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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45화 (145/346)

145.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그래서 그 사람 호텔까지 안내하는 것이 오늘 할 일의 전부에요?”

“그렇지 않겠어? 시차 적응도 해야 할 텐데, 곧장 업무 이야기를 나누기도 좀 그렇잖아?”

홍켓몬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냐?”

“아니, 뭔가 그런 느낌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슨 느낌?”

또 이 녀석 특유의 촉이 발동한 걸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이 녀석도 하비는 처음 만나는 것 아닌가?

“뭐 바쁜 일이라도 있어?”

“없죠.”

홍켓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좀 찝찝한데······.’ 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정확히 느낌이 어떤데?”

“저는 일찍 집에 가고 팀장님이 늦게 귀가하실 것 같다는 느낌?”

평소에도 그러잖아?

“나 놀리려는 거였냐?”

“아니요. 진짜 그런 느낌이에요.”

“걱정 마, 내가 너 못 가게 붙잡을게. 재주껏 발빼 보던지.”

“아······.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음······. 좀 찝찝한데······.”

홍켓몬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신경을 끄기로했다.

“진짠데······.”

홍켓몬이 머리를 긁적이며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 한 귀로 흘리자.

“그런데 팀장님.”

“왜?”

“결혼 날짜 잡히셨다고 했잖아요.”

“어. 그렇지?”

“그러면 프로포즈는 하신 건가요?”

홍켓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준비 중이야. 거의 끝나가고 있어.”

“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니, 좀 늦은 것은 나도 아는데 갑자기 상황이 변해서······.”

프러포즈를 하고 난 뒤에 결혼 날짜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연아가 미국에서 갑자기 결혼 날짜를 들이밀 줄은 나도 몰랐었다.

내가 딱히 남자 체면 운운하는 소리에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소 위축되는 것은 사실이다.

서둘러 마무리해야지.

“왜 저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으신 거죠?”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결국, 또 쓸데없는 소리였나 보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팀장님 친구 별로 없으시잖아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친구가 왜 없냐?”

“독신 친구 많아요?”

“······이제 많지는 않지.”

“그거 보세요. 혼자서 생각해봤자, 식겁한 아이디어만 나올 게 분명하다니까요? 말씀해보세요.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시죠?”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확실하죠?”

“응.”

결혼식 끝나고 내 결혼 상대가 연아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때 말해줄게.

“결혼식 끝나고 말해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죠?”

와, 오늘 이 녀석 신기 제대로네······.

“너 어릴 적에 점 보러 간 적 없냐?”

“없어요. 우리 엄마 교회 다니세요. 팀장님은요?”

“나는 한 번 정도? 어쨌든 아쉽네.”

“뭐가요?”

“갔으면 너는 신내림 받자고 했을 것 같은데······. 그랬으면, 지금 너랑 헛소리하고 있을 일도 없었을 텐데······.”

“하하하, 과연 그럴까요?”

“······오늘 같은 날, 그렇게 웃으면 무서워서 디펜스 모드 발동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좀 떨어지자.”

이래저래, 가끔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녀석이다.

“아, 게이트 열렸네요.”

홍기도의 말대로 입국 게이트를 통해 스멀스멀 인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비 얼굴 기억하지?”

“네. 남자 얼굴이라 곧 잊겠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오는 길에 하비의 사진을 공유하며 얼굴을 기억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이 녀석이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니, 내가 놓쳐도 잘 알아볼 것이다.

“아, 저기 오네요.”

“그러게, 그런데 짐이 너무 단출한 것 아냐?”

하비는 푸른색 셔츠에 흰색 면바지 그리고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게이트를 나오려 하고 있었다.

“부자니까, 여기 와서 전부 구입한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그럴까? 부자들은 원래 그러나?”

“이제 팀장님도 부자잖아요?”

“내가 벌써 저 정도에 비빌 레벨은 아니지.”

깨비몬은 아직 출시 전이지만, 연아가 캐릭터 사업을 기대 이상으로 성공시킨 덕분에 아마도 내 명의의 법인에는 상당한 자금이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바쁘고, 그런 쪽은 제임스에게 맡겨두고 일절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뭐 얼마나 돈이 쌓였는지 나도 잘 모른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예요?”

“어?”

하비의 옆에는 그야말로 곱게 나이 드셨다는 말이 절로 연상되는 여성이 함께하고 있었다.

명품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한눈에도 멋진 패션으로 치장한 여성.

젊은 시절에는 눈에 확 띄는 미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은 지금도 눈길을 잡아끄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와이프분인가?”

“헤에, 이런 미팅에 아내와 함께라니, 상당히 금실이 좋은가 보네요?”

“아니, 뭔가······. 부부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거리가 좁혀질수록 불길한 느낌은 점차 확신으로 바뀐다.

특유의 늘씬하고 꼿꼿한 체형부터, 안면의 윤곽과 이목구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지 않나?

‘연아와 닮았어?’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반갑습니다. 하비입니다.”

다소 딱딱하고 어색한 한국어였다. 나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곧장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표세인입니다.”

가벼운 악수를 후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비의 곁에 있는 여성에게로 향했다.

“반가워요. 에머리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나는 에머리와도 악수를 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시차 적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호텔에서 조금 휴식할 생각인데······. 에머리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일단은 제 비즈니스 파트너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갑자기 유창한 영어라서 나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호텔과 에머리 그리고 휴식 정도는 알아들었는데······.

그보다 하비의 표정이 이상하다. 처음에는 피로감 때문인 것 같았는데······. 가만 보니, 그보다는 난처함이랄까?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제가 호텔로 모시겠······.”

“잠깐.”

나는 홀로 내빼려는 홍기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왜 그러시죠?”

와, 이 뻔뻔한 자식!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짓는 것 보소?

“하비가 뭐라고 했냐?”

“시차 적응 때문에 호텔에 가서 쉬고 싶대요.”

“그리고?”

“에머리를 좀 부탁한대요.”

“그래. 그럼 내가 하비를 호텔까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에머리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

“미스터 표. 에스코트 좀 부탁해요.”

에머리는 콕 짚어 나를 지목했다.

싱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는 에머리를 마주한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발목이 붙잡힌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면······. 제임스도 트랩형 아이템이란 느낌이었는데······.’

제임스······. 너 성격 엄마 닮았구나?

*

*

*

우리는 공항 안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잠깐 대화를 나누자는 에머리의 요청 때문이었다.

“하비 같은 중요한 투자자를 혼자 호텔에 보내도 되는 거에요?”

“혼자는 무슨 기사님 함께 가셨잖아. 그리고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데 뭐하러 따라가?”

나는 발을 빼려는 홍켓몬을 억지로 붙잡아 두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본능적으로 에머리와 단둘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켓몬의 촉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내게도 본능이라는 놈이 있다.

운동선수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이 감각은 단 한 가지 상황에서는 홍켓몬의 촉 보다도 우수하다 자부한다.

그 상황이란 바로 위기의 순간!

“맥베스는 요즘 직원들을 외모로 뽑나 봐요? 두 사람 모두 멋지네. 어때요. 관심 있다면 나중에 모델 한번 해볼래요?”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웬일로 홍켓몬이 이렇게 점잖게 거절하지? 미녀 모델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후다닥 달려들 줄 알았······.

“대신 뒤풀이라도 불러주시면, 제 번호는······.”

“뭘 자연스럽게 번호교환이냐.”

나는 팔꿈치로 홍켓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제 번호는 010에······.”

“?!”

이, 이걸 버텨? 내가 실수 했나? 아니지, 아무래도 모델 버프가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팀장님.”

내가 2차 공격(?)이 들어가려는 순간, 홍켓몬이 내게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어?”

“지금 그런 분위기 아니잖습니까. 뭐하시는 겁니까?”

순간 착시일까?

홍켓몬의 머리 위로 삐져나온 머리 한 가닥이 비죽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아, 안테나라도 세운거냐?

설마 이 녀석······. 내가 지금 에머리 앞에서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거냐?

-씨익.

······역시 감 잡았구나, 이놈······.

“숙녀를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만 대화하는 것은 결례 아닌가요?”

에머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연아와 비슷하지만, 끝이 묘하게 휘어져 좀 더 웃는 상으로 보이는 눈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장난기는 조회장을 연상케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하비와는 무슨 관계시라고요?”

하비를 직접 만나고 온 제임스에게서도 에머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조연준과 제법 긴 시간을 함께 일한 하비이니 어쩌면 그쪽으로 연이 닿았거나······.

아니, 나이를 고려할 때, 오히려 에머리를 통해 그들이 안면을 익혔다는 것이 타당하려나?

내가 그렇게 하비와 에머리의 관계를 추측하는 사이, 에머리가 입을 열었다.

“사업 파트너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닌데요? 하비가 운용하는 자금에는 얼마간 제 지분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저는 그것만 알면 되겠습니까?”

“그럼요. 뭔가 더 알고 싶으신거라도 있으신가요?”

“말해주실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인내심도 있고, 눈치도 있는 것 같고······. 뭐, 외모는 처음부터 합격점이었으니, 합격이네요.”

“합격?”

홍켓몬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칭찬을 들었다고 한들, 긴장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대화로 확실해졌다.

에머리······. 아니, 장모님께서는 지금 나를 품평하고 계신다.

연아와의 관계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내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미 연아와 나의 점수차는 비교가 불가능할 수준으로 벌어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드디어 장모님께 점수를 따서, 우리 관계의 득점 격차를 좁혀야 한다.

“사실 제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두분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에요.”

“두분?”

“저희요?”

나와 홍켓몬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라면 모를까, 우리 둘 모두?

“네. 저는 깨비몬 사업에 관해 용건이 있어요.”

깨비몬?

대체 에머리가 깨비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지?

“네. 저는 깨비몬의 캐릭터 사업에 도움이 될만한 선물을 준비해왔어요. 어떠세요? 지금 말씀드릴까요?”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이거 들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 혼자’ 들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나를 위기에서 구원해준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싫으네요.”

“?”

“?”

나와 홍켓몬은 이번에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그러는 팀장님은요?’

서로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

“후훗······. 이분들 정말 재미있는 분들이네?”

에머리의 눈빛이 묘한 색채로 번들거렸다.

< 차라리 쉽겠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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