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덕분에.”
제임스가 귀국한 다음 날, 우리는 그가 말한 대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나름대로 우리 파벌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첫 회동이었지만, 아쉽게도 고부장과 한팀장은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고부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협력관계인 상태고 한팀장은 아시다시피 출시가 코앞이라서요.”
현재 한팀장은 거의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다시피 막바지 준비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기획이, 중반에는 그래픽이, 후반에는 프로그래머가 갈려 나가는 것이 게임 업계의 기본 순서인 바.
덕분에 한팀장을 비롯한 프로그램팀 전체가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상석에 앉은 문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본인도 프로그래머 출신이어서일까? 막판 마무리 작업에 돌입한 프로그래머들을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두분 이쪽으로 앉으시죠.”
“저희가요?”
문이사와 양실장에게 상석을 권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라면 모를까,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연배대로 자리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도 요즘 점차 그런 느낌이지 않나?
리더라는 것은 역할에 불과할 뿐.
나는 그것이 제법 괜찮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필요 이상의 허례허식에 목 맬 생각은 없다.
이미 양실장과 문이사는 충분히 나를 리더로 대해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이런 자리까지 제안했지?”
문이사가 제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임스가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확실히 의외였다.
“제임스도 사람이니, 가끔 한잔하고 싶은 수도 있죠. 게다가 한국에 친한 사람이라고는 우리들 뿐이잖아요?”
“그렇죠.”
홍기도가 주먹을 뻗자, 제임스도 마주 주먹을 뻗어 툭 부딪쳤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 둘의 조합은 진짜 의외다.
“와! 고기 나왔네요.”
“그런데 제임스도 고깃집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홍기도 과장이 말하길 표세인 팀장님이 좋아하신다고 해서······.”
“······.”
“뭐죠? 그 눈빛은? 한번 고기 안 좋아한다고 해보시죠!”
그래. 좋아하지. 좋아하는 것 맞는데, 왜 이렇게 찝찝할까?
“헛소리 말고 집게나 내놔.”
“여기 있습니다!”
“아, 표세인 팀장님 저도······.”
양실장이 한 손 거들려고 할 때, 나와 홍기도가 동시에 손을 뻗어 제지했다.
“앉아 계십시오.”
“환자는 의사에게, 고기는 표세인에게.”
뭘 포스터 경고문구처럼 말하는 거냐. 하지만 나도 고기 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 상관없지.
“말씀드렸다시피, 사적인 자리에서는 좀 편하게 있기로 하죠. 저도 그게 편합니다. 야, 이거 가위 교체해라.”
“넵!”
홍켓몬은 종업원을 호출하는 대신, 잽싸게 쪼르르 달려갔다.
“가위.”
“네.”
척하면 척이랄까? 적어도 고기를 구울 때 만큼은 우리 호흡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문이사는 살짝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잽싸게 구워지는 순서대로 문이사와 양실장, 제임스의 앞접시에 고기를 배달했다.
“그 뭐더라? 어쩌구 달인? 그런 프로 나가도 되는 것 아닌가? 손이 엄청 빠른데?”
“개발실 내에서도 표세인 팀장님 손 빠른 것은 유명하더군요. 한 손으로 게임을 컨트롤하면서 다른 손으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신다고.”
“아! 그건 어렸을 적 신문 배달할 때, 광고지 끼워 넣던 요령을 배운 덕이죠.”
중학교 시절, 딱히 돈이 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호기심에 시작한 신문 배달을 하다가 얻은 잔재주 하나.
한 손으로는 신문지를 벌리고, 다른 손으로는 광고지를 집어, 벌어진 틈에 밀어 넣는다.
숙달된 사람들의 손은 정말로 기계처럼 빠르다. 나도 빨리 배우는 편이었지만, 오랜 시간 반복 숙달된 진짜 달인들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건 진짜 고수분들 앞에서는 재롱에 불과하죠. 기도야. 무로 불판 중앙 좀 닦아라.”
“네.”
홍켓몬은 적어도 고기를 굽는 와중에는 입 다물고 어시스트에 집중한다.
덕분에 우리는 처음 나온 고기 일체를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햐~ 간만에 살 것 같네요. 한잔하시죠!”
“문이사님, 이 녀석 속도에 맞추면 힘드실 수 있으니, 천천히 드세요.”
안 그래도 소주 대신 위스키를 마시는 문이사였다.
위스키로 홍켓몬 속도에 맞추면 누구든 사망이다.
“하하하! 그러나 너는 아니다! 잔 들어라!”
“너는 반말이잖아 임마!”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취한척하고 있어?
“으악! 하하하! 술자리에서는 원래 야자 타임하는 것 아닙니까?”
“야자 타임? 나쁘지 않군요.”
제임스는 나이로 꿀릴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불고 있네. 아니, 제임스 말고요.”
“왜! 제임스 타박합니까!”
“타박! 타박!”
“으악!”
술기운이 오른 홍켓몬을 적당히 주물러주자, 주변에서 유쾌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엄살 부리지 마라,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로 힘줘서 때린 줄 알겠다.”
“아프거든요!”
“내가 제대로 힘쓰면······. 넌 아픔도 못 느껴.”
“어······. 글케 말하면 진짜로 좀 무섭네요.”
아니, 그냥 농담한 거야. 갑자기 왜 진지해지냐.
“안 그래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조연준을 만나러 갔을 때, 작은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역시 양실장은 모르는 것이 없다.
“아, 그 이야기는 좀······.”
난데없이 함전무님이 위기에 빠진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혹시 연아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려나? 곤란하다. 심히 곤란하다.
“나도 이상무님께 들었어. 엄청난 거구를 주먹 한 방에 보내버렸다지? 지난번 마커스 때도 그렇고, 표세인 팀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하하하.”
“네. 그때는 정말 통쾌했지요. 안 그래도 이따금 불만이 쇄도해서 골치였는데요. 본인은 애정 어린 스킨쉽이라고는 해도······. 태반이 운동과는 담쌓은 너드들이라는 것을 좀 인식할 필요가 있었죠.”
마커스 이야기까지 나오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주를 홀짝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성진규에게서는 연락이 왔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더군.”
“그렇습니까?”
“최기환 실장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뭔가 나름의 꿍꿍이는 있는 것 같더군요.”
양실장의 말에 문이사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친구들이 이 시점에 내놓을 수야 뻔하지, 저들끼리 손을 잡겠다는 거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이사와 양실장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고는 건배했다.
요즘 두 사람이 잘 지내는 모습이 뭔가 흐뭇하다.
이것만으로도 파벌이니, 뭐니 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좀 아쉽군. 한번 2차전을 치러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내심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지난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승부는 사실 나라는 변수가 끼어 있던 것이니, 내심 두 사람은 제대로 정정당당히 한번 붙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머지않아 정말로 선의의 경쟁이 한번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잡은 이상, 문이사와 양실장의 경쟁은 훗날의 일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
제임스가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곧 하비의 변호사와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것인데, 혹시 이번 판호건을 위해 개발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 있습니까?”
제임스의 질문에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사실 기획이 공개되기도 전에 투자금을 확보해 버린 탓에, 다들 말은 안 했어도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모두의 면면을 슬쩍 훑어보며 술잔을 비웠다.
“사실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어렵지 않죠.”
“!”
“하하하! 역시 표세인 팀장이군.”
다소 지나치게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내 말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문이사는 호탕하게 웃었고, 양실장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임스는 그저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홍기도는 배를 쓰다듬으며, 내 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딱 그들 눈높이에 맞는 게임을 던져주면 됩니다.”
“그 말씀은 글로벌 시장은 버린다는 의미입니까?”
“글로벌만이 아니죠.”
“?”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도 버립니다. 동남아는 뭐, 운 좋게 걸릴 수도 있지만요.”
“그건 다소 위험한······.”
양실장이 다소 우려 섞인 눈빛을 보냈다.
“글로벌을 비롯한 한국 유저들의 눈은 엄청나게 높습니다. 사실 거기에 맞추기는 쉽지 않죠.”
“하지만 근래 중국 개발사들의 기술력도 상당합니다. 그곳 유저들의 눈높이 역시······.”
“그래픽이나 기술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눈높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그들은 트랜드에 무딘 편입니다.”
“트랜드에 무디다?”
“네. 사실 한국이 트랜드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빠르죠. 모바일 시장 유행을 선도했던 경험까지 더해져서 그런면도 크고요.”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지요.”
비즈니스 모델을 포함해, 현재 유행하는 수집형 카드게임의 모델들 대부분을 한국 개발사들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에는 뒤처지는 다소 기괴한 모양새가 나와버렸다.
“일본처럼 갈라파고스화가 심한 지역은 제외하더라도 중국은 외부 트랜드가 어떻든 자신들만의 방식과 유행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편입니다. 사실 이것까지 그들이 글로벌화에 성공해버렸다면, 정말 쉽지 않았겠지요.”
내 말에 문이사와 양실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요즘 중국이 발전해서, 세계시장에서까지 먹히는 IP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건 이상적이지요.”
“잠깐, 앞서서 말한 것과는 좀 결이 다른데? 그들은 글로벌 시장과는 별도의 움직임을 선보인다면서?”
“이제 막 시작이죠. 그러니 지금이 판호만 얻으면 반드시 돈을 긁어 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장르, 어떤 플랫폼을 고려하는 거지?”
“요즘 세상에는 플랫폼 연동 게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쁠 때는 폰으로 한가할 때는 PC로 한순간도 게임에서 눈과 손을 뗄 수 없게 묶어 두는 거죠.”
내 대답에 만족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플랫폼 연동 게임이야, 요즘 규모 있는 개발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독 드리고 있다.
언제나 선구자에게는 큰 리스크가 따르는 법인지라, 다들 눈치싸움만 하던 끝에 중국 자본이 먼저 대 히트를 기록한 상황.
내가 말한 것 정도는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수준일 것이며, 이미 우리보다 앞서서 기획에 나선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지금 아주 좋은 타이밍입니다. 중국인들의취향이 재패니메이션 식 카툰랜더링에 눈을 뜬 이 시점. 우리는 충분히 승산을 기대할 수 있죠.”
“하지만 그래서 정확히 무슨 게임을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직 완전히 구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아이디어는 있습니다.”
“아직이라고요?”
모두는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누른다고 바로바로 튀어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말한대로, 아이디어는 있다.
“표세인 팀장님치고는 별일이다 싶군요. 평소에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아이디어를 아웃풋하시는 편이셨는데······.”
“큰 얼개는 있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 달라서요.”
“방향이 다르다?”
“다들 판호에만 시선이 박혀 있는데······. 사실 그것은 함전무님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입지를 세워주기 위한 장치 같은 느낌이죠.”
“중요한 것은 함전무의 후계자라는 타이틀 그 자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저 이번 프로젝트는 전사 차원으로 끌어 올릴 예정입니다.”
“전사 차원?”
“게임에 꼭 장르 하나만 들어가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몇 개의 장르가 복합된 게임이 될 겁니다.”
“생각하고 계시는 장르는?”
“중국이라면, 당연히 AOS와 FPS 아니겠습니까?”
중국 시장을 공략할 기회를 손에 넣었는데, 고작 돈 몇 푼 노리는 것은 너무 스케일이 작지 않나?
어차피 판호 문제로 경쟁자들도 별로 없는데, 중국 시장 전체를 삼켜봐야지!
< 웨딩 버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