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맥베스에는 8명의 외부 개발 스튜디오가 존재한다.
각자의 목적에 맞게, 저마다 다른 컨셉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각 스튜디오의 대표들은 저마다의 지분을 별도로 보유한다.
외부 스튜디오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각자 일정이 다르며 사업 방향도 다르기에 한자리에 모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런 이들이 오늘 본사로 모여든 것은 다름 아닌 함전무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
“안녕하십니까.”
나이로 보나, 연차로 보나, 게다가 본사 직급으로 보나, 내가 가장 막내인 탓에 나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대표들에게 일일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고개만 까닥하고 지나가거나, 더러는 조금 불편한 시선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저마다 다른 이유, 다른 사정들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리라.
“흠······.”
“?”
유독 키가 큰 남자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너무 빤히 들여다 본다.
‘이 정도 키라면 최기환 대표님이겠네.’
들은 대로 선이 굵은 남성 다운 이미지에······.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남들에게 신경 안쓰는 타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도 별로 없음에도 빼어난 프로그래밍 실력과 일벌레 스타일로 성공한 남자.
문이사에게 유독 호감을 보내는 것은 과거 문이사의 밑에서 일할 때, 남들보다 배는 배포가 큰 문이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 큰 요소라고 들었다.
‘이건 너무 가까운데······.’
살짝 신변의 위협(?)까지 느껴지는 순간.
“너 뭐하냐?”
“적당히 해라, 잡아 먹기라도 할거냐?”
마침 일전에 안면을 익힌 보정훈과 성진규가 최기환에게 가벼운 핀잔을 날렸다.
“흠······.”
대답도 안하네.
“안녕하십니까.”
“네. 표세인씨도 안녕하셨어요?”
보정훈은 오늘도 훈훈한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보냈다.
그의 스튜디오는 직급을 배제한다더니, 나에게도 직급 없이 씨를 붙여서 부른다.
“그만하고 자리에 앉자.”
“흠, 흠. 그러지. 자, 여기 앉지.”
“?”
최기환은 대뜸 나에게 의자까지 빼주며 말했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뭘까,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눈치를 살피니, 보정훈과 성진규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성의를 거절할 순 없으니, 자리에 앉았다.
“흠······.”
내 옆자리에 앉은 최기환은 계속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실수했다. 그냥 떨어져서 앉을 것을······. 하지만 그것도 사실 마땅치가 않은 것이 내가 막내라고는 해도, 보정훈, 성진규, 최기환 트리오는 내 바로 위.
결국 우리 4명이 가장 막내라는 거다.
“표세인씨.”
이번에는 성대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말을 별로 못했는데, 우리 태인이 좀 어때요?”
우리 태인이?
“아, 몰랐나? 그 친구가 예전에 내 부사수였어.”
아! 그건 몰랐다.
“일 잘하고, 열정 있고, 주변도 잘 챙기죠. 삼박자 고루 갖춘 인재여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홍기도와 남궁원이 과장 승진을 하기는 했지만, 내가 갑작스럽게 빠르게 연거푸 승진해버린 탓에, 차장급이 없는 우리 팀에 권태인이 와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다소간의 기 싸움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잘해줘요. 그 친구 칭찬할수록 더 잘하는 타입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답 산뜻해서 좋네. 마팀장도 이런건 좀 배워야 하는데······. 천이사님 꽁무니 쫓는 것 반만 아랫사람들 좀 챙기지.”
아무래도 성진규는 마팀장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
이러면 안되는데, 이것 하나 만으로도 살짝 성진규에게 호감이 생길 정도다.
“···한팀장도 잘 해줘.”
“네?”
“한팀장도 잘 해주라고.”
최기환이 너무 갑자기 끼어든 바람에 대응이 좀 늦었다.
아, 이 분은 한팀장과 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오히려 제가 한팀장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둘이 친한가봐?”
“네.”
양실장과의 인연은 다소 복잡한 요소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맥베스에 와서 가장 빠르게 친해진 사람이 바로 한팀장이 아닐까 싶다.
“······보기 좋네.”
“감사합니다.”
“언제 셋이서 술 한잔 하지.”
“허!”
“술?”
최기환의 말에 보정훈과 성진규가 세상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왜들 이러지?’
한국 사회에서 밥 한번 먹자, 술 한잔하자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관용어 같은 문장 아닌가?
“너 무슨 일 있냐?”
“요즘 외롭냐?”
보정훈과 성진규가 이제는 아예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최기환을 바라보았다.
반응을 보니, 최기환이 술자리를 제안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 듯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이런 제안을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예.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보정훈과 성진규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 대답에만 반응한다.
마이웨이가 지나치다 싶은 캐릭터랄까?
‘아무래도 양실장님이 허들이 너무 높아 보이는데?’
나는 지난번 문이사에게는 성진규를, 양실장에게는 최기환을 타겟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막상 그들과 안면을 익히고 보니, 난이도가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다.
‘뭐, 진짜 포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이번 각본의 핵심은 전무 군단의 이목을 흐리고, 우리가 물밑에서 판을 조율하는 것이 본 목적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내가 전체 판도를 흔들 계획을 품고 있으리란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겠지.
그것도 양실장과 문이사 같은 걸출한 배우들까지 이용한 치명적인 각본이 아닌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전무 군단의 영향력이야, 훗날을 대비해 남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것 정도가 전부지만, 판호는 다르다.
‘중국 시장이라······.’
내가 만든 게임 중에 중국 시장 진출을 목표로 개발된 게임은 없었다.
내심 흥미가 동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드르륵.
정문이 열리자,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전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기세가 남다르네.’
‘그러게 눈빛부터가 다른데?’
회광반조랄까? 은퇴를 결심한 함전무는 전에 없이 힘과 활력이 넘쳐 보였다.
“다들 자리에 앉지.”
굳이 직급의 무게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정상에 군림한 인물다운 카리스마가 몸 밖으로 넘실넘실 흘러넘치는 것만 같다.
“다들 대강 알고는 있이리라 생각하니, 쓸데 없는 사족은 붙이지 않겠네.”
-꿀꺽.
면면들은 내심 평온을 가장했지만, 어디선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모두 긴장하고 있다.
가장 기대받는 인물들부터, 그렇지 않은 이들까지.
함전무의 위세를 눈으로 확인하니, 새삼 욕심이 동하는 것이리라······.
함전무의 후계자.
전무군단의 지휘권.
그리고 판호.
차례로 이번 일에 걸린 막대한 포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경.
다들 내심 심장이 맥동하는 것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었다.
“솔직히 현재 국내만이 아니라, 중국 시장 쪽 상황도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
이전처럼 중국 개발사들의 기술력이 낮은 것도 아니고, 한국 게임들을 벤치마킹하며 빠르게 성장한 중국 시장도 이제는 100% 성공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시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거야, 하기 나름이지.’
‘그럴 자신 없이 판호에 욕심내는 것도 웃기지.’
누구하나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사업계획서들 준비하게.”
드디어 본론이 시작되었다.
“심사는 전무님께서 직접 하십니까?”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하지?”
“?”
자신의 후계자를 선발한다며 이런 행사까지 벌이고서는 심사가 귀찮다?
“회사원은 성과로 말하는 법이야. 각자 본인들의 사업계획을 만들어서 투자자까지 물어와. 기준은 회삿돈은 단 한 푼도 쓰지 말고 오로지 외부투자금만으로 완성해야 해. 따라서 수익분배까지도 평가 기준이 되겠지.”
“!”
“!”
함전무의 말에 모두가 즉각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몇몇은 내심 감탄을 흘리기도 했다.
“함전무님 답네.”
“그러게, 이거 제대로네.”
동감이다.
오너 일가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로서의 역할을 꿈꾸는 남자답게, 정말로 훌륭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외부에서 자금을 긁어모아 스스로 이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오너 일가에게도 기죽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투자자 선정에 제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없어. 오직 대륙의 막대한 황금을 긁어모을 기획과 군자금을 확보하는 것만 신경쓰면 돼! 그 외에는 어떤 제한도 없어.”
-드르륵.
그 순간, 최기환은 벌떡 일어났다.
“···다음에 내가 연락하지.”
나에게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서는 최가환.
“저거 발동 걸렸군.”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전무님이 이정도로 흥미로운 판을 만들어 주실 줄은 몰랐잖아?”
이러니, 저러니해도 함전무님 역시 세상에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살아온 분이 아니던가?
기대이상의 무대라는 것은 나 역시도 동감이었다.
“우리도 나중에 기회되면 한잔해요.”
“최기환 저놈은 우리는 쏙 빼겠지. 정말 정이 안가는 놈이야. 그럼 우리도 먼저.”
보정훈과 성진규도 최기환의 뒤를 쫓아 회의실을 떠났다.
“다들 눈치 볼 것 없어. 시간싸움이라고, 어서들 가! 최고의 투자자를 물어오라고!”
함전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눈치를 살피던 모두가 차례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회의실 밖으로 떠났을 때.
자리에는 나와 함전무만이 남았다.
“자네는 여유부리고 있을 참인가?”
“여유부리는 것 아닙니다. 그 전에 못다한 일을 좀 마무리해보려고 합니다.”
“못다한 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전무에게로 다가갔다. 다행이 이 자리에는 나와 함전무 두사람뿐.
비록 전무와 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그런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지.
“미국에서 말입니다.”
“···미국. 음······.”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함전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결과적으로 조연준의 수작에 놀아난 덕분에 은퇴 결심까지 하게 된 것 아니겠나.
그 속이 편할 수는 없다.
아마 그가 미국을 방문했던 이유는 조연준이 조회장의 장남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터다.
평생 자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자신조차 오너일가라는 이름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 그의 은퇴 결심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무님.”
“뭔가.”
“이대로 한방 맞은 채로, 얌전히 물러나실 겁니까?”
“음······.”
무거운 신음이다. 심정이야 왜 아니겠나?
조카뻘 상대에게 제대로 농락당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마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한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그 방법 드리죠.
“제안······. 솔직히 덥썩 듣기가 두려운데? 자네도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딩동뎅!
당연히 제가 챙겨갈 몫을 계산해서 말씀드리는 거죠. 하지만, 그래서 이거 물지 않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듣지 않을 수가 없군. 솔직히 아직도 자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통에, 집사람까지 힘들게 하는 형편이지.”
서서히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예상하던 파문이 서서히 물가에 퍼져가기 시작하며, 찌의 흔들림이 눈에 들어 온다.
“그래. 말해보게. 내 경청하지.”
어이쿠, 월척이구나.
“함전무님께서 찾으시는 후계자는 오너 일가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회사의 구심점 같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 회사를 기둥처럼 떠받들어줄 그런 인재를 바라고 있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이번 기회에?”
“지난번에는 한 방 먹었으니, 이번에는 한 방 날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설마?”
“예. 회장님댁 장남. 이번에는 우리가 한방 먹이는 겁니다.”
함전무의 입가가 슬며시 늘어졌다.
“그거······. 흥미롭군.”
< 미친개는 문다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