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진짜 제가 이래서 최실장님이랑 엮이기가 싫은 겁니다. 이 상황에 이 멤버에 더치페이가 가당키나 합니까?”
“아니, 요즘 문화가······.”
“여기에 과장급도 있습니다. 안 창피하세요?”
정작 과장급인 홍켓몬은 전혀 신경도 안쓰고 있다.
아마도 이놈은 절대로 제 지갑이 열릴 일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겠지.
정작 당사자는 신경도 안 쓰고 제일 비싸고 맛있는 메뉴 찾기에 골몰하는 와중에 한팀장은 멈추지 않고 최기환을 몰아갔다.
“애초에 이 자리가 단순 친목도모도 아니고, 게다가 최실장님 본인이 마련하신 자리 아닙니까?”
“그래······. 너 좀 없어보이긴한다.”
성진규도 최기환에게 찝찝한 시선을 보냈다.
“그럼 그냥 내가 낼게.”
“아닙니다. 저도 보태겠습니다.”
차마 나이로 아래에서 두 번째인 내가 전부 내겠다고 하면 모양새가 이상할 수 있으니, 나는 냉틈 성진규의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럴순 없지. 명수 말대로 내가 불렀으니, 내가 내지.”
“당연하죠.”
“그래. 그럼.”
“······.”
최기환은 뭔가 굉장히 서운하다는 얼굴이었다.
뭐랄까, 별것 아닌 꽁트였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대화였다.
의외로 이런 소소한 일상적인 대화에서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기 마련이지 않나?
최기환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살짝 높아졌다.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는 사람.’
확실히 양실장 보다는 문이사를 선호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윽고 홍기도가 주문한 술과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우리는 가볍게 잔을 나누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최기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는 가벼운 대화나 해보자고 마련한 자리야.”
가벼운 대화라······.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한팀장은 ‘퍽이나?’ 라는 눈빛이었고, 성진규 역시 미덥지 않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홍기도는······.
-냠냠 쩝쩝.
너 나 대신 작전 수행하러 온 거라며? 이놈은 아예 대화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말인데, 양실장님이 내게 손을 내미시더군.”
“큽! 쿨럭, 쿨럭.”
최기환의 말에 놀란 성진규가 술을 들이켜다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했다.
“너 왜 그러냐?”
“왜 그러긴, 이 정신 나간 놈아, 가벼운 대화나 해보자더니, 바로 그 주제를 꺼내냐?”
“가볍게 대화하면 되잖아. 심각하지 말자고.”
아, 가벼운 대화라는 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그렇지만 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다. 괜히 술들어가서 인사불성인 상태로 논의하기 보다는 차라리 멀쩡한 상태로 중요한 용건을 논의하는 편이 낫다.
“이게 가볍게 나눌 수 있는 주제냐?”
성진규는 볼맨소리를 냈지만, 정작 최기환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이 주제 문제 있어?”
“아니요. 나쁘지 않죠. 어차피 저희에게 있는 공통 주제라고는 그것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애초에 함전무의 은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모일일도 없었을 인연이다.
“뭐 표팀장이 괜찮다면, 할 수 없지. 그래서 양실장님이 뭐라고 하시던?”
성진규는 넌지시 최기환의 속내를 떠보려 했다.
“그전에 우리가 패는 맞춰봐야지? 내가 양실장님이라는 패를 꺼내 들었는데, 설마 공짜로 포커테이블에 의자 붙이겠다는 것은 아니지?”
최진규의 말에 성진규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문이사님이야.”
“문이사님이 너를?”
“양실장님이 널 찾아간 것은 안이상하냐?”
“아무리 그래도······.”
“뭐가 아무리 그래도야.”
최기환과 성진규는 복잡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양실장님과 문이사님은 확실하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 두 사람을 확실히 흔들어 놓은 것 같다.
오가는 눈빛 속에 우려와 의심, 기대와 흥분이 섞여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의 심정이 현재 얼마나 복잡한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좋아. 너는 통과.”
“그럼 제 차례입니까?”
“그래야지.”
이번에는 성진규도 최기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도 뭔가 패를 꺼내야 할 것 같은 상황.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냉큼 패를 오픈하는 것도 재미 없지.’
나는 살짝 망설이는 듯이 손바닥을 비볐다.
“저도 마침 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꺼낸 카드에 걸맞는 수준이겠지?”
만약 허접한 것이라면 곤란하다는 말투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제 쪽이 좀 손해라고 느껴지는걸요?”
“손해?”
“확실해?”
천하의 양실장과 문이사가 언급된 상황에서 그 이상의 패를 들고 있다고 하니, 모두가 동시에 당황했다.
“물론이죠. 그러니 걱정 말고 말씀하세요. 만약 제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못 미친다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다들 한껏 집중한 분위기.
이럴 때 긴장감 유지 못시키면 재미 없지.
“제 패가 기대에 못 미치면 저 깔끔하게 판호 포기하겠습니다.”
“!”
“!”
모두가 놀란······. 아니, 안주빨 세우느라 여념이 없는 홍켓몬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표, 표팀장.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이런 큰일을 그렇게 장난스럽게······.”
“그만큼 자신이 있단 거겠지.”
“기대되네······.”
당황한 한팀장과는 달리, 최기환과 성진규는 정신을 차리고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입니다. 저 자신있습니다.”
“곁에서 가깝게 지내다 보니, 양실장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나 본데······.”
“멀리 미국에 계셔서 문이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나 본데 모르나 본데······.”
성진규와 최기환이 동시에 말을 하다가 서로를 뻔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급이 안맞지. 문이사님은 이사에 센터장이야. 차기 상무보 1순위시라고.”
“너야말로 뭘 모르는 소리지. 원래 비서실장은 두 끗발 위로 치는 거 모르냐? 회장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분이시라고.”
“양실장님 이번에 센터장이시라니까? 한끗발 차이가 아니야.”
“그래. 두 끗발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문이사님은 애초에 그 성격 때문에 크게 되기 어렵다고 말들 많은 것 모르냐?”
“성격 남자답고 화통하지. 그리고 남들 눈치나 살피면서 사내정치에 매달리는 게, 잘하는 거냐?”
이건 또 무슨 분위기야? 각자가 문이사와 양실장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거 장난 아닌데?
“분위기 왜 이렇게 험악하지?”
한팀장도 놀란 분위기였다.
“쩝쩝, 이거 드셔 보세요. 꿀맛임.”
“지금 그거나 먹고 있을······. 때네. 한팀장님도 좀 드세요.”
“어?”
“어차피 열이 좀 식을 때까지 저희는 할 일도 없잖아요.”
“한팀장님 이거 드세요.”
“오, 고맙다. 이게 맛있냐?”
“아니요. 제가 그걸 별로 안좋아 해서요.”
“······이게 어른 한테!”
나는 한팀장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급히 정의의 꿀밤을 날렸다.
“저, 저도 어른인데요?”
“나, 나 그정도 나이는 아냐.”
동시에 두 사람 모두에게 원망을 사고 말았다.
홍켓몬은 그렇다치고 한팀장님에게는 죄송해서 거듭하과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최기환과 성진규의 랩배틀도 막을 내렸다.
“그래서 양실장님이 뭐라고 하시든?”
드디어 중요한 안건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그게······.”
“음! ······죄송합니다. 이게 너무 맛있어서 그만. 여러분도 드셔보세요.”
“······네가 그릇에 담아드려.”
“네.”
나는 혼내는 것도 포기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찾아오셔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보는 것이 어떻냐고 하시더군.”
“도움?”
“그래. 솔직히 내가 부족한 부분들이 있고, 양실장님은 그 부분들을 충분히 보완해 주실 수 있지. 그렇게 손을 잡으면 서로 윈윈이라는 거야. 솔직히 처음부터 고까운 태도를 보였는데도······.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군.”
역시 특급배우 양실장님 다운 솜씨로 까다로운 최기환을 제대로 구워삶아 놓으셨다. 솔직히 난이도 면에서 양실장님께 다소 불리한 매치업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완벽하다.
“역시 양실장님이시네. 그래. 그랬어야지.”
“넌 뭐가 달라? 이제 네 차례야. 문이사님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최기환의 말에 성진규는 슬쩍 잔을 비웠다.
“나는 너와 정반대야.”
“반대라니?”
“나는 회유가 아니라 협박을 받았어.”
“협박?”
협박이라는 단어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이상하다? 내가 분명 시늉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협박을 주문한 적은 없었는데?’
때때로 배우의 에드리브가 감독과 각본가의 두통거리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설마 이렇게나 정반대로 행동했다고?
“자세히 말해봐. 이해가 안 된다.”
“뭐 처음부터 협박을 하신 것은 아니야. 처음에는 손을 내미셨지. 하지만 뭐랄까, 다들 알잖아. 문이사님. 성격.”
“그래. 카리스마가 정말 끝내주지.”
“···뭐 그걸 카리스마라고도 할 수 있겠지. 어쨌든 손을 내미시다가, 갑작스럽게 테세를 전환하시더군. 내 손 안잡으면 물어 뜯는다. 뭐 그런 느낌이었지. 솔직히 대화 내내 숨이 막혀서 어버버하는 사이에 대화가 끝났더군.”
“그래서 어쩔건데?”
“솔직히 문이사님의 손을 잡는 것이 내키지는 않는데······. 거절하기에는 후환이 두려워.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역시 멋지군.”
“뭐가 멋지냐? 너야 말로 어쩔건데? 양실장님이 그렇게까지 나오셨는데, 넙죽 감사합니다하고 쫓아야지.”
“뭐, 나쁜 제안은 아니긴 한데······.”
잠시 긴장했지만, 역시 문이사님도 급에 걸맞게 완벽한 일처리를 보여주신 모양이다. 회유를 이렇게 하는 방법도 있구나 싶다.
물론 때와 장소, 상대에 따라 사용처가 극명하게 갈리는 방식이라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큰거 하나 배웠다.
“그래서, 이제 그만 그쪽도 썰을 풀지?”
“우리는 다 털어놓았어. 이제 패를 맞춰봐야지.”
성진규와 최기환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한팀장 조차,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었다.
“말씀드리죠. 저는 반대로 제가 찾아갔습니다.”
“누구를?”
“함전무님이요.”
“뭐?”
“잠깐! 그거 반칙이잖아!”
너무 예상외의 패가 튀어나왔기 때문일까? 최기환은 등받이로 팍 몸을 젖혔고, 성진규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규칙 같은 것이 있는 게임이었습니까? 요건은 중국시장에 먹히는 기획준비해서 투자자 물어오라는 것이었잖습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점을 찾을 수는 없을 거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제 패는 충분하죠?”
“······놀랄정도로, 충분하다 못해 넘칠지경이군.”
“머리가 좋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건 뭐 기상천외하네.”
설마 문제 출제자와 손을 잡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겠지.
사실 이것도 조연준의 등장 이슈덕에 함전무에게 내밀 카드를 손에 넣었다.
이래저래 요즘 무서울 정도로 운이 좋다는 느낌이다.
“일단 이걸로 서로 상황은 파악한 것 같은데, 이제 레이스입니까?”
“레이스?”
내 오픈 카드가 제일 쎄니까, 내가 레이스를 시작하는 것이 맞겠지. 최기환과 성진규도 그저 멍하니 내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저희끼리 1차전 치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1차전?”
“네.”
“자세히 말해보지?”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다. 본능적으로 내 제안이 손해날 것이 없음을 깨달은 것 같다.
맞다. 손해 날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내가 무조건 이기는 판이고, 나는 지금 두 사람에게 떡고물을 제시하려는 참이니까.
“우리 셋이서 먼저 한판 붙은 다음, 결과가 가장 좋은 사람에게 올인하는 겁니다.”
“올인?”
“각자 투자금 확보하실 것 아닙니까?”
“허······. 허허······.”
성진규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고, 최진규는 술잔을 연거푸 두 잔이나 비우고 손으로 입술을 슥 닦았다.
“포인트는 무조건 우리 셋중에 승자가 나오게 하자는 겁니다.”
자신 없으면 빠져도 됩니다. 그 정도 배포도 없는 사람을 회유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문이사와 성진규가 합작해서 투자금 마련하고, 양실장과 최기환도 마찬가지로 투자금을 마련한다.
거기에 내가 함전무와 함께 조연준의 지갑을 털면?
아마, 깨비몬에 버금가는 개발비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벌써부터 설렌다.
이번에는 어떤 게임을 만들어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