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AAA급 게임 개발비용이 수백억 원을 넘어 수천억에 도달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산업의 성장과 함께 차츰 높아지던 개발비는 이제는 천억을 훌쩍 넘어 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억은 막대한 액수다. 아직까지도 그 정도 수치에 범접하는 개발비가 투여되는 게임은 그리 흔치 않았다.
“천억······.”
이건 비벼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문이사님과 양실장님까지 동조하는 상황이니, 헛소리는 아니겠지······.’
보정훈과 성진규, 최기환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은 끝났다.
아마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스튜디오 대표들이 확보한 보든 투자금을 합쳐도 이것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세사람의 머릿속에는 천억이라는 막대한 거금보다도, 표세인이 상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의문이었다.
“표세인 팀장님······. 팀장이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보정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표세인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저희로서는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데······.”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 없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설명해 드리지요.”
퉁명스러운 문상훈과는 달리, 양성태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모두의 의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처음 파벌을 구성했을 때부터 약간의 위장 전술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위장전술?”
“아니, 잠깐! 그 말씀은······. 처음부터 양실장님이 표세인 팀장 밑에······.”
“네. 맞습니다.”
“문이사님도?”
“난 아니야!”
“아······.”
“뭐 지금은 맞지만······”
문상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황이 우스웠던지, 피식 웃었다.
“표세인 팀장님.”
“네.”
“대체 정체가 뭡니까? 회장님의 숨겨 놓은 아들이라도 됩니까?”
애초에 양성태부터가 그런 꼬리표를 달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양성태가 처음부터 자신 보다 한참 낮은 직급의 사람을 자신의 윗선으로 모시고 있었다고?
“설마요. 저희 부모님은 시장에서 고깃집 운영하십니다.”
“고깃집······. 역시 어려서부터 고기를 많이 먹여야, 근질이······.”
“아니, 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냐?”
“어? 나 농담한 적 없는데?”
최기환과 성진규의 헛소리는 무시한 채로, 보정훈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도무지 연상되는 부분이 없었다. 대체 이런 상황을 어느 누가 추측해낼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저희끼리의 내기. 제가 이긴 것 맞겠죠?”
“확실히······.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저희가 문이사님과 양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두분께서 진심으로 저희에게 힘을 빌려 주셨을까요?”
결국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었냐는 질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진규와 최기환 역시 각각, 문상훈과 양성태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누가봐도 자신들은 그저 놀아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보정훈이 표세인에게 신경을 곤두세운 상황에서, 의외로 대답은 표세인이 아닌, 문상훈과 양성태에게서 튀어나왔다.
“아주, 머리 좀 굵어졌다고 감히 이 문상훈이를 도끼 눈 뜨고 바라본다, 이거지?”
“도, 도끼눈이라니요.”
“그, 그런거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스튜디오 대표.
하지만 미국지부와, 국내 스튜디오는 규모부터 입지까지 비교 불가할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당장 사내 직급만 해도 차이가 나지 않던가?
준이사급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이사급에는 미치지 못한다.
삼인방 모두 아직은 감히 문상훈과 비벼볼 깜냥이 아니라는 것은 저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진짜로 도움을 주려고 했다. 미국지사와 연계된 투자 펀드를 움직일 생각이었어! 그걸로 양실장과 한판······. 아니, 선의의 경쟁을 해볼까 싶기도 했었지. 그런데 네 녀석의 알량한 담합 덕분에 모두 물 건너갔지.”
“저 역시 동의합니다. 퇴직 후, 투자로 소일을 하고 계신 업계 선배님들께 도움을 청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나름 수익 배분까지 신경써서 작업을 해두었는데, 쓸모없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문상훈의 말에 양실장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반박했다.
‘거짓말하는 낌새는 없다.’
그 말대로 문상훈과 양성태의 말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2인자의 자리를 놓고 끊임 없이 경쟁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그럼, 저 천억이라는 돈은 표세인 팀장······. 님이 혼자서 마련하신 겁니까?”
“음······. 혼자라기 보다는, 이걸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되려나?”
“도움?”
“누구에게?”
천억이나 되는 투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조연준씨 알고 계시죠?”
“아!”
보정훈이 그 답지 않게 놀람이 섞인 탄성을 터트렸다.
천이사의 소개로 만난, 조회장의 장남! 설마 그가 천 억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움직일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설마 이거······.
“혹시 문이사님과 양실장님을 이 친구들에게 보내서······. 천이사님의 주의를 제 쪽으로 집중시킨 겁니까?”
“네.”
표세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저희의 성격을 파악하고 이렇게 될거라는 것까지······.”
“네.”
표세인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문상훈과 양성태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건 말도 안돼······.”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래, 나도 저런 느낌이었지.’
‘저도 그렇습니다.’
‘양실장, 자네는 직접 부딪친 적이 없지 않나?’
‘때로는 곁에서 지켜보기에, 더욱 소름이 돋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렇군.’
문상훈과 양성태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럼 조연준이 표세인 팀장님께 손을 내민 겁니까?”
자신이 거절한 이후에 표세인을 찾았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손을 내밀었다기 보다······. 내민 것은 뒤통수였던 것 같기도······.”
조연준은 손대신 통수를 내밀었고, 자신은 그걸 후려쳤을 뿐.
표세인의 말에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던 문상훈과 양성태가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표현 한 번 기가 막히구만.”
“네,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지요.”
“그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함전무님께 무례하게 굴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 작전에 한 손 거들고 싶었는데······. 뭐 어쨌든 아주 잘했어.”
문상훈이 표세인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표세인이 감사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바로 얼마전 한판 붙은 사이가 아니었나?’
어떤 이유로 한 배타게 된 것인지, 천하의 문상훈이 표세인의 아래를 자처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친근해보인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 함께 미국에 갔었지. 그곳에서 무언가 있었던 것일까?’
의외로 보정훈은 정확히 사실을 짚어냈다.
“어쨌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표세인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렇다. 어차피 표세인과 문상훈, 양성태. 세 사람의 관계야 당장 고민한다고 그 속사정을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자인 표세인의 행보.
“지난번에 분명 몰아주기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흠흠, 그렇지. 깨끗하게 승복하지.”
“후우, 이렇게까지 크게 차이가 나버렸는데, 방법이 있나.”
최기환과 성진규는 깨끗이 승복했다.
“그럼, 세분께서 만드신 새 프로젝트의 기획안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
“그걸 왜?”
컨셉 기획이라는 것은 그저, 어떤 것을 만들겠다~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남의 것을 탐낼 이유가 없으니, 더더욱 아리송한 상황.
“어쨌든 한 배를 탄 상황이니. 여러분의 계획도 가급적 수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수용해?”
“한 배를 타?”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고, 표세인의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는 문상훈과 양성태만이 입가를 늘이며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몰아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럼, 개발도 함께 가시는 거죠.”
“어?”
“개발을?”
싫다, 좋다를 떠나서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기에 세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기회에 세분 스튜디오 합치시죠.”
“어?”
“뭐라고?”
스튜디오 통합!
그 안건의 무게보다도 그런 큰 문제를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표세인의 모습이 더욱 놀랐다.
“마침 보정훈 실장님 쪽 건물 위쪽이 곧 빌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 분기가 끝나기 전에 합사 준비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합사?”
“스튜디오를 이전하라고?”
단순히 개발을 함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는 아예 셋을 한 덩이로 뭉쳐버리겠단다.
“이전과 합사 문제는 양실장님께서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분의 업무 프로세스 합치 부분에 대해서는 문이사님께서 조율해주시기 바랍니다.”
“들었지?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한번 놀아보자고.”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공동개발, 사무실 이전, 스튜디오 통합.
너무 황당한 일들이 연거푸 벌어지는 통에 보정훈 일행은 그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제 저자본 모바일 게임으로 대박을 노리는 시대는 갔습니다. AAA급 게임을 개발하려면 규모 있는 스튜디오 설립이 선행될 필요가 있죠.”
깨비몬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번 프로젝트는 적어도 천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개발이 될 터!
지난번처럼 좀비로얄 개발사 인력들에게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는 불가하다.
“자, 잠깐! 무턱대고 스튜디오를 합쳐버리면 직위체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본사가 쥐고 있는 지분 문제도 복잡한데?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지분은 얼마 되지도 않아.”
결국, 리더는 한 명뿐이다.
보정훈, 성진규, 최기환 모두 서로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사서, 통합한 후에 다시 본사로 붙여넣을 겁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표세인은 넌지시 세사람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우연히도 세분은 전문 파트가 나뉘어있는 상황이니, 당장은 각 파트 리더라는 포지션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그건······.”
프로젝트 리더에서 순식간에 파트 리더로 강등이란 말이 아닌가?
아무리 묘한 분위기에,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멍하니 끌려가는 상황이라도 이건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단 이번 프로젝트에 한해서, 프로젝트 리더를 선정할 권한은 제게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겠지요?”
“그, 그거야 그렇지.”
생각해보니, 어차피 이번 프로젝트는 표세인의 것이다.
그가 키를 쥐는 것은 당연한 일.
“이 참에 세분께서도 서열정리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서열정리?”
“아무리, 세 분 모두 능력이 좋으시다고 하시더라도 동시에 세 분 모두 임원이 되실 수는 없겠죠. 순서 정해야죠. 이참에.”
“······순서를 정한다.”
보정훈과 성진규, 최기환은 동시에 저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채, 깊은 고심에 빠졌다.
“저 공짜로 일 시키는 취미 없습니다. 약속드리죠. 이번 프로젝트 결과로 최소 한 분은 임원 진급 약속드립니다.”
“이, 임원 진급을 약속한다고?”
“어차피 함전무님 퇴직하시지 않습니까? 한 자리 비게 될 판이니까요.”
고작 팀장 따위가 임원 진급을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팀장 직급의 남자는 무려 문상훈과 양성태를 휘하에 두고 있다.
더군다나, 정작 문이사와 양성태의 얼굴에는 당연하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표세인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가능하다.
‘가만, 전무군단의 영향력에 문이사와 양실장이라는 투톱이 밀어붙이면······.’
함전무의 빈자리가 아니라, 없는 자리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더군다나 현재 이상무는 조연아의 그늘에 가려 전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
“심사는 문이사님과 양실장님께서 해주실 겁니다. 모쪼록 최상의 성과를 부탁드립니다. 본인들을 위해서도요.”
표세인의 마지막 말에 순간 주위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강등이라는 생각에 당황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경쟁심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공기가 바뀌고 있다.’
이제 맥베스라는 회사 전체의 판도가 뒤바뀔 것이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깨닫고 가슴이 요동치는 가운데, 표세인은 고요한 시선으로 모두의 표정을 살피면서 생각했다.
‘이걸로 혼수 준비의 첫 단추는 끼워진 셈인가?’
정작 표세인 자신은 그저 프로포즈 준비에 한 발 다가섰다는 것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 클라이막스가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