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표세인······.”
문상훈은 고민에 잠겼다.
자신의 귀국을 지시하는······. 그렇다. 그것은 분명한 지시였다.
“이건 정말 놀랍군.”
가장 놀라운 것은 표세인의 달라진 태도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지시에 따르려는 자신의 마음이 더욱 놀랐다.
“크큭, 삼두마차라더니······. 아니, 결국 카이사르는 셋중에 가장 젊었지.”
표세인이 언급했던 로마시절의 삼두정치의 구성원들과 표세인, 양성태, 그리고 자신 세 사람의 면면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 그래도 자네가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지.”
-예.
양성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건 자네 그림이겠지?”
-예.
문상훈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내가 폼페이우스다?”
-저는 크라수스라도 상관 없습니다. 서로 카이사르가 누구인지만 확실히 인지한다면요.
“조금 이르지 않나?”
문상훈은 다소 걱정스럽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아닙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문이사님과 저는 이 기회에 확실히 관계를 정립해야죠.
“동맹으로는 안된다. 이거로군?”
-예.
“내가 반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내가 여러 번 표세인 팀장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야. 게다가 그에게 큰 호감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참 젊은 친구의 뒤에 서라는 것은 좀 가혹한 셈법이 아닌가? 나 문상훈이야.”
말투와는 별개로 문상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는 얼굴이었다.
-문이사님.
“말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
-부디 제가 그린 그림에 한 축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문이사님은 제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축 중에 하나입니다. 간청드립니다.
“왜······. 그렇게까지?”
문상훈은 당황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름 서로를 경쟁자라 여기며 의식해온 사이였다.
그런데 부탁? 간청?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누구보다도 조회장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거야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회장님께서는 원대한 꿈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시간 안에 이룰 수 없다는 것에 무척 괴로워하십니다. 한때는 저에게 기대하신 적도 있지만, 제 역량으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기대였죠.
이것은 돌려 해석하자면, 같은 수준인 문상훈에게도 무리라는 뜻이었다.
“회장님의 꿈이 뭔지, 질문해도 되겠나?”
양성태라는 남자가 버거워하는 그 꿈이라는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호기심을 참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소 유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만······. 맥베스가 전 세계 모든 게이머에게 사랑받는, 그런 회사로 거듭나기를 희망하십니다.
“사랑 받는다.”
양성태의 말대로 유치함을 넘어 다소 황당하기까지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배제하고 봤을 때······.
“쉽지 않군.”
자본을 쫓아야 하는 회사, 그것도 막대한 이윤을 추구해야만 그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맥베스 같은 거대 기업이란 숙명적으로 유저들의 성토를 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 세계’라는 단서도 신경 쓰인다. 굳이 붙인다면 글로벌 스케일이라는 등급을 매길 수도 있겠으나, 인지도와 영향력, 자본 규모 등을 고려할 때, 국내에서 진정한 의미에 글로벌 레벨의 탑티어급 게임 개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끌리는 목표인 것은 부정할 수 없군.”
문상훈은 슬쩍 혀로 입술을 훔쳤다. 확실히 문상훈이라는 남자의 의욕에 불을 지피는 목표였다.
반대로 왜 지금까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그저 맥베스의 CEO가 되겠다는 작은 목표에 너무 매몰되어 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회사 자체의 스케일을 도약시키는 것에 비하면 그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불과한 자신의 목표는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지 않나?
“그런데······.”
-말씀 하십시오.
“표세인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굳이 제 대답이 필요합니까?
“크크큭. 건방지긴.”
문상훈은 양성태의 말투에서 숨은 속내를 단숨에 파악했다.
표세인의 역량과 그릇을 네가 모를 리가 없다. 반대로 모른다면, 네 안목은 겨우 그정도에 불과하다는 복잡한 의미가 담긴 한마디.
오랜만에 들어보는 양성태 특유의 말투였다.
그래, 과거에는 저 말투가 그렇게나 거슬렸었다.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태도와 함께 저 말투는 문상훈만이 아닌, 많은 사람이 양성태를 고깝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였다.
머리가 비상한 인물들일수록,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반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양성태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제 대답은 필요 없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역시 건방지다. 하지만 이런 점이 또 양성태 특유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상훈은 이런 생각에 또 한 번 미소지었다.
“한가지만 말해두지.”
-말씀하십시오.
“난 머리까지 숙이지는 않겠어. 그리고 만약 빈틈이 보인다면······. 그때는 내가 뒤에서 얌전히 서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런 상황이라면 문이사님을 제가 막을 겁니다.
“크크큭. 기대하지.”
문상훈은 클클 웃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비서에게 말했다.
“본사를 방문해야겠어. 가장 빠른 비행기편을 알아봐줘.”
“알겠습니다.”
비서가 키보드를 두르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문상훈은 눈을 빛냈다.
‘표세인 곁에 붙어있는 상황이라고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칠 거다. 양성태.’
문상훈의 목표가 멕베스 CEO에서 표세인의 오른팔로 잠정적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 시점까지 문상훈은 이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목표가 될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
*
*
드디어 문이사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즉시 나와 양실장을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나는 양실장의 집무실에서 그와 함께 문이사와 마주했다.
“흠······.”
내가 상석, 그리고 내 오른편에 양실장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문이사는 살짝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아마 문이사 본인도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측했으리라······.
“앉으시죠.”
“그러지.”
문이사는 양실장의 맞은편, 내 기준으로 왼편에 앉았다.
“이런 그림이었군.”
“네. 이런 그림입니다.”
문이사의 말에 양성태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이사 역시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하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크크큭.”
“크큭.”
“?”
나를 제외한 문이사와 양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 경쟁자들이 드디어 동지로 마주한 순간.
아마도 저 짧은 웃음 속에는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솔직히······. 아주 예전에 이런 그림을 생각한 적은 있었지. 실제로 이루어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그 그림 속 상석에 앉은 인물은 표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성태와 마주 앉아 한뜻으로 의견을 나누는 상황은 분명, 한때나마 상상한 적이 있던 일이었다.
“저는 얼마 전부터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건 나보다 자네가 낫지.”
“예. 이런 것은요.”
문이사와 양실장은 조근조근 자신들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끼어들 대화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한발 물러선 심정으로 그저 묵묵히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삼두정치란 것은 애초에 우스운 말이었지.”
“네. 결국 수장은 한명인 법이니까요.”
“······그리고 쌍두마차였던가? 나쁘지 않은 어감이고, 파트너도 나쁘지 않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은 잠시 나를 바라보며 뭔가 아련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 눈빛을 받고 있으려니, 뭐랄까······. 다소 가슴이 벅찬 느낌이다.
정말로 내가 이들 위에 서도 되는걸까? 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높게 평가하는 걸까?
일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언제쯤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생각이지?”
“이 시점에 표세인 팀장님이 우리 파벌의 중심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시기상조란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아직은 문이사나 양실장에 비해 한없이 낮은 나의 사내 위치가 첫 번째 문제.
나를 중심으로 이 두 사람이 뭉쳤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비밀이다.
이질적인 것은 배척받기 마련. 사내 파벌싸움이라는 것은 결국 영향력과 구성원의 숫자로 판가름 나는 법.
지금 나로서 일정 레벨 이상의 인물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좋아. 나 문상훈이는 이제부터 표세인 자네의 뒤에 서겠네.”
문이사는 드디어 자신의 뜻을 입밖으로 꺼냈다. 뭐,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직접 본인의 입으로 내 뒤에 서겠다고 말하니, 묘하게 가슴한켠이 울렸다.
이로서 나도 멈출수 없는 열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 쥐느냐, 무너지느냐.
이제 더는 한발 물러선 관전자가 아닌, 사내의 패권을 다투는 한 파벌의 리더가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딱히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은, 함전무 파벌을 삼킬 때까지는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 시점. 혹은 그다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시류에 따라서 신중하게 적기를 선택하는 편이 좋겠지요.”
내 존재가 수면에 가라앉아 있을수록 적들은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헤매게 될 것이다.
게다가 함전무 파벌을 흡수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판호 획득 또한 문제다.
내가 조회장이나 양실장을 떠나 그들 곁에 설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지 않으면, 나는 그 쟁탈전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수 없다.
“당분간 저와 두 분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셔야겠지요.”
“네. 마치 판호와 전무 군단에 대한 욕망으로 표세인 팀장님 스스로 저희에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두 분께서도 좀 연극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연극이요?”
“연극?”
양실장과 문이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판호 쟁탈전에 참여할 외부 스튜디오 대표들에게 각자 접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동격서?”
“이간책?”
문이사와 양실장은 동시에 각자의 대답을 말했다.
두 사람은 무엇이 정답이냐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가지 모두 맞습니다.”
“양실장님께서 말씀해주시기로 성대표는 양실장님을, 최대표는 문이사님에게 호의적인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최기환이! 예전에 한 1년 정도 함께 일한 적이 있었어. 그 친구 아주 진국이지.”
문이사는 기억을 떠올린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정훈, 성진규, 최기환은 문상훈과 양성태의 뒤를 이을 차세대 회사의 핵심인재라는 평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외부 스튜디오 대표를 거쳐, 본사 임원으로 발령받는 맥베스의 황금레일을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인물들.
“그럼 저희가 그 친구들을 포섭하는 시늉을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최기환 그 친구 오랜만이군.”
“틀렸습니다.”
나는 문이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다고?”
“서로 타겟이 반대입니다. 양실장님이 최대표를, 문이사님께서는 성대표를 회유하려 노력해 주시기 바립니다.”
“호의가 있는 쪽이 아니라, 반대를 노린다고?”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드물게 양실장 조차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각자 두분에 대한 호의만큼이나 반감도 비례한 것 같다고 하셨지요.”
“네, 종종 그런 대화를 나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흥, 건방진 녀석들······.”
좋아하는 상대의 경쟁자에게는 반감을 보인다는 점이 무척 좋다.
“진짜로 덜컥 그분들을 포섭해버리면, 오히려 곤란합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무 군단 내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혼란을 야기한다라······.”
“두 분이 포섭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전무 군단의 인사들은 성대표와 최대표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겁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들에 대한 주가가 치솟을 수도 있겠죠.”
“어느쪽이든 상관 없다?”
“예. 그런 그림이 그려진 상황이라면 대표들 사이에서도 경쟁심이 폭발하겠지요.”
“아! 반대로 관심에서 밀려난 보대표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운 심정에 놓이게 되겠군요?”
양실장과 문이사가 동시에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십니다.”
“와, 표세인 자네······. 정말 무섭군. ”
문이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일단 이 상황만 연출해주시기 바랍니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이번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겠나?”
문이사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아시게 되실 겁니다.”
뭐랄까······.
홍켓몬과 둘이서 주먹구구식으로 연출을 궁리하던 것은, 저자본 독립영화를 연출하던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큰 투자를 받고 거물급 배우들을 캐스팅해 블록버스터급 영화 제작에 돌입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양실장과 문이사라는 거물급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운 각본을 궁리하려니까······.
웃음이 날 정도로 머리가 쌩쌩 돌아간다.
‘이거 정말 재미있겠는데?’
스케일이 커진 만큼 기대감도 배가 된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