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야! 일정표에서 왜 내 것이 뒤로 밀렸냐? 내가 이거 2주 전부터 말했어, 안 했어?”
오늘도 표세인은 아침부터 샤우팅이었다.
‘정말 아침부터 기운도 좋지.’
홍기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난리가 벌어진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외주팀의 비애랄까? 애초에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연거푸 엎어지며 회사 상황이 악화되자, 돌파구를 찾아볼 요량으로 만들어 본 외주개발팀.
달랑 기획 2명을 붙여놓고 그 외 리소스는 앵벌이 하듯이 타팀 개발자들 일정에 사정사정해서 밀어넣어야 하는 업무였다.
상식 밖의 프로젝트, 상식 밖의 일 처리였다. 중소기업의 프로세스라는 것이 때때로 주먹구구 식인 것은 사실이다.
만약 담당자가 표세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엎어졌을 일이지만, 저 남자는 도무지 포기할 줄을 모르고, 아등바등 일을 처리해내고 있다.
“야, 윤현창! 헛소리 말고 이거 해놔라. 픽스 끝난 일정을 뒤엎는 법이 어디 있냐?”
“그럼 니가 임마, 팀장님한테 가서 쇼부치던지!”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래, 내가 직접 간다.”
“야야, 가지마! 너 이번에도 찍히면!”
표세인이 정말로 팀장에게 가려 하자, 오히려 윤현창이 그를 붙잡았다.
“······하아, 일단 내가 팀장님께 말씀드려볼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결국 보다 못한 윤현창이 표세인을 진정시켰다.
“진짜 짜증나네.”
씩씩 거리며 자리에 주저 앉은 표세인은 순간, 자신 앞에 서있는 홍기도를 발견했다.
“넌 누구냐?”
“홍기도입니다. 오늘부터 외주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아아, 넌 또 무슨 사고를 쳤냐?”
“안쳤는데요?”
“그럼 여기로 보내질 일이 없는데?”
표세인은 말 없이 홍기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이 홍기도는 무척 못마땅했다.
만나서 반갑다거나, 앞으로 잘 해보자라는 인사 따위는 없었다.
“저기 서류철 정리하고 대충 자리 만들어라, 오후에 설비팀에서 컴퓨터 가져온다더라.”
“네.”
홍기도는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사에서 가장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남자의 밑으로 오게 되다니, 설마 송부장 술자리를 몇 번 거절한 것이 이런 결과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거 피곤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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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스템 기획 끝났어?”
“네. 인트라넷에 올려뒀습니다.”
“흐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기도는 자신의 기획서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설렁설렁 놀기 위해서는 책잡힐 일이 없어야 하는 법.
홍기도는 나름대로 자신의 기획서 작성 스킬에 자부심이 있었다.
“아, 이게······. 아니다. 가봐라.”
마치, 귀찮다는 듯 한 태도였다. 역시 이 사람은 별로다.
퇴근도 하지 않고 그저 회사에 지박령처럼 들러붙어 있을 뿐인, 별 볼 일 없는 남자.
언제나 인상 쓴 얼굴로 소리나 치고, 다른 파트와 드잡이질을 일삼고, 한팀이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타입이 아닐까?
‘뭐 내 알바 아니지.’
의외로 함께 야근하자며 달라 붙는 타입이 아니란 것은 좋았다.
딱 자신이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일감만 던져 놓고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점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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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못해먹겠네.”
표세인은 짜증이 솟구쳤다. 그는 모니터에 출력된 홍기도의 기획서를 수정하며 연신 혀를 찼다.
“왜 그렇게 짜증이냐? 밥은 먹었어?”
식사를 마치고 온 윤현창이 넌지시 표세인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이따 친구놈들 불러서 한잔하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왜 일을 하면서 그렇게 인상을 써? 어후, 홍기도라고 했나? 이렇게 수정사항이 많으면······. 걔 일 못해?”
말하는 와중에도 표세인의 손은 홍기도의 기획서를 계속 수정해 나가고 있었다.
“아니. 아직 대리도 못 달았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그런데 왜 이렇게 고쳐? 문제가 많은 것 아냐?”
“문제는 홍기도가 아니라, 송부장이지. 멀쩡한 기획서를 오케이 해주는 양반이냐?”
“아, 하긴······.”
제대로 읽지 않으니, 다소 허황하고 영양가 없는 양식으로 눈을 홀리지 않으면, 도무지 통과되지 않는다.
결국 표세인의 짜증은, 멀쩡한 기획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예, 고칠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잘됐네. 괜찮은 놈 붙여줘서.”
“잘되긴!”
“?”
“이렇게 일 잘하는 놈을 이런 거지 같은 파트에 붙이면 어떻게 해? 규모 있는 프로젝트로 보내서 경험을 쌓게 해야지.”
“음······. 너 진짜 변죽 맞추기 어렵다.”
갑작스러운 기피 부서 발령과 송부장과의 악연, 이 모든 것들이 연달아 벌어지며 표세인은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이 녀석 일 하나는 잘하는 놈인데, 곧 이직하려나······.’
이미 이 회사는 기울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그래도 세븐 메이지라는 캐시카우가 있기에 근근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곪아버렸다.
지난번 인수합병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대표가 주가 조작을 하려던 것이 적발되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정도.
이 상황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무능하다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라. 이번 합병설은 진짜 같더라.”
“맥베스?”
“어.”
“맥베스가 미쳤냐? 캐시카우 챙긴다음 나머지는 싹 정리해고 선이겠지.”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인원이 몇인데······.”
윤현창의 말에 표세인은 눈을 흘겨뜨며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이직 준비해야 하나?”
“항상 대비는 하고 있어야지.”
“그래서 넌 무슨 대비를 하고 있는데?”
“과장 다는게 우선이지. 핫바리 대리짬으로 이동해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지.”
“그건 맞는 말이지.”
윤현창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표세인은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기획서 수정에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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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일로 여기까지 사람을 불러냈냐?”
“아, 그냥 요즘 회사사람들과 술먹기가 좀 뭐해서.”
표세인의 말에 친구들은 이해한다는 듯,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래. 한잔하자.”
표세인 일행은 그길로 근처 펍으로 향했다.
“푸하!”
간단한 안주와 함께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니,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요즘 많이 힘든가 보다?”
“어. 힘들다.”
“얼마 전까진 잘 나간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 나도 뭐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만 들은 것 같은데?”
“그 기간 끝났다.”
“왜? 무슨 군대도 아니고 신병 기간이라도 있냐? 이미 대리씩이나 달아 놓고?”
“사내정친지, 뭔지······. 그런거에 휘말렸나봐, 요즘 아주 죽겠다.”
표세인은 연거푸 맥주를 들이켜고는, 이내 글라스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어서 들이키기 시작했다.
“너 여전히 그렇게 먹냐?”
보통은 소맥이 소주만 마시는 것 보다 속도가 잘 조절되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퍼마시면 거의 병나발을 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표세인이 잔을 몇 번 들어 올릴 때마다, 소주병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
“어?”
술을 퍼붓듯이 잔을 비워내던 중에 표세인의 눈에 홍기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는 사람이야?”
“어, 그냥 회사 사람.”
아직까지도 표세인에게 홍기도는 동료라기보다는 잠시 스쳐 갈 인연에 불과했다.
일머리도 있는 녀석이 어쩌다 외주개발 같은 한직으로 발령 났는지는 몰라도, 오래 함께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신경 끄고 술이나 마셔.”
표세인은 친구들의 술잔을 채워주고 자신도 곧장 잔을 비웠다.
“안주 먹어가면서 마셔라. 속버린다.”
“알았다.”
표세인은 친구의 성화에 앞에놓인 마른 안주를 한줌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였다.
-쿠당탕!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가 술집에 울려퍼졌다.
“야, 네 지인 싸움 났나 본데?”
“싸움?”
눈을 돌리자, 홍기도가 어떤 남자에게 멱살을 잡힌 상황이었다.
“어? 남자끼리 스킨쉽 같은 거 하는거 아닌데?”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오빠, 그만해!”
“닥쳐, 바람이나 피는 년이!”
“어허, 바람이라니······. 나는 그냥 고민상담을 해주고 있던 것 뿐이야.”
“내 여자친구 고민을 내가 아니라, 왜 네가 상담해주냐!”
“음······. 그건 네가 이모양이니까?”
홍기도는 멱살이 잡힌 상황에서도 얄미운 말을 골라하며 상대를 도발했다.
“야, 네 지인 주먹 좀 쓰냐? 도발기가 장난 아닌데?”
“주먹은 둘째치고, 자세가 저래서야. 상대 공격 가드나 제대로 하겠나······.”
나름 운동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일까? 표세인과 친구들은 홍기도의 자세를 품평하며 우려섞인 시선을 교환했다.
“안 도와줘도 되겠냐?”
“네 지인은 몰라도, 멱살 잡은 놈은 주먹질 좀 해본 놈 같은데?”
“저 자세로 체중실린 주먹 들어가면, 이빨 나간다.”
“저러다 말겠지. 신경꺼.”
표세인은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저 상태로 대치하다 주변의 만류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말로 주먹이 오가는 상황으로 발전하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퍽! 와당탕!
표세인의 예상과는 달리, 멱살 잡은 남자의 주먹이 홍기도의 안면을 강타했다.
무방비한 상태로 서 있던 홍기도는 주먹 한 방에 바닥을 굴렀고, 뒤를 이어 발길질이 뒤따랐다.
“뭣도 아닌 새끼가! 아주 죽으려고!”
“아이쌍······.”
“넌 또 뭐······.”
홍기도를 흠씬 걷어차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난 표세인을 보고 흠칫 놀랐다.
남자는 이런 경험이 적지 않았다. 자신보다 크고 몸 좋은 상대와도 몇 번이고 주먹다짐을 벌인 전적이 있었다.
당장 홍기도만해도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다.
하지만 뭐랄까, 양아치의 생존 본능이랄까?
눈앞에 있는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는 함부로 들이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만하고 물러나지?”
표세인은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지금 표세인의 머릿속은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어째서 자신은 항상 이런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가?
고작 며칠 정도 얼굴을 맞대고 일한 사이. 그마저도 얼마 후면 끝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계이지 않나?
하지만 그런데도 못본 척 넘어갈 수가 없다.
“······넌 또 뭐야.”
내심은 겁이 났지만, 도저히 여자친구 앞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저기요.”
“네?”
“이런 놈이랑 계속 사귈거에요?”
“아, 아니······. 몇 번이나 헤어지자고 했는데······.”
아무래도 여자 쪽은 진즉에 마음의 정리가 끝난 모양.
“다행이네. 여자친구 앞에서 꼽주는 것도 좀 그랬는데······.”
“무슨 개소······ 억!”
표세인은 남자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벽에 처박듯이 밀어냈다.
“켁! 켁······. 이거 놔······.”
남자는 켁켁대며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표세인의 팔을 떼어낼 방도가 없었다.
“씨발 뭔데!”
급기야 남자의 친구들로 보이는 이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가오면······. 찬다?”
표세인의 경고에 남자의 친구들은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작 표세인의 친구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달려왔다.
“바, 발은 금지!”
“야, 야! 뼈 부러트리면 깽값 감당 못 한다!”
친구들의 말에 표세인은 아! 그렇군. 하는 얼굴로 켁켁대는 남자의 멱살을 놓고 등을 돌렸다.
“그냥 가지?”
제법 술기운이 돈 것인지, 표세인은 제발 들어와 보라는 표정으로 주먹을 풀었다.
< 저랑 팀플레이 한 번 해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