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27화 (127/346)

127.

“그러니까 힘겨루기 같은 것 하지 마시라니깐.”

한팀장은 최기환을 바라보며 탐탁지 않다는 듯이 혀를 찼다.

딱히 친목도모 모임이 아니었기에, 1차가 끝나고 2차로 향한 인원은 최기환과 한팀장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센거 아니냐?”

대게 사무직들이 그렇듯이, 터널증후군을 비롯해 이래저래 근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최기환 본인은 틈틈이 헬스장을 열심히 다니며 몸을 관리해왔다.

그런데,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봉제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꺾어버렸다.

“뒤늦게 헬스장 좀 들락거렸다고, 어려서부터 일평생 운동만한 친구랑 그게 되겠습니까?”

한팀장 본인부터가 대뜸 힘자랑 목적으로 악수까지 청했었더랬다. 그런데도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기억 못 한다고, 그저 핀잔만을 쏟아냈다.

“······쯧, 말 좀 해주지.”

“말했거든요?!”

한팀장은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빽 소리쳤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째?”

“표팀장 제안 따르실 거죠? 부끄럽게 팔씨름까지 하고서는 이제 와 발 빼시면······.”

“낯부끄럽게 어떻게 그러냐.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지. 그리고 처음부터 말했듯이, 나쁜 제안도 아니고.”

“다행이네요.”

어찌 됐건, 표세인의 라인인 한팀장의 입장에서는 최기환이 엇나가지 않고, 순순히 표세인의 계획에 보조를 맞춰주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최기환은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한팀장이 2차까지 따라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너 표세인 팀장과 정확히 무슨 관계냐?”

“관계라니요? 직장 동료죠.”

한팀장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그것뿐이야?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사양하겠습니다.”

“사람 서운하게······.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러기냐?”

“사양하겠습니다.”

“······알았다. 하지만 너 큰 기회 놓친 거다. 내 쪽에 붙으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확실하게 부장 승진 시켜주려고 했는데······.”

내년? 내후년?

한팀장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나 표세인이 답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보다 표세인 그친구, 믿을 만하냐? 뒤통수치고 그러는 것 아냐?”

“뒤통수 진짜 찰지게 때리는 타입이죠.”

“뭐?”

“물론 상대가 딴마음을 품었을 경우에 한해서요. 최실장님 그런 생각 없으시잖아요. 그렇죠?”

한팀장이 답지 않게 눈을 가늘게 뜨고 최기환의 의중을 살폈다.

그 모습에 최기환은 어이가 없었다.

“너 많이 변했구나.”

“많이 늦었죠.”

“그래. 보기 나쁘진 않네.”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 이상으로 주변 관리를 결벽적으로 하지 않던 한팀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팀장이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해있었다.

‘아니지, 원래부터 제 식구는 끔찍이 챙기는 녀석이었으니까.’

좋은 상대를 만난 거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관계 덕분에 자연스럽게 가장 좋은 형태로 한팀장의 기질이 발달한 것이리라.

정치적인 능력은 둘째치고 한팀장은 누군가를 배신할 바에야 스스로 뒤집어쓰는 것을 택할 남자다.

자신도 그런 점 때문에 눈여겨보고 있었다. 경쟁자 따위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덜컥 표세인이라는 녀석이 등장해버렸다.

“뭔가 좀 미운데······.”

“뭐 보는 사람 마다 다를 수는 있죠.”

“그 놈은 뭐 약점 같은 것 없다냐?”

“하나 있죠.”

“뭔데?”

“표팀장 동생이 올해 신입으로 들어왔거든요.”

“오! 그래? 그러면······.”

“세종이 내 새낍니다.”

“······그러면 잘 키워주라고.”

“······.”

“너 진짜 자꾸 서운하게 그럴래?”

“······.”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기질 하나, 팀장으로서 자신의 팀원들에 대한 공격은 최기환이 아니라 함전무가 나서도 가시를 바짝 세우고 맞설 타입이 바로 한팀장이라는 남자가 아닌가?

“재미 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래서 계획은 있으신 겁니까?”

“무슨 계획? 아, 판호?”

“네.”

“뭐야, 염탐이냐?”

“에이, 이런건 말 안하죠.”

다른 소속 사람을 어떻게 믿겠냐마는, 한팀장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최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딱히 대단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나야 그냥 정통파지.”

“정통파? 그럼 수집형 카드게임?”

“그렇지. 뭐니, 뭐니해도 유저 반응 좋고, 캐시 수급력 확실하고.”

“흐음······.”

“뭐냐, 그 반응은?”

“예전이라면 저도 동의했을 것 같은데······.”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냥 좀 심심하다는 느낌?”

“심심해?”

“저나 실장님이나, 결국에는 프로그래머 출신 아닙니까.”

“그렇지.”

“우리는 오랫동안 코딩 깔끔하게 떨어지고, 맨파워 충분한가, 뭐 이런것들만 고민하잖아요?”

“당연한 말을 뭐하러해? 무슨 말을 하려고?”

“예전에는 그것만 생각하다 보니, 기획자들은 항상 허무맹랑한 소리만 한다는 느낌도 있었거든요?”

왜 아니겠나? 당장 한팀장만 하더라도 기획 잡아먹는 귀신이라 불렸었다. 최실장 역시 일개 프로그래머 출신이던 시절에는 그못지 않았다.

“우리도 그 짓을 계속하다 보니, 눈도 트이고 손도 빨라지고 뭐, 이렇게 저렇게 레벨업을 하잖아요?”

“그래. 그게 왜?”

“그럼 기획은 어떨까요?”

“어?”

“그쪽은 반대로 먹힐만한 요소, 참신함 이런 쪽만 주구장창 고민하며 머리가 굵기 마련인데, 요즘 표세인 팀장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 와, 이런 쪽으로는 정말 상대도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잖아요? 서울대 이등병도 결국에는 이등병이다 이거죠.”

“우리가 그래도 게임 개발한 짬밥이 얼만데.”

“뭐 그렇긴하죠.”

경력있는 기획이라고 누구나가 감탄할만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오랜 시간 한가지만을 고민해온 이들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표세인 팀장이 준비하는 건은 뭔데?”

“저도 모르죠.”

“너 치사하다?”

“아니요. 진짜 몰라요. 아마 엄청난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깨비몬만해도 그렇다.

국내 개발사 중 어떤 곳도 이만한 캐릭터 게임에 도전한 사례는 없었다.

표세인은 접근하는 틀이 다르다.

한팀장의 말을 듣고나니, 최기환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실장님.”

“왜?”

“나중에 표세인 팀장이 손 내밀면 그냥 잡으세요.”

“뭐?”

“솔직히 실장님과 척지기 싫으네요. 그리고 실장님 무너지는 모습도 보기 좀 그렇고.”

“내가 무너져? 뭔가 착각하나본데, 아직 표팀장이 그정도 급은 아니지. 문이사님이나, 양실장님도 이번에 새로운······.”

“그거 기만책입니다.”

“기만책?”

“문이사님은 몰라도, 양실장님은 표세인 팀장 뒤에서 다른 꿍꿍이 준비할 사람이 아니에요.”

“반대 아니냐?”

차라리 대쪽 같은 문상훈이라면 모를까, 양성태는 애초에 다소 음흉한 구석이 있지 않나?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에요. 적어도 표세인 팀장의 문제에 한해서 양실장은 어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으음······.”

듣고 보니, 양실장은 자신에게도 표세인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언급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현재 상황상 자신과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다. 게다가, 그 문제조차 문이사와 의견이 맞지 않은 것 뿐이라고 했었다.

“내가 지레짐작했군.”

최기환은 솔직히 인정했다. 이런 점이 최기환의 매력일 것이다.

한팀장은 동의한 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도 의리로 말씀드린 겁니다. 어쨌든 기억하세요. 기왕이면 적이 되지 맙시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

*

*

*

“이, 이건······.”

차세대 삼인방 중의 하나인 보정훈은 자신만 쏙 빼놓고 회동을 가진 최기환과 성진규 그리고 표세인의 사진을 보며 당황했다.

“무슨 일 있나?”

천이사의 말에 보정훈은 급히 스마트폰을 숨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이사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자신만 다른 이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신세라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다.

가만히만 있어도 알아서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일을 굳이 상대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지 않나?

‘성진규······. 이녀석 나에게 먼저 손잡자고 하더니······.’

물론 자신이 상황을 보기 위해 슬쩍 발을 빼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신만 빼고 세명이서 뭉치는 사진을 받게 될 줄이야.

물론 이것만으로 섣부른 짐작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기환이라니······.

안 그래도 지난번 최기환이 그 답지 않게 표세인에게 술자리를 제안한 것부터가 별일이다 싶었는데······.

‘참, 성진규 너도, 너 답다.’

굳이 초대받지도 않은 자리를 좋다고 찾아간 것도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우리가 자네를 가장 눈여겨 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네.”

“감사합니다.”

성진규와 최기환은 지닌바 기질이 너무 튀는 탓에 다소 평범한 자신의 주가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최기환이나,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을 가늠하는 성진규에 비해 자신은 적당히 사교적이고, 적당히 정치적이다.

그 중도적인 성향이 높은 분들에게는 더 좋게 보이는 것은 보정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닌데, 굳이 잔소리꾼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나?’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스스로의 힘으로 판호를 따낸 이후 이들과 관계를 새롭게 가져가는 편이 좋다.

이 상태로는 별다른 도움도 없이, 자신들 덕이네, 어쩌네 하면서 귀따가운 공치사를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상황에서 제가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시장 공략에 적합한 기획을 준비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투자자를 구해오는 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다.

‘물주라도 하나, 소개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임원들이니, 연줄이야 많을 것이다.

그것 하나 기대하고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물론 자네의 관심사는 그거겠지. 그리고 안심하게 설마 내가 그 정도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자네를 불러들였겠나?”

천이사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보정훈은 다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역시 공치사가 여간이 아니겠어. 나중에 귀에 딱지 앉게 생겼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뜰 생각은 없었다. 천이사가 소개해주는 물주의 수준이 어느정도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럼 소개하지.”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며 예상보다 다소 젊은 남자가 등장했다.

키는 평균 보다 약간 작고 깡마른 몸에 묘하게도 오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개하지, 월스트리트에서도 제법 이름난 주식 브로커로 활동중이신······.”

“제 소개는 제가 하죠.”

“그, 그러시죠.”

뭐지? 보정훈은 천이사가 당황하는 모습이 무척 의아했다.

주식브로커라고는 해도 자신과 비슷한 연배거나 그 아래로 보이는 남자에게 천이사가 쩔쩔맬 필요가 뭐가 있나?

하지만 보정훈은 곧바로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조연준이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조회장님의 장남이지요.”

“아······.”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보정훈이 당황하자, 조연준의 오만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한가지만 묻지요.”

“네. 말씀하시죠.”

“표세인······. 이길 수 있습니까?”

갑자기 표세인?

보정훈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

*

*

“회장님께는 말씀드렸네.”

“뭐라고 하시던가요?”

함전무의 말에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의 장남을 상대로 일을 꾸밀 계획이다.

조회장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허가를 받지 않았다가는 후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쎄게 하라더군.”

“네?”

“아주 쎄게하라고 하시더군.”

“아!”

역시 가족 관계를 떠나서, 자신의 후계자인 연아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딱히 관계가 좋지도 않아 보이긴 하지.’

제임스와는 다소 서먹하다는 느낌이었던 반면, 조연준을 언급할 때의 조회장의 표정은 짜증과 분노가 한데 섞인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 시점에 내가 그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중요한 것은 회장님이 쎄게, 그것도 아주 쎄게 해도 된다는 지령(?)을 내리셨다는 거다.

나는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래서 이제 준비는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뭐부터 시작하면 되나?”

함전무도 몸이 달아오른 것 같다. 자신의 처지를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몰아넣은 조연준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데야, 끓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겠지.

“조연준은 주식 브로커죠.”

“그렇지.”

“본인도 돈꽤나 들고 있겠지만, 그 액수야 대단치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수수료나 떼먹는 신세다. 많아야, 수십억에서 백억 정도겠지.

물론 그것도 일반인 기준에서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지만, 돈 천억이 우스운 요즘 게임 개발 규모를 생각할 때는 푼돈이나 다름 없다.

“조연준의 지갑 한번 털어보죠.”

“지갑을 털어?”

“네. 아주 그것도 탈탈.”

돈믿고 설치는 녀석에게는 돈을 털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복수가 아니겠나?

“이거, 이거······.”

“?”

“정말 말만 들어도 신나 죽겠군.”

기간 한정 아이템(함전무)은 시동을 걸 준비에 돌입했다.

< 첫번째 고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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