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표세인과 조연아가 친구들을 만나고 있던 시각, 홍기도 역시 남궁원과 함송희 등과 함께 조촐한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의외로 이번 술자리는 홍기도가 아닌, 남궁원이 주도한 술자리였다.
“그래서 그게 너랑 표세인 팀장님이 친해진 배경이란 거야?”
“일단 스타트 지점이기는 했지.”
결정적으로 자신이 표세인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그를 보필하리라, 결심한 것은 이후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시작은 저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주말 사이에 표세인 팀장님이 달라졌다?”
“응. 아마도 그때 여자친구분 만났을 거야.”
홍기도는 자신이 맞았던 사실까지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정말로 표세인 팀장님이 그렇게 까칠하신 시절이 있었어요?”
“응. 진짜로, 전 회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기억할걸?”
“어, 맞아. 나도 어렴풋이 기억나. 언젠가부터 사람이 좀 달라졌지. 나는 그때 뭔가 좀 꺾였다 싶었는데······.”
“그러나저 이제 머지않아 전설속의 환상종 보게 되겠네.”
“그러네. 실존했었다니······.”
“정말 궁금하네요.”
세 사람은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며 감회에 찬 표정을 지었다.
표세인은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그의 여자친구를 목격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전에 너 표세인 팀장님에게 무슨 빚을 진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이거야? 너 맞을 때 구해준 것?”
“아니, 이것도 이건데······. 그건 좀 다른 일.”
“그건 뭔데, 말 한 김에 다 말해봐.”
“어. 싫어.”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꽁꽁 숨기냐?”
“어쩔티비.”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너 이거 모르냐?”
“그게 뭔데?”
순간 홍기도와 함송희가 시선을 교차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보면 너 진짜 트랜드에 뒤쳐진 타입인거 알지?”
“트랜드?”
“언니, 저건 나름 유명한 밈이에요.”
“일하기도 바빠 죽겠는 데, 그딴 것까지 공부해야 하냐?”
남궁원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그보다, 너 마음 잡은 거냐?”
“무슨 마음을 잡아?”
“좀비로얄로 안가고, 남기로 한 거야?”
“언니, 안 가면 안 돼요?”
“누구 마음대로 날 보내고 말고 하는 거냐.”
“어? 말을 돌려? 뭐지? 이 배신자의 느낌은?”
“죽을래!”
남궁원은 까부는 홍기도에게 눈을 흘기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그때 솔직히 좀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그렇지. 깨비몬도 난리 났고, 이제 곧 표세인 팀장님이 박대표님 보다 더 부자 되겠지.”
깨비몬은 단순히 게임 대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례 없는 수준의 캐릭터 사업의 로열티 수익까지 더해진다면······.
어쩌면 단일 IP로는 국내 최고의······. 아니, 글로벌 스케일로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고보면 조연아 실장님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아무리 회장 따님이라도 이정도 사업 수완······. 보통이 아니시지.”
재벌 2세치고 시작부터 프로젝트를 대성공 시킨 전례는 의외로 드물다.
하지만 조연아는 결국 성공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불만과 우려도 터져나왔더랬다.
회장의 후계자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회사 돈을 물쓰듯 펑펑 써재끼는 탓에 주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그러나 그 결과는 압도적인 성과.
“역시 여신님······.”
함송희는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표세인 팀장님과 조연아 실장님. 두분 모두 정말 멋지신 것 같아요.”
“얘는 은근히 금사빠 기질이 있는 것 같지 않아?”
“헤헤, 저 그런말 많이 들어요.”
“위험한 성격이네······.”
“지금까지 별 문제 없었어?”
“전혀 없었어요.”
“의외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임자가 있었거든요. 항상 짝사랑이었죠. 전 익숙해요. 덕질이.”
함송희는 뭐가 좋은지 혼자 키득거렸다.
“그보다 너 혹시 들은 것 있냐?”
“뭐?”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서.”
프로그래머들이 막바지 준비로 바빠지는 시기, 기획팀은 서서히 다음 프로젝트 준비에 돌입한다.
이 흐름이 깨어지기 시작하면 회사가 개발팀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다는 의미였다.
“요즘 표세인 팀장님 바쁘시잖아. 함전무님 후계자 어쩌고 하는 문제로, 곧 이야기가 있겠지.”
“아······. 판호······. 땡긴다.”
남궁원은 슬쩍 입맛을 다셨다.
현재 국내 게임 개발자의 커리어 중에서 중국에서 성공한 작품의 개발자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타이틀이었다.
향상심이 강한 남궁원의 입장에서는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더군다나 표세인의 프로젝트다.
이번에도 모두를 놀라게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튼 따로 들은 것은 없는데······. 이런 상황이면 그래도 짐작가는 것이 있지.”
“너 따위가 어떻게 표세인 팀장님 생각을 추측하냐?”
“아니, 사실 표세인 팀장님 생각이라는 것이 결과가 놀랍지, 생각하는 매커니즘 자체는 무척 단순하거든.”
“단순?”
“단순하다고요?”
표세인의 사고방식이 단순하다는 말에 남궁원과 함송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모두를 놀라게하는 표세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의 사고 방식이 단순하다니?
“생각해봐, 판호야.”
“그래. 판호지. 그게 뭐?”
“표세인 팀장님 방식이면 철저하게 중국 시장을 공략하려고 하겠지.”
“그렇······겠지?”
뭔가 별거 없는데, 묘하게 집중하게 된다. 표세인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와 홍기도의 스피치 스킬이 묘하게도 청자의 집중력을 돋군다.
“장르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중국 문화가 물씬 들어간 컨셉이겠지. 게다가 여러 정황상······. FPS 장르 + 알파가 되지 않겠어?”
“흐음······. 그거라면 역시 AOS일까?”
오랫동안 중국 모바일 시장을 핫하게 달군 두가지 장르.
확실히 표세인이라면 생각할 법한 추측이었다.
“AOS······. 확실히 그게 가능성이 높지.”
AOS 장르는 사실 국내에서만 사용되는 명칭으로 해외에서는 MOBA(다중사용자 온라인 전투 아레나, 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라는 장르명으로 통하고 있다.
다른 유저와의 컨트롤 싸움과 레벨업을 통한 성장요소, 거기에 더해 상대 진영을 파괴하는 공성 요소까지.
대전류 게임치고는 매우 다양한 컨텐츠가 한 자리에 뭉쳐있는 덕분에 AOS 장르는 한번 인기몰이에 성공하면 쉽사리 인기가 식지 않는 장르이기도 했다.
“결국 밸런스······. 그게 이 장르의 핵심이지.”
성장요소가 가미된 대전게임인 만큼 밸런스가 무엇보다도 생명이다.
“이거 고민해볼 가치가 있겠는데?”
“흥미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자신의 일에 흥미가 생긴다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게임이 좋아서 게임 회사에 취직하는 개발자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들 중에서 자신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프로젝트를 맡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거 내가 찜한다.”
“찜?”
“밸런스 기획.”
AOS 장르의 최고 중요 파트는 밸런스다. 남궁원은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번뜩였다.
만약 이 시점에서 그럴 수 없다고 나섰다가는 물어 뜯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흠······. 밸런스······. 노른자를 가져가시겠다?”
“너, 너는 관심도 없잖아?”
홍기도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티를 내자, 남궁원이 바짝 긴장했다.
“좋아, 대신 다음번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네가 양보해 주는 거다?”
“······오케이. 콜!”
뭐가 어찌되었든 밸런스라는 먹잇감을 놓칠 수 없었던 남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함송희는 생각했다.
‘이, 이거 사기다!’
-띠링!
[함송희가 간파.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함송희는 지금 홍기도가 대놓고 야바위를 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궁원에게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크크큭. 좋아. 안그래도 예전부터 생각해놓았던 아이디어가 있지.”
이미 남궁원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신 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
*
“흐음~ 평화를 사랑한다고 떠드는 것 치고는 의외로 폭력사태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으시네요?”
“으음······.”
친구놈들의 폭로 덕분에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연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가를 늘어트렸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젊은 시절의 치기였으니, 모쪼록 관대하게 넘어가 주시죠.”
내 말에 연아는 피식 웃었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지난번 함전무님 일도 그렇고······.”
헉! 함전무님과의 일을 어떻게 아는 거지?
“뭘 그렇게 놀라? 설마 함전무님이 아빠나, 이상무님에게까지 비밀로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아아······.”
함전무님······. 비밀로 해준다면서요!
“그래도 다행이네. 큰일이 없어서.”
“맹세컨대, 전치 1주일도 나오지 않도록 스무스하게 해결했습니다!”
“전치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 자체가 문제 아냐?”
그건 맞는 말이죠.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연아가 슬그머니 내 뒤로 다가와 내 목을 감쌌다.
“다 알아.”
“뭘 알아?”
“오빠는 항상 자신 보다 남을 위해서 화를 내는 성격이란 것 쯤은 알지.”
따뜻하다.
연아에게서 전달되는 온기가 슬그머니 가슴까지 내려와 감싸는 느낌이다.
이런 것이 안정감이라고 하는 거겠지?
이 갸냛픈 팔에서 어떻게 이런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보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뭔데?”
“외부 스튜디오 실장님들 말이야.”
“응.”
“앞으로 어떻게 요리할 거야?”
“관심 갖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어?”
“참견하지 않는거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는 없지.”
연아는 한쪽눈을 찡긋했다.
그래, 이게 연아의 본 모습이지.
조회장과는 달리, 연아는 천성적인 지도자 성향이 있다.
조회장이 방관형이라면, 연아는 고삐를 당기지는 않더라도 결코 손에서 놓치 않는 타입니다.
“아마······.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지 않을까?”
“힘을 합쳐? 그러면 안되는 것 아냐?”
연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오빠는 혼자니까 불리한 것 맞잖아?”
“식탁위에, 치킨, 피자, 족발 쌓이면 좋은 일이지.”
“?”
“두고봐, 알아서들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올거야.”
“확신해?”
“물론이지. 양실장님의 자료를 보면서 다름 철두철미하게 계획했어. 그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법은 이게 최고야.”
“그럴까?”
“그럼, 게다가 지난번 술자리까지 슬쩍 흘렸으니······.”
“슬쩍 흘려?”
“그런게 있어.”
사람마다 어울리는 조련 기술이 있기 마련. 보정훈, 최기환, 성진규와 같이 나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 이들을 한꺼번에 움직이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종의 청개구리 같은 스타일이다. 떼어놓으려하면 더 달라 붙는 법.
그들이 한데 뭉쳐야, 한꺼번에 삼키기 쉽다.
“흐음······. 오빠는 이럴 때보면 뭔가 영악하달까? 여우 같은 곰?”
“으음······. 내심 동물이라면 호랑이과 동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크크큭. 아이고, 우리 표랑이~ 그걸 바랐어요?”
“······어흥!”
나는 잽싸게 연아를 덮쳤다!
*
*
*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우리 요즘 너무 자주 보지 않냐? 이러다 정들겠어?”
“흥, 배신자. 표세인에게 붙는다더니?”
최기환과 성진규는 보정훈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지난번 자신들을 배신하고 표세인에게 붙을 거라 말했던 것에 앙금이 남은 모습이었다.
“이제 헛소리들 그만해.”
“뭐야, 왜 갑자기 무게 잡냐?”
보정훈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최기환과 성진규 역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 우리는 표세인······. 아니, 양실장과 문이사까지 전부! 그들 파벌에게 놀아나고 있는 상황이야.”
“뭐?”
“이대로는 우리들 진짜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게 생겼어! 제대로 힘을 합쳐야 해!”
“힘을 합쳐?”
“그래! 우리 셋이 뭉치면 저들이라고 해도 어쩌겠어? 어차피 승부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표세인 혼자 뿐이야!”
“그건 그렇지.”
“확실히 우리가 손을 잡는 것이······.”
보정훈은 최기환과 성진규의 표정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됐으니, 이참에 제대로 연합전선 구축해 보자.”
“그래.”
“그렇도 나쁘진 않겠네.”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배분 비율은?”
“그건 지난번에······.”
“3:3:3이지, 이 자식들아!”
보정훈은 빽 소리쳤다!
< 고작 그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