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협상의 기본이란, 때때로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결과보다, 상대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최고의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법이었다.
문상훈은 과거 그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언제부턴가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성진규는 긴장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나쁜 일로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문상훈의 말에 성진규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두사람은 잠시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같은 회사에 속해있었다지만, 소속팀이나 프로젝트가 엮인 적이 없던 탓에 별다른 연이 없던 두사람이었다.
“요즘 어떤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그 정도면 선방하고 있는 셈이군.”
문상훈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성진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상훈의 면면을 살폈다.
‘왜 나를 찾아 왔을까? 아니, 나는 몇 번째일까?’
성진규는 머리가 복잡했다.
현재 상황에서 그가 생각하기에는 왜 보다는 몇 번째냐가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문상훈이라는 것이 걸린다.
문상훈은 사내에서 무척 독특한 입지를 지닌 남자였다.
물론 그것은 양성태 역시 비슷했지만, 두 사람은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개발팀의 에이스로 승승장구했고, 일찌감치 미래에 회사를 이끌어갈 인재로 낙점받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어딘가 파벌에 속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오만한 성품과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이 더해진 탓에 고삐를 쥐기 만만치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함전무를 비롯한 많은 임원들은 그저 한걸음 떨어져 입맛을 다셨더랬다.
하지만 결국 이상무가 자신의 오른팔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그를 영입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전무군단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막강한 경쟁파벌이 탄생했다.
하지만 표세인의 등장이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문상훈은 난데없이 이상무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양성태와 손을 잡았다.
물론 이것은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다른 동기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사내 권력 흐름에 민감한 자신이기에 여러 루트를 통해 이런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던 것.
성진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른 동기들과 자신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런 이슈에 민감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첫 번째가 아니라면······. 쉽지 않군. 추론만으로 계산하기에는 소스가 너무 부족해. 하지만 양실장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핵심을 간파하고 수를 내시겠지.’
흠모하는 양성태를 떠올리며 성진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문상훈이 그것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성실장.”
“네.”
“수 읽기에 대해 내가 조언 하나 할까?”
“조언이요?”
“사실 말이 좋아서 수 싸움이지, 듣지도 않은 상대의 속마음을 꿰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야. 그렇지 않나?”
“네. 맞습니다.”
“이따금 그런 걸 잘하는 친구들도 있긴 한데······.”
“양실장님 같은 분 말씀이십니까?”
“아! 그렇지. 그 친구도 그쪽으로는 남 못지 않지.”
성진규와는 달리, 문상훈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표세인이었다. 그래서 한 발 늦게 양성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보이지 않으면, 내 쪽으로 끌어들여서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끌어들인 다고요?”
“예를 들면 도발을 한다거나······. 아니면 빅딜을 제시해서 간을 보는 방법도 있겠지.”
“문이사님은 이런 쪽에는 관심이 없으신 편 아니셨습니까?”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 천하의 문상훈이가 그런 자잘한 수 싸움이나 할 것 같은가? 뭐 이런 느낌으로?”
문상훈은 피식 웃었다.
‘뭔가 달라졌다.’
센터장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 일까?
과거처럼 거칠고 주변을 위압하는 분위기 대신 여유와 안정감이 생겼다.
그래, 안정감!
마치 자신을 지탱해줄 버팀목이라도 얻은 것처럼 평온하며 여유가 넘친다.
‘이상무와 결별한다는 무리수까지 감행했는데, 오히려 안정감이 넘쳐 보인다. 실제로 센터장이라는 성과도 거두기는 했지만······.’
성진규는 문상훈의 지금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와 양성태는 본격적으로 손을 잡았네.”
“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본인의 입에서 직접 선포하는 것을 듣게 되니, 무언가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 누르는 느낌이다.
“문이사님과 양실장님. 맥베스의 투톱이 손을 잡으시다니······. 일대 파란이 불어닥치겠군요. 게다가 함전무님의 은퇴······. 머지 않아, 최대 파벌로 부상하는 것도 가능하시겠군요.”
이상무는 조연아의 뒤에 선 이후로 급격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가고 있다. 아마도 조연아의 주가를 위해 스스로를 그녀의 그림자로 여겨지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일 터.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로 문상훈과 양성태가 함전무의 뒤를 잇는······.
‘뒤를 잇는다?’
순간 오싹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외부 스튜디오 대표들이 판호를 따내고 전무 군단의 후원을 등에 업는 다고 한들······.’
결국, 구심점인 함전무가 없는 상황에서 그 오합지졸이 문상훈과 양성태의 쾌진격을 막아 설 수 있을까?
서로의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 아닐까?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나?”
“······저를 포섭하시기 위해.”
“아니지.”
“?!”
아니라고?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기회를 주기 위해 온거야.”
“기회요?”
“내가 자네를 포섭해야 할 이유가 뭐지? 놓쳤을 경우의 감점 요인은? 다른 경쟁자들 보다 자네의 매력은 뭐지?”
설마, 지금 이 사람······.
“마지막으로······. 나 문상훈이 눈 밖에 나고도 싶나?”
문상훈은 회유를 하려 온 것이 아니었다. 이건 협박이다!
맥베스의 미친개는 여전했다. 순식간에 안정감이니, 뭐니 하던 평온한 분위기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잘 생각해. 판호? 전무군단? 그거 가능하겠어? 아니, 그것들 손에 넣으면 나 문상훈이와 데스매치가 시작된다는 것은 기억하기 바라네.”
성진규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를 꽉 쥐었다. 함전무가 내건 눈부신 상품에 눈이 멀어서, 그 이후의 결과들을 생각지 못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나도 아직 멀었군.’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하나만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말하게.”
문상훈은 슬쩍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할애할 시간은 거의 끝났다는 듯이······.
“왜 저에게 오셨습니까?”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나?”
“그게 아니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보다는 최기환이 문이사님께 훨씬 호의적인데요.”
“내가······.”
“······.”
문상훈은 잠시 뜸을 들였다.
“나 문상훈이가 너희들 레벨의 심정까지 신경써야 하나?”
오만함의 극치랄까?
물론 이번 것은 문상훈이 의도적으로 엑셀을 세게 밟은 것이었지만, 그의 평소 이미지가 더해지면 강력한 압박감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리액션이었다.
실제로 성진규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마치, 외부계열사 대표들 전체를 짖밟아 버이겠다는 패기.
“사실, 이건으로 양성태와는 조금 의견이 엇갈렸어.”
“엇갈렸다고요?”
스스로 내부 정보를 흘리다니? 이건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자네를, 양성태는 최기환을 높게 샀지.”
“아!”
“아마, 지금쯤 최기환이는 양성태를 만나고 있을 거야.”
“그, 그런!”
존경하는 양실장이 자신이 아닌 최기환을 더 높게 평가하다니?
“자네는 기획이지. 내게는 컨텐츠적인 부분에서의 백업이 더 도움이 돼. 나도 최기환도 프로그래머인데, 이러면 그나물에 그밥이잖나. 양성태도 이런면에서는 여지 없이 비개발자 티가 팍팍 난다니까?”
어차피 이미 코딩할 짬밥도 아니면서, 은연중에 양성태를 디스하며 문상훈은 성진규의 눈치를 살폈다.
‘아, 이거 입질 오는 군.’
어디까지나 각본대로, 물론 중간에 상당한 애드리브가 더해지긴 했지만, 아마 거기까지도 표세인은 모두 예상하고 이런 배역을 맡겼을 것이다.
“성실장.”
“네.”
“내 손 잡게.”
“······.”
“연락 기다리겠네. 하지만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야. 양성태 그 친구 일처리 속도 알지?”
“네?”
“양실장이 먼저 최기환이를 데려오면, 미안하지만 우리는 연이 아니야.”
“명심······. 하겠습니다.”
성진규는 낮게 읊조렸다.
“성실장, 고속도로에서는 엑셀을 밟아야 하는 법이야.”
문상훈은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
*
*
한편, 문상훈이 성진규를 방문하고 있을 때, 그의 말대로 양성태는 최기환을 만나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군요.”
최기환은 머리를 긁적이며 시력 보호용 안경을 벗었다.
“왜 오셨습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무척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앞에선 양성태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최기환 실장님께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아니요. 관심 있으십니다.”
“?”
최기환은 황당하다는 듯이 양성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회유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물론 스스로의 위압적인 이미지 탓에 다른 동기들이나, 다른 스튜디오 대표들에 비해 횟수는 상대적으로 적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도 이따금 회유의 손길을 내뻗는 이들은 존재했다.
“왜 제가 관심이 있으실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제 제안이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양성태의 말에 최기환은 멋쩍게 턱을 긁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상대의 제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지레 짐작하는 것도 우습다.
양성태의 평소 소문 중에는 상당히 음흉한 것들도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고 말았다.
수 싸움이니, 정치놀음이니 하는 것들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다소 방어적으로 행동했다.
“실례했습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공손하지는 않아도 한발 물러나는 정도의 사회성은 있다.
양성태는 새삼 최기환이라는 인물이 다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공격성만 따지고 보면 최기환은 문상훈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타고난 큰 체격과 퉁명스러운 태도가 더해진 탓에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최기환은 딱히 공격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이번에 함전무님께서 판호를 상품으로 거셨습니다.”
“예. 정말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최기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판호는 판호죠.”
“?”
“무슨 상황이건 판호라는 것은 개발자들에게는 입맛이 당길 수 밖에 없는 아이템이 아닙니까.”
“······개발자 마음도 꿰뚫고 계시는 군요. 역시 양실장님이십니다.”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모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런 대응에 질려서 물러나거나 심기가 불편한 티를 드러내겠지만······.
‘정말 마음에 안드는군.’
최기환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양성태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상대를 간파하고 밀당하는 것으로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양성태라는 사람과 자신은 끝과 끝에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대화를 나눈 적도 없기에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역시나 거북하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저와 최기환 실장님은 참 닮은 구석이 많은 타입입니다.”
“네?”
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자신과 양성태가 닮았다니?
얼굴 선에서 체격까지 같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전혀 공감이 안됩니다만?”
“각자 딱 필요한 일만 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이를테면 저는 지금까지 파벌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얼마전에 직접 파벌을 꾸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는 최기환 실장님도 이번에 판호를 노리고 계시죠.”
“판호는······.”
“판호일 뿐이다? 전무 군단의 후원은 무시할거다? 정말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은 후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최기환이지만, 그 정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음······.”
“저는 이번에 문이사님과 손을 잡았습니다.”
“문이사님과요?”
“예. 앞으로 파벌을 이끄는 일은 그분께 넘기고 저는 소소하게 내부를 챙기거나 제 할 일에 전념하게 되었죠.”
“원래 양실장님의 파벌 아니었습니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잘하는 분야가 있고, 맡은 바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결과가 중요하지 다른 사소한 것들이야,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마, 맞습니다.”
최기환은 저도 모르게 동의해버렸고, 그 순간 양성태의 눈빛이 반짝였다.
“제 제안은 반드시 최기환 실장님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그렇고요. 우리 좀 서로를 도와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도움이라는 말에 최기환은 움찔했고, 그 순간 양성태의 미소가 아주 조금 짙어졌다.
그렇게 문상훈과 양성태, 두 거물이 표세인의 각본에 따라 사냥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
*
*
‘지금쯤, 양실장님과 문이사님, 두분 모두 각자 먹잇감을 사냥하고 계시겠지?’
나는 각각 진영으로 보내놓은 문이사님과 양실장님을 떠올렸다.
“워낙 빠방한 배우진이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이정도 배우풀을 움직여본 것은 처음이라서 살짝 두근두근하다.
“지금 뭐라고?”
내 혼잣말에 곁에 있던 한팀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제 걱정이나 해야죠.”
“표팀장이 여기서 제일 걱정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한팀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 봬도 각본가의 고뇌란 것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만 각 보고 있습니다만······.
< 승진 시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