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결국 그렇게 됐다. 다른 투자자들도 환영하는 분위기더군.
“그렇군. 잘 해보라고.”
-······네가 나에게 먼저 연락해서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수습하려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최소한 재고의 여지는 있었으리라······.
“흥,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지. 결국 너희는 나보다 저쪽이 더 돈이 된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조연준은 같잖다는 듯이 하비의 말을 일축했다.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이런 짧은 충고 조차 들을 생각이 없나?
“없어. 그리고 우리 사이에 무슨 정이 있었다는 거야? 나는 너희의 돈을 벌어줬고, 너희는 배를 불렸지. 새로운 돈벌이 기회를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등을 돌리고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마지막까지도 고민했다. 그리고 최소한 전화 한통 정도는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잖은 충고 따위 거절이라니까?”
-대체 갑작스럽게 맥베스를 노리는 이유가 뭐지? 지금까지 그런 낌새 조차 없었잖아.
“······.”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이봐, 하비.”
-말해.
“······아니, 그만 끊지.”
뭔가 말할 것처럼 뜸을 들이고는 결국 입을 다문다.
하비 역시 잠시 말없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만 끊지.”
조연준은 마지막 인사도 남기지 않은채, 통화를 종료했다.
“70% 이상인가?”
자신이 운용하는 투자금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하비 그룹이 이탈했다.
이로써 주식 매입으로 맥베스를 크게 흔드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황.
물론 이것만으로도 상당수 지분을 확보하고 대주주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겠으나, 그가 원래 그렸던 그림과는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대체······.”
깨비몬 출시 발표 이후 훌쩍 뛰어오른 주가는 아직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약간씩이지만 소폭 상승을 계속하는 지경.
“표세인······. 표세인······.”
조연준은 표세인의 이름을 되뇌이며 이를 갈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우습게 봤던 것이 사실이다.
마커스를 움직여서 미국지부를 다소 흔들어 놓는 것만으로도 본사까지 향하는 다리가 놓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설마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비까지 빼돌려 자신의 자금줄에 치명타를 입히다니······.
“고작 게임이나 만드는 새끼가······.”
게임을 언급하는 조연준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월스트리트의 주식쟁이들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게임 개발자들의 업은 훨씬 더 악독하다.
“마약상이나 다름 없는 것들이······.”
조연준에게 있어 게임은 마약이나 다름없다. 거짓 즐거움을 제공하고, 중독시키는 것.
더군다나, 근래의 비즈니스 모델에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요소들까지 우후죽순 추가되지 않았던가?
‘게임 업계를 잘 모르시네.’
그런 주제에 자신을 하찮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그 눈빛.
사실 표세인 입장에서는 그저 키 차이로 인한 눈높이 차이에 불과했지만, 조연준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그래, 어디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으라고······.”
조연준은 극비리에 입수한 서류를 바라보았다. 서류의 윗부분에는 WHO(World Health Organization)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내가 제 놈들을 구원해주러 온 것도 모르고······.”
조연준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 속에는 아직 열망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채였다.
*
*
*
버버리는 오랜 역사와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명품 패션 브랜드다.
1990년대 이후, 다소 클래식한 느낌이 강한 탓인지, 한차례 하락세를 겪기도 했으나, 이후 과감한 시도와 트랜드를 발 빠르게 뒤쫓는 혁신으로 2000년대에 이르러 새롭게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과감한 시도 속에는 여러 매체와의 콜라보도 존재했다.
“깨비몬······.”
버버리의 CEO, 수잔 먼로는 맥베스 측에서 전달한 사업기획안을 검토하며 팬 끝을 살짝 물었다.
“사업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만······.”
이미 해외 유명 명품 브랜드들과 게임 업계와의 콜라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 한차례 혁신으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버버리는 그런 면에서 더욱 열성적으로 파트너쉽을 전개해왔다.
“문제는 수익 배분인데······.”
상품 라인업부터 수익 배분까지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마치, 붙여 줄 테니 들어와라! 하고 선심을 쓰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
게다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라이센스 생산 권리까지 요구하고 있다.
근래 깨비몬 상품들의 붐은 수잔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패션업계 외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그녀의 귀에까지 이만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은
“담당자가 조연아······.”
수잔은 조연아의 이름 위로 펜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놀랍게도 그녀에게 맥베스와 조연아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의 친구이자, 전임자였던 에머리 킴.
버버리의 이미지 쇄신을 주도하고 고작 수년간 브랜드 파워와 매출을 비약적으로 증진시킨 브랜드 마케팅 전문가.
그녀가 스마트폰 업계의 선구자인 앰플의 부사장으로 발령 받지 않았다면, 수잔의 CEO 취임도 없었을 것이었다.
“분명히 그녀의 딸이 이런 이름이었어.”
한국식 이름은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퍽 인상적인 면이있다.
그래서 스치듯 언급되었던 이름임에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확인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번호를 입력하기도 전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성격도 급하시지······.”
수잔은 스마트폰 위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잘 지내요?”
-항상 똑같지.
짧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60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생기가 넘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이지만 패션업계는 상당히 보수적이며, 업계를 이끄는 인물들 상당수가 60대 이상, 더러는 70대에 가까운 현역도 즐비했다.
그리고 아마 에머리 킴 역시 이제부터가 전성기의 시작이라는 듯이 여전한 활력을 자랑했다.
“마침 잘 전화했어요. 안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거든요.”
-내 딸 때문에?
“어머? 어떻게 알았죠?”
사실 전화가 걸려온 순간부터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쪽에만 접촉한 것이 아냐. 어지간한 브랜드들 모두 같은 연락을 받았을 거야.
분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그 속을 낱낱이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틀림없다는 자신이 넘쳤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에머리는 언제나 자기 생각에 대한 강한 확신과 탁월한 추진력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런거라면 좀 아쉽네요. 결국 바람둥이라는 거네요? 좀 더 로맨틱한 만남을 기대했는데······.”
에머리의 딸이라는 것부터 묘한 인연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소 공격적인 제휴 방안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검토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브랜드들의 문도 두드렸다? 이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명품 브랜드 회사는 어딜가나 똑 같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이들이다.
다소 손해가 나더라도, 큰 이득을 놓치게 되더라도, 스스로를 특별하게 대우해주지 않는 상대와 손을 잡는 일은 없다.
스스로 콧대 높은 미녀라는 포지션을 유지하지 못하는 브랜드는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
-아니, 재고해보는 것이 좋을거야.
“재고해 보라고요?”
수잔은 고개를 갸웃했다.
패션업계의 전통을 에머리가 모를 턱이 없다.
고고한 기품을 유지 못하는 꽃은 금새 꺽이고 말거나, 홀로 시들어버린다.
그렇기에 수잔은 에머리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조연아 맞지?
“네.”
-내 딸이라고?
“······그건 전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아들들은 어째서인지, 저들 멋대로 자라긴했지만, 연아는 달라. 나를 꼭 빼닮았어.
“그런가요? 그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네요.”
-맞아.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칠거야.
에머리의 말을 듣고 다시금 제안서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에머리의 일처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공격적이며 오만하다.
반대의견 따위는 허락지 않고, 손을 잡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선전포고 같은 느낌 마저 전해진다.
-모두에게 제안했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돼. 그만큼 자신감 있는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검토해봐.
“그정도까지 말씀하시는 것은 그냥 손을 잡으라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무슨 말이야. 무도회에서 신사가 내민 손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만, 어떤 춤을 얼마나 출지는 숙녀의 선택이라고?
“아!”
-지지마, 수잔. 응원할게.
“딸이 아니고요?”
-그 아이에게는 응원 보다는 좀 다른 선물을 주고 싶어.
“다른 선물?”
-그러고 보니, 선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 공항인데 한국 여행 선물로 원하는 것 있어?
“네?”
-원래 그게 용건이었거든. 생각나면 DM 보내. 그럼 나중에봐.
일방적인 통화 종료. 수잔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금 제안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공략할만한 빈틈이 있을 거야.”
에머리의 딸이라도 조연아는 아직 어리다. 분명 빈틈은 있을 것이다.
수잔은 제안서를 닳도록 훑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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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소 공격적인 제안이 아니었을까요?”
김비서의 말에 조연아는 히죽 웃었다.
“그럴까요?”
“어? 오늘 기분 좋으세요?”
“네. 데이트가 있어서요.”
“이거, 이거······. 아니, 오늘은 이럴 시간 없어! 아무튼, 컨택한 브랜드들에서 반응이 약할 것 같아 걱정이네요.”
명품 브랜드들의 높은 콧대는 누구나가 아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조연아가 그들에게 보낸 이번 제안서는 오만하다 못해 공격적인 수준이었다.
제안서 곳곳에서 엿보이는 도발의 기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보는 눈이 없다면, 이쪽에서 먼저 거절이다. 잘 생각해봐라.’
물론 현재 깨비몬의 파급력은 기대 이상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 하나로 명품 브랜드들을 움직일 수가 있을까?
오히려 역풍이 두렵다.
“소켓몬조차 이 정도로 명품 브랜드에게······.”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네?”
“깨비몬은 아직 이미지가 완전히 잡혀있지 않지요. 게다가 소켓몬의 경우 구매력 있는 성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품들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죠.”
“으음······.”
그거야 이미 기획 단계에서부터 누누이 검토됐던 이야기가 아닌가?
캐릭터 상품제작의 시너지야 말로 깨비몬의 상품성 그 자체였다.
애초에 모티브 자체가 귀여운 동물들에서 출발한 소켓몬과는 달리, 깨비몬은 물건에서 출발한다.
“기대를 걸어 보는 겁니다. 저는 다수의 자잘한 계약들 보다 우리와 함께 나아갈 파트너를 원해요.”
“하지만 그러다 하나도 잡지 못하는 수가······.”
“아니요. 다소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전 자신이 있네요.”
“오늘따라 너무 생기가 넘쳐서 무서울 정도네요.”
그동안 데이트라도 있냐며 놀리는 것이 김비서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연아 스스로 데이트를 언급하며 평소 보다 훨씬 텐션이 높은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다.
‘묘하게 변하시네.’
이제 가면이 서서히 필요 없게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게임과는 별개로 깨비몬 캐릭터 상품은 이미 궤도에 올랐다.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그 파급력 역시 대단했다.
이미 연아는 후계자로서, 차기 맥베스의 오너로서의 역량을 유감 없이 발휘한 상황.
“누가 보면 날이라도 잡은 줄 알겠어요.”
김비서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순간 조연아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아!”
“?”
“······제가 깜빡했네요. 맞아요. 저 날 잡았어요.”
“······야! 인간적으로 너무 하네! 이 회사에 친구라고는 나 밖에 없으면서!”
“죄, 죄송합니다.”
조연아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축하해. 내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은 우리 나이 차이를 고려해서, 넘어가 주고.”
“언니, 정말 고마워요.”
“···굳이 이럴 때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라. 나이 많은데, 시집도 늦은 부분이 더 부각되잖아.”
“네. 언니.”
“그래서 오늘 데이트는 어디서 하는데?”
“시댁에 잠깐 들렸다가 오빠 친구들 만날 거에요.”
“데이트인데 시댁을 들러? 그건 좀······. 원래 부자들은 그러나?”
“아니요. 제가 좋아해요. 시댁 가족분들 너무 좋거든요.”
“윽, 눈부셔. 이게 웨딩 버프라는 거구나······.”
조연아는 오늘 따라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옛날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