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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43화 (143/346)

143.

“이걸로 괜찮을까?”

남궁원은 자신이 만든 기획서 초안을 바라보며 손에 쥔 펜 끝을 살짝 깨물었다.

AOS의 기믹을 강조한 FPS.

일반적인 작은 캐릭터들을 내려다보는 탑뷰가 아닌, 8등신의 캐릭터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숄더뷰.

표세인이 전달한 키워드에 남궁원 스스로의 해석과 아이디어를 더했다.

“조금 달라진 느낌이긴한데.”

AOS는 여느 게임 보다도 기존 틀이 강한 게임이다.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RPG 요소에 유닛들이 생산되어 적진으로 향하는 RTS 장르적 요소가 특징.

또한 적의 본진을 함락시켜야한다는 목적과 초반 중간 포탑에서의 힘싸움.

이 공식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색채를 더해야 한다.

남궁원은 이에 대한 돌파구로, 현대 배경에서 날뛰는 고대 중국의 설화와 역사 속에 이름을 떨친 위인들의 기억을 각성한 각성자라는 캐릭터 컨셉.

거기에 더해 기관진식 형태의 중간 포탑을 이용해, 기믹에 따라 주변 배경까지 바뀌어 버리는 과감한 시스템을 떠올렸다.

“부서진 건물을 밟고 뛰는 형식의 파쿠르······. 기관진식 형식의 중간 타워를 부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바꾼다.”

홍기도는 남궁원의 기획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별로냐?”

“현대 배경도 은근히 의상 팔아먹기 좋으니, 오케이. 파쿠르와 중간 타워도 나름대로 개성 있으니, 오케이.”

“캐릭터 컨셉 먹힐까?”

중국인들은 과거 역사와 설화속에 등장하는 위인들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남궁원은 이 부분이 좋은 세일즈 포인트라고 생각했지만, 배기팬츠를 걸친 제천대성이나, 슈트를 걸친 관운장이 무너진 빌딩을 밟고 내달리는 장면이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여겨질지가 걱정이었다.

때때로 기획자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좋은 것 같은데?”

홍기도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직 중국 담당자와의 컨택 일정이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홍기도는 현재 비교적 한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남궁원의 기획 초안 작업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다만 이거 속도감 괜찮을까?”

“이동 속도는 맵사이즈에 맞춰서 속도를 조율하면 되겠지. 경공이나, 근두운 같은 1회용 탈 것을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야.”

“아니, 그거 말고 전투 말야.”

실제 플레이 타임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유저들에게 속도감이 전달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에는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 유저들은 곧장 답답함을 토로한다.

더욱이 AOS와 FPS는 이런 속도감이 여타 게임들보다 훨씬 강조되는 장르다.

“안 그래도 기존의 작은 캐릭터에 탑뷰가 아니라, 큼직한 캐릭터에 숄더뷰야. 속도감 전달에 실패하면······. 으음······.”

“일단 전투 자체는 FPS 형태니까, 교전지역에서는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교전지역이라, 중간 포탑말이지?”

“응. 중국 특유의 목제 기관 같은거 생각중인데······. 솔직히 기상변화 정도 외에는 뭔가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네.”

“딱히 이미지 외에는 시스템적인 아이디어는 없단 말이네?”

“뭐 그렇지.”

남궁원은 다시 팬을 입에 물었고, 홍기도 역시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이거 일단 팀장님께 한번 여쭤보자.”

“어? 아직 완성도 안됐는데?”

“애초에 팀장님 생각이었잖아. 뭔가 생각이 있을 거야. 아이디어도 안 떠오르는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팀장님이 생각이 있다면 어차피 추가해야 하기도 하니까.”

“······그건 그렇네.”

대답은 그렇게하면서도 남궁원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모처럼 손에 쥔 컨셉 기획인데, 자신의 손으로 완벽히 마무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너도 이제 슬슬 표세인 활용법을 익혀야지.”

“활용법?”

“응. 팀장님 같은 훌륭한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문제 아니겠어?”

“음······. 네가 맞는 소리를 하니까, 왠지 짜증나네?”

“그릇이 작으시군요.”

“죽을래?”

“아무튼 너도 이제 표세인 활용능력 시험을 치를 때가 왔군.”

“지난번에는 기능사 어쩌고 하더니······.”

“시대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법! 아무튼 표세인 활용능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윽!”

홍기도는 갑자기 자신의 옆구리를 붙잡고 옆으로 밀려났다.

“팀장님?”

표세인은 곧게 편 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뭘 함부로 활용하냐.”

“흉기로 사람을 찌르다니!”

“엄살 부리지 마라, 고작 손가락 가지고 흉기는 무슨······.”

“손가락으로 기왓장 부술 수 있죠?”

“······.”

“그런 흉악한 물건(?)으로 사람을 찌르다니······.”

“그거 컨셉 문서야?”

표세인은 홍기도를 무시하고 남궁원 앞에 있는 기획서를 가리켰다.

“네.”

“오오, 그럴듯하네. 배경이 현대면, 의상 아이템 바리에이션 늘리기 좋지. 그리고 중간포탑은 기관진식을 통한 기상변화 기믹······.”

“기관진식에 대한 아이디어와 근원거리 밸런스 컨셉이 좀 난감하네요.”

남궁원이 그녀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했다. 자신조차 접해본 적이 없는 장르였기에 다소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것.

“컨셉기획이니, 시스템이나 밸런스까지 너무 세세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긴 한데······. 이렇게 말해도 납득 못하겠지?”

“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오행속성 시스템 추가하고, 기관진식이 발동될 때, 그 해당 속성으로 주변이 바뀌는 거지. 화나 수 속성은 말 안해도 알테고, 금속성이면 벼락이 떨어져서, 금속에 아이템 들고 있는 캐릭터에게 벼락이 떨어지게 해서, 바닥을 보고 사전에 피하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반대로 버프가 가중 되는 방법도 있겠지?”

“아!”

그저 힐끔 훑어보고 떠올린 것 치고는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였다.

게다가 중국풍이라는 면에서도, 시스템의 참신함에서도······.

여러모로 흠잡을 것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면 캐릭터 자체에도 속성값을 부여하고 내성이나 상성 조합을 기획해 볼 수도 있겠네요.”

남궁원은 금방 표세인의 아이디어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러자 표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근원거리 밸런스는 그냥 간단히 생각해. 그냥 근거리를 강하게 해버리고 접근을 어렵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말은 쉽지만······.”

“밸런스는 어차피 개발과정에서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할 거야. 그러니 지금 단계에서 너무 고심하지마. 어쨌든 고생했네, 조금만 다듬으면 회의 진행 가능하겠어.”

“회의요?”

현재 기획팀에서 판호 프로젝트에 할당된 것은 여기 있는 세사람뿐 아닌가?

“문이사님과 보정훈, 최기환, 성진규 실장님들을 모시고 회의를 해야 해. 잘 할 수 있지?”

“네? 그 회의를 제가 진행해요?”

문이사를 포함해 쟁쟁한 스튜디오 대표 삼인방 앞에서 자신이 회의를 진행한다?

“이거 네가 만들었잖아. 당연히 네가 진행해야지. 그리고 나는 지금 판호건으로 개발보다 외부업무에 집중해야 하잖아.”

“그, 그건 알지만······. 정말 괜찮나요?”

남궁원은 여전히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좀비로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좀비로얄이야, 원래 외부개발사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하던 것을 중간에 참여해서 컨트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컨셉기획에 임원급 회의까지 주관한다?

이건 표세인의 대리역할이나 마찬가지다. 메인디렉터 역할이나 다름 없지 않나?

“권차장도 있는데······.”

“권차장은 깨비몬 마무리 맡아줘야지. 개발 첫단계와 마무리 단계 중에서 뭐가 비중이 크겠어.”

“그건 그렇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못하겠어?”

“아,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비로소 남궁원은 본래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좋았어. 믿는다.”

“네!”

“그럼 나는 간다.”

“또 어디가세요?”

한발 물러나 있던 홍기도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참, 이걸 놓고 갈뻔 했네.”

표세인은 홍기도의 뒷덜미를 잡았다.

“저도 가요? 잠깐, 어딘지는 말해 주셔야죠.”

“공항.”

“출장 가세요?”

“아니, 이번에는 손님이 방문했어.”

“손님?”

하비 로스.

판호 프로젝트의 투자자께서 직접 한국을 방문한 것.

그러나, 하필 스튜디오 통합 건으로 제임스가 갑자기 바빠진 탓에, 표세인 혼자 하비를 마중해야 했다.

“하비도 한국어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통역기(?) 하나는 준비하는 것이 좋다.

표세인은 그렇게 홍기도를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

*

*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약간의 구름. 더없이 멋진 날씨였지만 하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뜻하지 않은 동행자 때문이었다.

“에머리. 정말로 괜찮은거지?”

이미 몇 번이나 대답을 들었음에도, 하비는 기어코 다시 한번 에머리의 눈치를 살폈다.

“내 아들과의 일은 비즈니스잖아? 정말로 신경 쓸 것 없다니까? 게다가 제임스에게 맡기겠다면서? 어차피 둘 다 내 아들이야.”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그래서 갑자기 한국은 왜 가는 거야?”

“비밀이라니까?”

에머리는 한 쪽눈을 찡긋하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방법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기분이 내킬때까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에머리와 하비의 아내와는 오랜 친구였다. 미국 상류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한국계 미국인들이었기에 그들은 퍽 가까운 사이였다.

그 인연 덕분에 하비는 조연준과도 연이 닿았던 것.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덕분에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비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당신의 두 아들은 느낌이······. 정말 다르더군.”

“개성적이지?”

이번에도 에머리는 싱긋 웃었다.

“개성······.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뭐야, 지금 내 앞에서 내 아들들을 흉보려는 거야?”

“아니, 그런 의도는 없어. 다만, 나는 조연준밖에 몰랐고, 맥베스가 네 전남편의 회사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제임스의 등장 이후, 하비는 에머리와 맥베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오랜 지인이라고는 해도, 에머리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어차피 와이프의 친구였지, 자신의 친구는 아니었다.

“솔직히 너희 가족사에 내가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래도 돈 벌게 될거야. 그건 보증할게.”

“보증?”

에머리는 자식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거의 만나지 않는 다고 했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다소 쿨한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보증이라. 한참이나 만나지 못한 이들일 텐데도, 굳건한 믿음이 느껴졌다.

“우리 가족들이 돈 버는 재주는 있거든.”

“그런가? 그건 나쁘지 않은 이야기군.”

“그보다 공항으로는 누가 마중 나오는 거지?”

“표세인이라는 이름이었어. 제임스가 급히 볼일이 생겼다며, 양해를 구한다더군.”

“표세인?”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몰라.”

“그런 눈치가 아닌데?”

하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에머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정말로 처음이야. 그래······. 제임스 대신 그가 마중을 나온다, 이거지.”

“그 표정, 뭔가 불길한데?”

에머리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오르자, 하비는 내심 긴장했다.

“나 부탁하나만 할게, 당신은 어차피 시차 적응 때문에 호텔에서 쉬어야 하잖아?”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 시간 동안 표세인을 좀 빌려줘.”

“그게 대체 무슨······.”

하비는 질문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에머리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서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

“기대되네. 이렇게 곧장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걸?”

에머리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오른 얼굴이었다.

< 치킨집을 차리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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