 순장할 사람은 지금 떠나게. 함전무님과 함께 은퇴하겠다는데, 말리진 않겠네.”
“수, 순장!”
“은퇴라니······.”
순장과 은퇴라는 말이 나오자, 임원들은 일제히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말은 잘하는군.’
도이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따지고보면 임원이란 비정규직들이다. 그런 임원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의 사고를 컨트롤하는 재주는 확실히 천이사의 장점이었다.
‘배포만 컸다면 함전무님도 고민 없이 천이사를 후계자로 삼으셨을 텐데······.’
연차가 한참 차이나는 자신을 상대로도 경쟁심을 숨기지 않는 천이사의 작은 그릇.
능력이며, 언변이며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데도 그를 완전히 신임할 수 없었던 함전무의 마음을 도이사는 완벽히 간파하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천이사는 함전무의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쨌든 반대 의견은 없는 거겠지?”
이제 흐름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한 천이사는 입술이 들썩이는 것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함전무의 의향이야 어떻건, 이대로 전무 군단의 지휘권을 자신이 손에 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이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으리라.
‘다행히 도이사도 오늘따라 얌전하고······.’
평소에는 자신이 하는 말마다 토를 달아가며 반대하던 도이사는 이 순간만큼은 얌전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모두 동의한 것으로 알지.”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응?”
천이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결국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도이사는 이번에도 딴지를 걸어온다.
“······쯧, 뭔가?”
쯧이라니? 도이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반대는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래?”
반대가 아니라는 한 마디에 천이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도이사는 그런 천이사를 바라보며 가만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는 양반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전무님께서 낙점한 인물들을 우리 손에서 포섭하고 컨트롤하자는 것에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런데?”
“다만, 상대를 굳이 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지?”
“우리가 다루기 쉬운 만만한 상대라고 해서 나중에도 계속 우리 편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긴, 제 손에 칼 쥐는 순간 휘두르지 못해 안달인 것이 사람 본성이지.”
몇몇 임원들이 도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쩌자고?”
모두의 관심이 도이사에게로 쏠리는 듯 하자, 이번에도 여지 없이 천이사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내부에서의 교통정리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뭐?”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각자가 독자적으로 포섭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낙점되면, 자연스럽게 그 커넥션으로 우리 내부에서의 서열 정리도 끝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
도이사의 말에 천이사는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목적을 박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하기야······. 그게 맞지. 어차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일이기도 하고.”
“게다가 굳이 우리가 배팅을 한 마리 말에만 할 필요도 없잖아. 배팅 자금이 우리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아닌데······.”
요는 전무 군단의 지원을 약속하며 구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애초에 이렇게 사람을 포섭하는 일에 능숙한 이들이기에 이 자리까지 올라 올 수 있던 것이 아닌가?
“자, 잠깐 그렇게 되면 자칫 우리가······.”
“어차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판입니다. 나중에 배신할 일은 없겠지요. 군단의 지원 받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 역시 그를 적극 지원하는 수밖에 없겠죠.”
모든 얼개가 정확히 들어맞는 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죠.”
“응. 응. 좋은 방안이야. 모두에게 의욕도 더해지겠군.”
자고로 자신 앞에 떨어질 당근이 하나라도 있어야, 의욕이 생기기 마련.
비록 함전무는 자신의 후계자를 외부에서 찾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렸지만, 적어도 군단의 지휘권을 쥐는 것이라도 가능하다면······.
‘아니, 어차피 꼭두각시 세워서 수렴청정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더 안전할지도?’
노회한 능구렁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은 이제 천이사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럼 결정된 것 같군요. 모두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도이사는 냉큼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에 위기의식을 느낀 임원들도 줄줄이 자리를 떠났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천이사는 모두가 떠난 회의실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
*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보정훈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성진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입사 동기로 본사에 있을 때는 실적을 겨루며 미우나 고우나, 자주 맞닥뜨리던 인연이었지만 각자 외부 스튜디오 대표로 취임한 이래 왕래가 뜸한 시점이었다.
“별건 아니고, 혹시 들었냐? 함전무님 소식?”
“아!”
성진규의 말에 보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그래서 뭐 선전포고라도 하러 온거냐? 양실장님 스타일이야?”
“흠흠, 내가 아직 그정도 깜냥은 아니지.”
외부에서는 대표지만 본사 직급으로는 실장 대우.
하지만 그들 중에 스스로가 양성태 급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만큼 양성태의 입지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양실장님 지난번에 참 멋있었지.”
“그랬지. 이상무님 진영에 정면으로 선전포고하고는 문이사님을 단숨에 꺾어버리고 말이야.”
“그 이야기 최기환 앞에서는 하지 말아라.”
“칫, 나도 알아.”
성진규가 양성태의 팬이라면, 최기환은 문상훈의 팬에 가까웠다.
“아는 놈이 지난번에······.”
“그때 일은 말하지 마라. 그냥 좀 취해서 튀어나온 말이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최기환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말았었다.
자잘 못을 떠나, 성진규는 스스로 그런 분란을 일으킨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선전포고도 아니라면 무슨 일이냐? 설마 순순히 판호를 포기한다고 할 것도 아닐텐데?”
“왜? 못할 것도 없지?”
“뭐?”
황금세대라 불리며 비슷한 연령에 연차로 동시에 두각을 나타낸 보정훈, 성진규, 최기환은 나름 돈독한 관계임에도 각자 업무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치열한 경쟁관계였다.
더군다나 요즘같은 불경기에 판호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황금향으로 직행하는 티켓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그걸 포기한다?
“물론 포기할 것은 판호가 아니라, 함전무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지만······.”
“난 또 뭐라고······.”
보정훈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나 보다는 네가 그 타이틀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지 않겠냐? 판호는 네가 더 잘 쓸 수 있고?”
“그렇지.”
“웃기고 있네. 그런식이면 솔직히 최기환이지.”
개발능력 자체로만 놓고보면 최기환이 최고다. 그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
오히려 그가 정치력이나 사교성에서 흠결이 있기에 세 사람이 동등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던가?
“일단 연합전선 구축 어떠냐?”
“연합전선?”
“솔직히 파벌이든, 판호든 둘 중 하나만 먹어도 꿀 맛이잖냐. 분배는 차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먹고 보자?”
“뭐 그렇지.”
“흠······. 너 치고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긴 하다.”
“너 치고는?”
“하하, 솔직히 너 양실장님, 양실장님, 외치는 것 치고는 정치력은 그닥이잖아?”
“웃기지마. 양실장님 일하는 것 지켜보기나 했냐? 그분은 단순히 정치력만 있으신 게 아니야. 지난번 기획팀장으로 부임하시자마자, 모두의 부동산 매출 띄우고, 좀비로얄 터트리신 것 몰라?”
“아······. 그거 말이지. 근데 그거 표세인이라는 친구 단독 골이라는 말이 있던데?”
“뭐? 너도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을 믿냐? 애초에 표세인인지, 뭔지는 그냥 운 좋게 양실장님 눈에 띄어서, 깔린 레일 위를 내달린 것뿐이야. 전부 양실장님 설계라고 알아?”
“또, 또 흥분한다. 너는 어째 양실장님 이름만 나오면 그 모양이냐.”
“흠흠. 어쨌든 이거 진짜다. 명심해라.”
성진규도 한발 늦게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닫고 겸연쩍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연합전선 자체는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그런데?”
“일단 지피지기라고 우리 요즘 본사에서 떨어져 나온지 꽤 돼서 그 쪽 사정 잘 모르잖아. 최기환은 그렇다치더라도 표세인 팀장은 한번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맞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
“······너 처음부터 혼자 가기 뻘쭘해서 나 찾아온 거지? 연합이니 뭐니도 오는 길에 생각한 거고?”
“흠흠, 아니다.”
보정훈은 또 한 번 피식 웃으며 턱 끝을 매만졌다.
“표세인 팀장이라······. 그래, 우선 얼굴은 한번 봐야겠지?”
< 천만 각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