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저희 왔어요.”
나는 연아와 함께 부모님을 방문했다.
“오! 왔냐?”
“어서와라.”
부모님은 마침 식사를 끝내시고 거실에서 TV를 시청중이셨다.
“요즘 많이 바쁜가보다?”
“네, 좀 그랬어요.”
“너 말고······. 연아. 임마.”
네. 그러시겠죠. 흥.
“죄송해요. 좀 더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아니다. 바쁠 때는 일해야지. 모쪼록 건강 잃지 말고.”
“네.”
“그보다 내년 봄에 결혼하기로 했다면서, 뭐 준비는 잘 되고 있냐?”
“이제 천천히 시작하려고요.”
결혼 준비.
뭔가 단어의 무게감부터가 다르다.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등산보다 힘들고, 국토횡단만큼이나 진이 빠진다는······.
난이도 최상급의 레이드 던전!
“저 녀석이야, 워낙 그런 쪽으로 맹탕일 테니까. 네가 답답하더라도 좀 참으렴.”
“누가 들으면 제가 결혼 준비 몇 번 해본 줄 알겠네요.”
내 말에 이번에는 아버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딱 보면 알지.”
“어떻게요?”
“너 그럼 처음에 준비 뭐부터 해야 할 것 같냐?”
“음······.”
대강 결혼식장 예약하고······. 예물 준비하고 이래야 할 것 같긴 한데.
막상 말하려니까, 이게 맞나 싶긴 하다. 평생 누구에게 결혼 준비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어서,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다.
“거 봐라, 임마. 당연히 예식장부터 예약하는 거지.”
“음······.”
억울하긴 한데, 말문이 막힌 것은 사실이니 가만히 있자.
어차피 결혼 준비를 하려면 부모님께 이것저것 조언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연아, 너는 어디 생각해 놓은 예식장 있니?”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전문업체부터 찾아서 진행하려고요. 경험도 없는 저희가 시간 빼앗기기보다는, 업체에 맡기고 나중에 디테일만 수정하는 식으로 하려고요.”
“역시, 우리 연아가 똑똑하다.”
“그래도, 꼼꼼히 잘 살펴야 한다. 그거 한 두 푼도 아닐 텐데.”
연아가 선정하는 업체라면 일반적인 업체는 아니겠지.
애초에 돈이 아니라, 시간이 문제인 상황이니, 연아 성격에 어설프게 일하는 곳과 계약할 리도 없겠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딱히 내가 신경 쓸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순서가 조금 뒤바뀌었지만······.
프러포즈!
나, 이거 준비해야 한다.
이걸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나중에 어찌 고개를 떳떳이 들고 살 수 있겠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넌지시 귓속말을 했다.
“너 프러포즈는 했냐?”
“아직······.”
“너 진짜 괜찮겠냐?”
“할 겁니다. 제대로, 그런데 혹시 아버지는 어머니께 어떻게······.”
“나는 장난 아니었지. 동네 친구들 죄다 불러서······.”
잠깐, 인터넷에서 본 최악의 프러포즈가 바로 공개된 장소에서 지인 잔뜩 불러 놓고 하는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아버지에게 이쪽 조언을 듣는 것은 무리 같다.
나는 무슨 무용담 늘어놓듯이 자신의 프러포즈를 자랑하는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거 귀담아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직감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벌써?”
“약속이 있어요. 오늘 제 친구들에게 연아 소개해주려고요.”
“아, 그래. 그래야지. 소개도 안 해놓고 갑자기 청접장 돌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다행히 내 친구들은 연아의 정체를 알 길이 없으니, 일단 내 친구들과 먼저 만나고, 이후에 연아의 지인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술 너무 마시지 말고.”
“연아는 술 별로 안 마셔요.”
연아는 기껏해야, 칵테일 몇 잔 정도 마시는 것이 고작이다.
문제는 나지.
친구 놈들이 과연 오늘 얼마나 덤벼들려나?
뭐, 예전에는 나도 그랬었으니······.
“연아 말고 너 말이다. 너.”
“······오늘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그간 쌓은 업보를 감당할 시간이다. 내가 결혼이 빠른 나이가 아닌 탓에 몇몇 일찍 결혼한 녀석들 간을 수도 없이 망가트렸었지 않나?
예전에는 그게 우정이라 생각했었는데, 처지가 바뀌니, 이게 또 난감하다.
“다음에는 식사시간에 맞춰서 올게요. 어머니.”
“그래, 그래. 다음에는 밥 같이 먹자.”
“가볼게요.”
내버려 두면 인사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오빠, 친구분들과는 항상 이런 시간에 만나?”
“뭐, 그렇지? 대부분 자영업자니까?”
태권도장 사범이 두 명, 헬스장 운영하는 녀석이 하나, 나머지는 음식 장사하고 있다.
“다들 대학 친구야?”
“대학 친구는 3명이고 2명은 고등학교 때 친구.”
“어쩌다가 그런 구성이 되었어? 보통은 갈리지 않나?”
“운동하던 녀석들이라서 이래저래 엮여있고, 우연히 사는 곳이 겹쳐서 그렇게 됐어.”
따지고 보면 녀석을 엮은 것은 나였다. 일단 만남 자체가 내 고등학교와 대학교 친구들이니까.
“다들 결혼하셨다고 했지?”
“한 놈 빼고 전부. 게다가 일찍들 했어.”
이유는 모르지만 다들 결혼을 일찍한 덕분에 한동안 그들과 대화가 안 통해서 멀뚱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적이 많았다.
결혼 준비, 처가와의 갈등, 아이들 양육문제.
하나 같이 미혼의 독신남에게는 버거운 문제들을 털어놓으며 신세 한탄하는 탓에 나는 그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만 채워야 했었다.
“조금 긴장되네. 나 지금 화장 흐트러진 곳 없지? 헤어 세팅은?”
긴장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연아.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조금 흐트러지는 편이 좋아.”
“무슨 말이야? 첫 만남인데, 잘 보여야지.”
“아니야.”
“응?”
“너 보면 다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텐데, 조금 살살해줘.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 몰라.”
“내가 어떤 사람인데?”
“맥베스 여신님이라고 불렀으면서 그걸 몰라?”
“······그거 창피하니까, 말하지 마.”
생각해보니, 전에 몇 번 놀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여자친구는 여신님 소리 듣는 분이셨지. 하하, 이거 벌써 친구 놈들 감탄하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
*
*
중심 상권 도로에서 살짝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호프집.
그곳은 나와 그의 친구들이 오랫동안 즐겨 찾던 장소였다.
주인도 몇 번 바뀐 탓에 딱히 단골 대접받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입지와 추억보정이 더해진 탓에 우리는 언제나 1차는 이곳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마무리 장소로 방문하고는 했다.
“좀 볼품없긴 한데, 뭐 남자들 단골집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인 법이니까.”
“좀 더 조용한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다르네?”
“크큭, 어릴 때부터 들락거린 곳이라니까. 그때는 안주 싼 곳이 최고지.”
“지금은?”
“정들어서 가는 거지.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마! 빠딱빠닥 안 오나!”
“사투리 쓰지 마라, 부산 근처도 안 가본 놈이.”
“그리고 그거 울산 사투리라고, 부산 배경 영화 보고, 왜 울산 사투리는 배워와서 헛짓거리냐.”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지들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한다.
“다들, 인사해라. 형수님이다.”
“형수? 지랄하고 있네, 니가 여기서 생일 제일 느리거든?”
“야, 잠깐······.”
“어? 이거······.”
순간 내 뒤로 가려져 있던 연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친구놈들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안녕하세요. 조연아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연아는 살짝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대답들 안 하냐?”
“어? 어어······. 자, 잘 부탁 드립니다.”
“저기, 혹시 연예인?”
예상했던 딱 그대로의 반응이었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기······.”
“네?”
“첫 만남에 이런 질문은 죄송하지만, 저 놈이랑 대체 왜 만나세요?”
어쭈?
“혹시 뭔가 문제가 있으시다면, 저희에게 신호를 주세요. 저희가 저놈보다 싸움은 못 해도, 쓰러지기 전에 119에 신고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112겠지, 구급차불러서 어쩌라고, 니들 실어가 달라고?”
“어쭈? 지가 아직도 현역인 줄 아나 보네?”
“야, 나랑 상호는 아직도 체육관에서 땀 빼고 있거든?”
“뱃살이나 빼고 말해라, 학부모님들이 배 나온 관장 믿고 관비 입금하겠냐?”
“요새는 애들 즐겁게 해주는 입담이 더 중요하거든? 우리 체육관이 상호네보다 수입이 좋은 이유를 모르겠냐?”
“니네는 임마, 어린이반만 돌리잖아. 돈에 눈멀어서는······.”
한동안 영양가 없는 잡담이 이어졌다.
“무슨 일 하세요?”
“같은 회사 다녀요.”
“어? 너 요즘 좋은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않았냐?”
“그럼, 장난 안니지. 나 대기업 다닌다.”
“맥베스라고 했지?”
“너 같은 놈이 대기업에 들어가다니······. 이 나라 게임업계가 걱정이다.”
“네 치킨집이나 신경 쓰시죠? 지난번에 조류독감 때문에 매출 폭락했다고, 우는 소리 하더니, 요즘은 좀 나아졌냐?”
“구제역 얘기 나와서 우리는 나아졌지, 너희 부모님이 걱정이지.”
“아아······.”
대체 이 놈의 나라 뉴스는 어째서 맨날 자영업자 죽이는 뉴스만 내보내는 것일까?
끊임없이 닭고기, 돼지고기 파동을 떠들어 대고는 가끔 심심하면 노로바이러스 운운해서 수산물 업계도 들쑤신다.
“그게 다 광고 넣으라고 협박하는 거지.”
“그래, 니들 명줄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알아서 기어라. 이런거지.”
내 친구들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시장에서 장사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예전에는 정육점을 운영하셨었는데, 돼지고기, 소고기 파동 한번 터지면 눈에 띄게 용돈이 줄어들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뉴스가 한 번씩 어루만져 줄 때마다, 관련 업계는 줄초상이지 않나?
알 권리도 좋지만, 조금 부드럽게 전달해 줄 수는 없을까 싶다.
어차피 방역 당국이 열일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도 없는데······.
“그런데 제수씨도 게임 만드세요?”
“저는 개발자는 아니고, 그냥 사업부 소속이에요.”
“사업부?”
“오빠가 같은 개발자들이 게임을 만들면, 제가 잘 포장해서 파는 느낌?”
“오오, 엘리트라는 느낌이 드네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처음 연아의 미모에 놀랐던 것도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제수씨가 이 녀석 건져줘서 다행이에요.”
“다행이요?”
“제수씨 만나기 직전에 전 여친이랑 헤어지고선 이 녀석 장난 아니었거든요.”
“맞아. 이 놈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지?”
“아니, 고등학교 때는 비교적 얌전했지. 중학교 때가 문제였지.”
저, 저기요? 결혼할 사람 소개하는 자리에서 전 여친 이야기는 반칙 아닙니까?
게다가 흑염룡 사육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데?
“오빠, 어릴 때는 어땠어요?”
“음······. 꼴통?”
“꼴통이죠.”
“꼴통이었지.”
친구 놈들이 동시에 한 단어를 투척했다. 이것들이 나 몰래 대본이라도 맞추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꼴통이요?”
“솔직히 이놈이 사고 쳐서, 올림픽 못 나갔지만······. 어려서부터 금메달은 문제없다는 소릴 듣고 자란 놈이었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얼마나 건방졌는지 몰라요.”
“하아······. 너무들 하시네.”
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리지만, 아무도 내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바보 되어야 하는 날이지. 입 다물고 맞자. 그래야 빨리 끝난다.
“그 피지컬에 시건방까지 더해지니까, 형들이 이 놈 정신교육 시키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런데요?”
“형들이 죄다 정신교육을 당했죠. 사실 그때 똥군기 장난 아니던 시절이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편했죠.”
“그게 유일한 이 녀석의 쓰임새였지. 맨날 인상 쓰고 다녀서 말 붙이기도 힘들었잖아. 게다가 가끔씩 놀자고 붙잡으면 집에 빨리 가야 한다고, 우리한테 화내고.”
“아! 그, 그건······.”
“아니라고 하지 마라. 교차검증 끝난지 20년 된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
그때 잠깐 TV에서 방영해주는 애니메이션을 본방사수해야 하던 시기였기에······.
“그런데 전 여친과 헤어지고서 오빠가 어땠는데요?”
역시 연아의 관심사는 이쪽인 모양이다.
“살벌했죠. 맨날 그 무슨 송부장인가 뭔가를 부르짖으며 온갖 욕지거리를 다 내뱉는데······.”
“에이, 헬스장 관장 아닐까 봐, 펌핑 너무 키우시네. 욕은 그렇게까지 안 했죠.”
내가 슬쩍 이야기를 희석했다. 이 놈들 허풍은 너무 독해, 그러니 물 좀 타자.
“그래, 욕은 안 했지. 소리 지르고 난동을 부려서 그렇지.”
“난동이라니요. 정말 이러실 겁니까?”
“너, 기억 안 나? 예전에 니네 회사 후임라던 그······. 뭐였더라? 홍길동?”
“아! 야, 야. 그 이야기 스톱.”
이건 정말로 안 좋은 이야기다. 나는 치킨을 들어 급히 친구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
“어?”
“가만히 좀 있어봐.”
“······네.”
“계속해주세요.”
“네? 네.”
묘하게 달라진 연아의 분위기, 이제야 이 놈들도 눈치를 챈 것 같다.
그저 이쁘장한 친구 애인이 아니라, 대기업 오너를 꿈꾸는 카리스마 넘치는 기업인의 자질이 눈을 떴다.
그런건, 이럴 때 그런 눈 뜨지 않아도 괜찮은데······.
결국 친구놈들은 뭔가 항거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홀린 듯이 제 기억 속을 더듬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어떻게 된 거냐면, 이 녀석이 지 괴롭다고 우리를 회사 앞으로 불렀는데, 마침 후임이라는 친구도 지인들과 한잔 하고 있던 거지.”
결국 연아에게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