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미스터 조. 왜 맥베스에 직접 투자하지 않은 거지?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에는 미심쩍은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하비 로스.
북미 철강 업계 대주주의 사생아로 자신이 물려받은 막대한 자산을 토대로 각종 투자를 반복하며, 자산을 증식시켰다.
그리고 그 투자의 핵심에는 조연준이 있었다.
조연준은 냉정하다 못해 비정할 정도로 기업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으로 투자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비가 이끄는 투자자 집단 중에서 조연준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많았다.
특유의 오만함이랄까? 장난식으로 던지는 말 한마디에 사람의 기분을 엉망으로 망치고 그것에 기뻐하는 성정.
만약 우수한 실적이 아니었다면, 하비 본인도 조연준과의 관계를 진작에 끊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맥베스 아메리카에 접근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다.
어찌 알고 있던 것인지, NFT와 깨비몬이라는 핫한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정상적인 접근방식.
하지만 갑작스럽게 맥베스 본사를 손에 넣겠다며, 의문스러운 행보를 일삼기 시작했다.
깨비몬 발표 이후 맥배스 주식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그러나 조연준은 뜸을 들이고 있다.
하비는 물론이고 그가 이끄는 투자 집단 전체가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
“미스터 하비. 내 투자 방식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겁먹은 개처럼 굴지 말라고.”
또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마치 자신이 손절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투다.
-많은 이들이 이번일에 우려하고 있어. 투자자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은 해야 하는 것 아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과도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알잖아? 중요한 것은 실적이야. 믿고 지켜보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꿀을 바른 것 같은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기꾼들은 많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조연준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위화감이 커진다.
-좋아. 지켜보지.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확실한 실적이 동반되지 않으면 곤란해.
“어차피 실적이 떨어지면 바로 손절할 생각 아닌가? 협박 치고는 너무 웃기잖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다는 식의 격언은 비단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격언은 미국에도 존재한다.
차가운 비즈니스의 세계라고 해도, 인간 적인 정이 완전히 배재되는 것은 아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계속 지지하고, 결국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미담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조연준은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통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그는 혀를 찼다.
“웃기지도 않는군. 나보고 그쪽 비위나 맞추라는 건가?”
하비의 걱정 어린 충고도 소용이 없었다. 언제나 그런식이었다.
조연준은 누군가의 조언을 자신의 방식 말고는 소화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연락 온 것은 없나?”
조연준은 곁에 있던 거구의 사내에게 물었다.
토마스는 마커스에게 소개 받은 남자로, 과거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거구였다.
현재 그는 조연준의 경호원이자, 비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건 있습니다.”
“호오, 생각보다 빠른데?”
조연준은 보정훈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사려 깊고 침착한 성품, 하지만 조연준의 기준에서는 다소 패기와 결단이 부족한 인물.
“애초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문제가 있어. 사고가 그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초 단위로 희비가 교차하는 주식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기 때문일까?
조연준은 누구보다 빠른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런걸로 치면 역시 그녀석은······.”
조연준은 표세인을 떠올렸다.
첫만남 당시부터 조연준의 신경은 온통 표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미튜버를 준비하고 자신의 심기를 톡톡 건드린 후에 쐐기를 박듯이 주가를 폭발시켜버린 녀석.
완전히 농락당했다.
자신을 비웃으며, 게임 업계의 특성을 운운하던 표세인의 눈빛을 떠올리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만나자는 것 아냐?”
“맞습니다.”
“그럼 만나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표세인과 함성준에게······.”
“잠깐 누구?”
“표세인과 함성준. 맥베스 인사들이 미팅을 요청해왔습니다.”
보정훈이 아니다?
“잠깐 기다려.”
조연준은 잠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저들이 자신을 방문할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그들과 만나서 발생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문제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며 경우의 수를 따져본다.
“문제 될 것은 없군.”
지난번과는 달리, 당장 주식이 물려있는 것도 아니며 깨비몬 발표 같은 깜짝 쇼는 연달아 준비할 수 있는 수가 아니다.
“지금 그들 도착해 있나?”
“네. 호텔 로비에 도착해 있답니다.”
연락과 동시에 호텔에 들이닥쳤다? 이건 자신이 만날거라 확신한다는 듯한 움직임이 아닌가?
‘신경쓰이는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당장 보정훈을 포섭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좋아. 식당으로 오라고해.”
조연준은 넥타이를 조였다.
*
*
*
“만약 조연준이 거절하면 어쩌지?”
함전무는 귀한 골프 약속까지 취소하고 조연준을 만나기 위해 나와 함께 대동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약속을 잡고 나선 것이 아니라서, 조연준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모양.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조연준은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우리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으니까요?”
“?”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것은 조연준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애가타는 상황이라고 여겨질테지요. 조연준 성격이라면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결코 발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콧노래라도 부르고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함전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참 뭐랄까······. 영특하군.”
“그렇습니까?”
운동할 때도 영특하다는 말은 종종 들었었다. 하지만 그때는 딱히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눈썰미 같은 것에 치중된 느낌이었는데, 오히려 나이를 먹은 후에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평소 부모님의 가르침 덕인가? 그런 성향은 쉽게 길러지지 않는 법인데······.”
“으음······. 제 부족한 동생놈을 보면 딱히 부모님 영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와는 다르게 남들 눈치 같은 것 전혀 개의치 않고 속편이 사시는 분들이거든요.”
“자네도 남들 눈치를 보나?”
함전무가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엄청나게 주변을 살피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티가 나는 것이 걱정이어서, 허세도 많이 부렸고······. 덕분에 피곤하게 지냈습니다.”
“하하, 그거 의외군. 자네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호탕한 타입이라고 생각했어.”
“아닙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운동이란 경쟁이고, 아시다시피 한국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어려서부터 저보다 몇 살 많은 우수한 선수들과 겨루어야 한 탓에 눈치 엄청 살폈습니다.”
상대의 역량과 컨디션을 가늠하고 상황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
더러, 생각 없어 보이는 선수들 조차 본능적으로 이러한 계산을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이런 능력 없이 타고난 제 능력 하나로 성과를 거듭하는 것은 아주 어릴 때나 통하는 일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상대의 역량은 갈수록 높아지는 법이다.
나 역시 그 고단한 삶 속에서 그것을 깨우치고 연마했다.
“그거 괜찮군. 우리 손주도 운동 좀 열심히 시켜봐야겠어. 자식놈들은 그저 학원, 학원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어릴 때는 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그래도 역시 공부가 더······.”
우리가 이렇게 한가한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체중이 150kg은 거뜬히 나갈 것 같은 검은 피부의 거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미스터 조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우리는 거구의 사내를 쫓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한가한 편이었다.
그리고 창가쪽 자리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던 조연준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니, 차분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멀쩡한데?’
조회장님을 시작으로 제임스와 연아도 그렇듯이 저들 가족은 선이 얇고 단아한 외모다.
겉으로만 봐서는 준수한 외모의 남자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으려나?”
나는 그렇다 치고 함전무님은 아버지뻘인데도 특유의 이죽거리는 표정을 드러낸다.
그래, 가끔 있지. 입 열기 전까지만 이미지가 좋은 사람들이······.
“음······.”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한국까지 오셨으니 얼굴이나 한번 보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함전무가 아들뻘인 조연준과 각을 세우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서,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우리가 그런 사이던가?”
“딱히 별일도 없었지 않습니까?”
“윽······.”
내 말에 조연준이 움찔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계획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니, 욱 할만도 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잖나?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시다? 기껏 여기까지 방문하신 인사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안중에도 없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그냥 지난번 일이 그리 큰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우리 관계는 앞으로가 중요하다. 뭐 이런 말씀을 드리려는 거죠.”
“크으윽······.”
아, 재미있어서 너무 긁었나? 의외로 조연준이 리액션이 좋은 탓에 나도 모르게 계속 툭툭 건드리게 된다.
나보다 형이라고 알고 있는데,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겉과 속이 다른 아시아 문화와는 다르게, 반응이 다소 즉각적이라는 느낌이다.
“내 속을 긁으려고 굳이 어려운 발걸음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조연준은 가까스로 화를 삭혔다. 하지만 아직도 입가가 부르르 떠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좀 아쉽네, 간만에 찔러볼 만한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인데······.
아마도 홍켓몬에게 찔러보라고 지시했으면, 열폭해서 터져버리지 않을까?
이런건 그녀석이 진짜 잘하는데······.
“보정훈 대표에게 접근하셨다지요?”
“그래. 마침 투자자를 찾는다며? 왜 설마 투자자에도 자격 요건이 있다, 뭐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요. 돈에 이름표 붙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맞아. 돈은 돈일 뿐이지.”
내 말에 조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가 함전무님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글쎄?”
조연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함전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난번 자신을 농락했던 일 따위는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 같은 조연준의 얼굴에 살짝 노기가 치미는 모양.
조금전 내가 조연준을 약올리던 상황과는 반대라는 느낌이다.
뭔가 우리는 서로 상성이 맞물리는 느낌이지?
나는 직급문제로 함전무에게는 약하지만, 조연준에게는 한 방 먹인 전적 때문에 강하게 나갈 수 있다.
조연준도 내 도발에는 부들부들 떨지만 함전무에게는 거만하다는 느낌.
무슨 가위바위보도 아니고 참······.
어쨌든 함전무가 나설 판은 내가 깔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와 손 잡으시지요.”
“뭐라고?”
“이번 일에 내막은 알고 계시지요? 다름 아닌 함전무님이 쥐고 계신 판호를 둘러싼 경쟁입니다. 제 기획력이야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라 치고, 이번에는 무려 출제자인 함전무님과의 공동전선입니다. 이거 이해되시죠?”
“두 사람은······. 다소 애매한 관계 아니었나?”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물길을 어떻게 트느냐에 따라서 의외로 사람 관계라는 것은 이리저리, 쉽게 변화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으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연준은 살짝 신음했다. 그럴 것이다.
맥베스를 공략하는 과정에는 우리에 대한 작은 복수도 포함이었을 텐데, 이렇게 우리가 손을 잡자고 나오니, 어이가 없겠지.
“결국 수익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모로 따져봐도 저희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유익하실 겁니다.”
만약 조연준의 목적이 단순히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것에 있다면, 내 제안을 거절할리는 없다.
하지만 그의 목적이 그런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익히 드러나지 않았나?
“크크큭.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지. 그리고 수익? 내가 고작 투자자들 배나 불려주려고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 그래. 잘 말해줬다. 혹시라도 입을 조심할까 봐 걱정했었거든.
나는 품안의 만년필을 살짝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대체 단순 투자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냥 정당하게 내 몫을 챙기려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건 딱히 돈벌이가······. 아니, 오히려 금전을 쏟아붓는 꼴이 될 텐데요?”
“그게 내 돈인가? 이제 알겠지? 자네와 나는 쥐고 있는 패가 틀려. 최후의 순간,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자금 폭탄을 터트려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이제야 상황이 좀 이해가 되나?”
상황은 원래부터 이해하고 있었고, 친절한 설명 감사할 따름이다.
이로써 일단 내 역할은 끝났다. 아마도 이거면 충분하리라······.
“살면서 내가 회장님 걱정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함전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죠?”
“······이거 함정이라네, 자네가 지금 한 말은 녹음되어 하비 로스에게 보내질 거야.”
“헉!”
함전무가 갑자기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 이런 비겁한 짓을!”
하하하, 이거 살짝 민망한데?
“잘 생각하게 나는 진심으로 자네에게 손을 내미는 거야. 형님의 아들을 몰락시키고 싶지는 않군. 차라리 이 기회에······. 제대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나?”
함전무는 진심으로 조연준을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조연준은 이미 함전무의 말 따위는 듣고 있지도 않았다.
“토마스! 당장 녹음기를 빼앗아!”
“예스, 서.”
순간 곁에 있던 거구의 흑인이 함전무 뒷덜미를 잡아 테이블에 내리꽂았다.
마치 미국 영화에서 범죄자를 잡은 경찰이 차에 범인을 밀어붙이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상황.
“한국 땅에서 감히 어른에게 손을 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르를 바꾸고 싶어?
그렇다면 이제 액션 스타트다!
< 흥행 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