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대체 단순 투자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냥 정당하게 내 몫을 챙기려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건 딱히 돈벌이가······. 아니, 오히려 금전을 쏟아붓는 꼴이 될 텐데요?’
‘그게 내 돈인가? 이제 알겠지? 자네와 나는 쥐고 있는 패가 틀려. 최후의 순간,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자금 폭탄을 터트려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이제야 상황이 좀 이해가 되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표세인과 조연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특히 ‘그게 내 돈인가?’ 라는 대목에서는 주먹까지 불끈 쥐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하비를 지켜보던 제임스의 표정은 여전히 특유의 냉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타이밍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인가? 이제 시즈닝은 끝난 것 같은데?’
타이밍을 틀린다면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리는 법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다. 제임스는 침착하게 하비를 주시하며 표세인이 전해준 마지막 카드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거 조작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다.
목소리와 말투만으로도 조연준 본인의 것임은 확실했고, 하비 스스로도 괜히 던져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수년간 묵묵히 조연준을 지지한 자신의 기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이 못마땅한 마음에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에 불과했다.
“대체 조연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는 맥베스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앞뒤 안 가리고 주식을 매입할 생각이지요. 투자 이득보다는 본인이 맥베스에 대한 영향력을 가장 크게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요.”
“으음······.”
이제야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깨비몬 출시와 동시에 폭증한 주가.
사실 단순한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 막차에 올라타, 매도 적기를 계산하는 것이 올 바랐다.
하지만 정작 조연준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투자자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맥베스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었으니까.
“제임스라고 했지요?”
“네.”
“그쪽이 제시할 카드가 이것뿐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제임스는 숨기고 있던 마지막 카드를 꺼낼 완벽한 타이밍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말씀해보시죠.”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에게 투자금 운용에 대한 권리를 양도해주시기 희망합니다.”
“양도라······.”
“물론 맨입으로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맨입이 아니다?”
“이번 투자에 한정한 제안입니다만, 투자금의 최소 수익 보장을 약속드립니다.”
“수익 보장? 얼마나?”
“2배.”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몇 %가 아니라, 2배로 보장한다고? 세상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소 보장금이 2배라면 누구라도 달려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분명했다.
만약 처음부터 이 조건을 꺼내 들었대도, 조연준의 녹취 따위와는 관계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투자라는 것은 원래 수익대비 리스크를 동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기본 보장이 2배라니······.
“이거 누구의 생각입니까? 솔직히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세상에 100% 성공이 확실한 프로젝트 따위는 없다.
그런데 대뜸 2배를 보장한다?
만약 자신들이 얼마나 투자할 줄 알고?
“세상에는 일반적인 사고를 벗어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필라(기둥) 소프트의 대표인 표세인이 바로 그런 타입이지요.”
애초에 표세인의 성향 자체가 돈을 긁어 모이기 위해 안달하는 타입이 아니다.
게다가 만약 이번 일로 손해를 보게 된다? 과연 그것이 표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깨비몬의 예상 수익만 해도 어마어마한 상황.
더욱이 조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그간 쌓아놓은 사내 입지는 또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도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지지기반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돈을 베팅하는 배포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어쩌면 표세인은 재력가가 될 가장 큰 자질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인들, 특히 돈에 집착하는 자산가들의 눈에 표세인은 도무지 심중을 읽어낼 수 없는 괴물로 보일 것이다.
‘사실 이 점은 조연준도 똑같지.’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두 사람이 이 부분에서만큼은 판박이다.
두 사람 모두 돈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한 가지 뿐.
때로는 작은 생각의 차이가, 타인들에게 미증유의 신비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마치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도 하비와 같은 재력가는 영원히 표세인 같은 인물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증은 충분합니다. 필라 소프트가 곧 출시할 깨비몬의 수익이라면 평소 운용하시는 투자금의 2배 보장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미리 준비해온 깨비몬 게임의 예상 수익과 현재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깨비몬 캐릭터 상품의 붐에 대한 자료를 건넸다.
“깨비몬이라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딸애도 요즘 그 상품들을 사 모으느라, 정신이 없더군.”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조연준과 복잡하게 얽힌 사정 때문에 당신을 찾아온 것이지만, 단순 투자라면 저희는 어떤 투자자를 찾던지, 투자를 얻어내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대로였다.
원금의 최소 2배를 보장한다는데, 어느 누가 지갑을 열지 않겠나?
“반대로 묻지, 2배 보장 따위와는 별개로 그쪽의 지분을 매입할 수 있겠습니까?”
“네. 불가합니다.”
산뜻할 정도로 재빠른 거절이었다. 제임스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약 평소보다 훨씬 큰 투자금을 밀어 넣는다면? 그 경우 리스크가······.”
“리스크?”
제임스가 그답지 않게 피식 웃었다. 매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표세인에게 돈을 밀어 넣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이번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판호. 황금향이라 불리는 거대 시장으로 향하는 열쇠가 걸린 판이다.
그것을 손에 넣은 표세인을 걱정한다?
“많이 넣으시면······.”
“넣으시면?”
“많이 벌게 되실 뿐입니다.”
마치 딜러와 짜고 치는 판이나 다름없다는 투였다.
적어도 표세인의 주변인들에게 표세인이라는 이름은 흥행 보증 수표나 다름없었기 때문.
아니, 실제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게임사들의 출시 게임이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그 단호한 믿음에······. 한번 걸어 보고 싶군요.”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하비와 제임스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계약서를 검토해주시죠.”
“제 변호사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미 보내 두었습니다.”
“하하,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그 부분에서는 조연준과 형제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조연준이 문제가 아니라,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지시? 가만, 당신은 맥베스 오너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저와 제 아버지는 별개지요. 저는 제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당신도 참 흥미롭군요.”
하비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아무래도 조연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비라는 인물 자체가 상리에서 벗어난 인물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부디 우리의 거래도 시작만큼이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네. 물론입니다.”
제임스는 하비의 저택을 빠져나오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제임스입니다.
성패 여부를 묻지도 않는다.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서?
아니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제임스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러니 맡겼고, 그러니 나올 말은 오직 짧은 치하의 한마디뿐.
순간 제임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이 떨렸다.
‘뭐지? 이건?’
별것 아닌 짧은 치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게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을 울린단 말인가?
‘이 사람 달라졌다.’
지난번 문이사의 갑작스러운 귀국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뭔가 묘한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귀국하면······.”
-?
“문이사님과 함께 셋이서 한잔할까요?”
말을 꺼낸 제임스 본인이 더 놀랐다.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직은 고작 투자금 마련에 성공한 수준이다. 프로젝트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다.
일이 끝나기 전에 축배를 나누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잔 술잔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거라면 양실장님도 함께 하면 좋겠네요.
“네, 딱히 따돌리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홍기도 녀석도 불러서, 같이 봐야겠네요.
“홍과장이요?”
-요즘 묘하게 양실장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불안하더라고요.
아래 파벌에 대한 경계심일까? 하지만 의문은 곧장 풀렸다.
-분명 양실장님이 이 녀석 허튼짓을 무던히 참고 계실텐데······. 그게 걱정이네요. 제가 교육을 확실히 못한 탓이죠.
표세인의 말에 제임스는 피식 웃었다. 마치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큰형 같은 대사였다.
‘아마 당신이 보는 홍과장과 저희가 보는 모습은 조금 다를 겁니다.’
제임스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홍기도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장남이셨죠.”
-네. 동생과 나이 차도 많이 나서 순도 100% 장남으로 자랐죠.
“그래 보입니다. 아주 좋아 보여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간 조연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역시 다르다.
-아무튼, 조심히 귀국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뭔가 일 좀 했다는 기분이 드는군.”
무척 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창밖으로 비치는 별것 없는 풍경도 뭔가 더 멋지다는 느낌이다.
술자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은 귀국길이 될 것 같다.
*
*
*
“엣취!”
홍기도는 느닷없이 재채기했다.
“뭐야 더럽게!”
“입 막았거든? 팔 들어 올린 거 안보임?”
홍기도는 남궁원에게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거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해. 알고 있어? 너희 파트가 끝내줘야, 내가······.”
“아니. 내일까지 끝낸다.”
“뭐?”
“조만간 술 마실 것 같은 기분이라서 빨리 다 처리해야 해.”
“갑자기 뭔 소리냐?”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뭐래, 이 미친놈이.”
남궁원은 볼멘소리했지만 홍기도는 대답도 하지 않고 폴짝폴짝 뛰는 걸음새로 표세인에게 다가갔다.
“우리 술 언제 마셔요?”
“술? 갑자기 뭔 소리냐?”
표세인 역시 남궁원과 똑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표정은 다소 달랐다.
남궁원의 시선은 뭔사 이상한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표세인은 진짜 이상한 놈이라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 몸을 속일 수는 없다!”
띠링!
[예지력이 발동했습니다.]
랜덤 확률로 발동하는 예지 스킬이 터져나온 것일까? 홍기도는 술자리에 거의 100%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 진행 중 이냐? 출시일 맞출 수 있는 거지?”
근래 게임 업계에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출시일 연기.
물론 각자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유저들 사이에서는 이슈 몰이를 위해 일부러 출시일을 앞당겨 발표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횡횡하는 상황이었다.
표세인 역시 한 명의 게이머로서, 이러한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혹한 크런치라며 팀원들에게 원성을 받는 한이 있어도, 보너스라는 당근을 흔들어서라도 어떻게든 기일에 맞추고 싶었다.
“문제없죠.”
시스템 파트는 버그만 없다면 대충 문제는 없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버그 잡는 귀신인 한팀장이 있지 않나?
한팀장의 노고 덕분일까? 코딩이 끝난 이후 버그가 나오는 경우가 극단적으로 적었고, 수정 속도 역시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뭘 믿고 술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 요즘 일 잘하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포상이 있겠죠?”
“마, 그러면 다른 팀원들은 어쩌고?”
“아, 저는 패스요.”
“저도 지금은 바빠서요.”
권태인과 남궁원을 비롯한 다른 팀원들은 행여나 바쁜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선수를 쳤다.
“흑······.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홍기도와 둘이서만 지지고 볶는 시절을 보낸 탓에, 바쁘다며 회식마저 거절하는 정상적인 모습이 퍽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언제예요. 제 느낌상 내일인데?”
-우웅.
-우웅.
때마침 표세인과 홍기도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진동했다.
-내일 제임스가 귀국하는 대로 한잔하자는군.
-내일 제임스가 귀국하면 한잔할 것 같습니다. 홍과장님도 참석하시죠.
“거봐! 술자리 있잖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저에게 이런 걸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래. 넌 예전부터 그랬지.”
오래전, 표세인과 홍기도가 가까워지기 직전의 짧은 사건이 떠올랐다.
“그래, 나중에 우리 둘이 따로 한잔하자.”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그리 멀지 않은, 하지만 이제는 제법 거리가 생겨버린 짧은 추억이다.
이제는 그때와는 전혀 달라진 두 사람의 관계와 사내 입지.
조만간, 두 사람은 그날의 일을 되뇌며 술잔을 기울이게 되리라.
잘 익은 술처럼, 그날의 기억이 이제 마개를 열어볼 시간이 되었음이 느껴진다.
표세인과 홍기도는 조금 아련한 시선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1초 컷 주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