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그런데 너는 왜 사양했냐?’
나야 연아와의 관계 때문에 에머리에게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홍기도가 저러는 것은 짐작이 안 간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왜 뜸을 들이냐?’
‘추가 업무 느낌이랄까? 하비와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느낌이라서요.’
‘음······.’
이런 상황에서 추가 업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도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뭔가 그럴듯한 핑계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설마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실 줄은 몰랐네요?”
에머리는 살짝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저희 담당 분야는 게임 개발이고, 사업분야는 조실장님의 영역이니까요.”
나는 적당히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렇군요. 좋아요. 일단 그렇다고 하죠.”
에머리는 의외로 산뜻하게 물러났다.
“그럼 게임 관련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어? 물러난 것이 아니야?
“제 명함이에요.”
에머리는 두 장의 명함을 건넸다.
하나는 세계 제일의 IT기업인 앰플의 부사장. 다른 하나는 버버리의 사외 고문 이사.
예상치 못한 굉장한 직함들이라서 나는 살짝 놀랐다.
앰플이라고 한다면, 스마트폰 제조 업체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게임업계에 대한 영향력만으로도 엄청난 회사다.
게임을 개발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상점을 소유하고 있기에, 수수료 수익만으로 세계 유수의 대기업들의 매출 수십 개를 합친 액수에 맞먹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예상보다 대단한 분이셨네요.”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오랜 시간 게임산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단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지도 않은 상태로, 매년 게임 분야 영업이익으로만 10조원 이상을 기록하는 앰플이 아니던가?
당연히 관심이야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는데······.
장모님을 처음 뵙자마자, 업무 쪽으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나머지, 당황이 앞선다.
“아! 하긴······. 이건 맥베스 오너와 먼저 논의해야 할 일이겠네요.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갈까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맥베스 본사로 가죠.”
느닷없이 본사?
*
*
*
“여긴 그대로네요.”
맥베스 본사 사옥을 올려다보며 에머리는 감회에 찬 얼굴이었다.
“전에 방문하신 적이 있으세요?”
홍기도의 질문에 에머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죠.”
“일단 들어가시죠.”
“네.”
우리는 에머리를 대동하고 회사에 들어섰다.
외부인용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고, 우리는 그대로 회장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더이상 홍켓몬을 붙잡을 핑계가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목줄을 놓아주었다.
“그럼, 에머리. 반가웠어요. 나중에 꼭 연락주세요.”
“오케이,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에머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에머리와 단 둘이서 회장실 전용 엘리베이터에 탔다.
“표세인씨.”
“네.”
“조만간 우리 식사 한 번 해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누구인 줄은 알죠?”
“네. 처음 본 순간 바로 알았습니다.”
내 말에 에머리는 기쁘다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이라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장모님 모드(?)로 돌변한 탓에 나는 당황하고 말했다.
회장님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어려운 분위기다.
“······.”
“······.”
엘리베이터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회장님 계십니까?”
“네. 곁에 계신 분은 누구라고 말씀드릴까요?”
비서는 처음 본 에머리를 곁눈질했다.
“에머리라고 말하면 아실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에머리의 도착 소식을 알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제임스 결혼식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요.”
두 사람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는 내가 물러날 차례였다.
“그럼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봐요.”
나는 조용히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
*
*
“보니까, 어때?”
“좋지 뭐. 내 딸이 고른 남자인데.”
조회장과 에머리는 표세인이 떠난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직 한참 남은 연아 결혼식 때문에 귀국한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왜? 내가 딸 결혼식 때문에 왔을 수도 있잖아? 오랜만에 가족 간의 끈끈함도 되살릴 겸?”
“오랜만에 만났으니, 농담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조회장의 말에 에머리는 재미없다는 듯이 식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가 딱히 화목했던 적은 없지.”
“내 잘못이지.”
“아니······. 굳이 감싸줄 것 없어. 내 잘못이란 것쯤은 알고 있어.”
“안다니 다행이군.”
“······그렇다고 당신이 무죄라는 것은 아냐.”
“아니라고 안 했는데?”
조회장의 말에 에머리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시나 좀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뭐야. 그만 뜸 들이고 용건을 꺼내 봐.”
조회장의 채근에 에머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헤어진지 한참된 전 남편과 오래 말 섞어봐야, 피곤하기만 하지.”
“동감이야.”
“용건은 2가지야.”
“2가지씩이나?”
조회장은 살짝 놀랐다.
“하나는 연아를 위한 선물······. 다른 하나는 결혼 선물이자······.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선물이랄까?”
“모두를? 그게 가능할까?”
“한명쯤은 아닐 수도 있지만······. 뭐 그럼 그냥 결혼선물인 것으로 해두지.”
“그렇게 말하니 흥미가 동하긴 하는군······.”
“그런데 그 전에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조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무슨 선물을 조건을 받고 주나?”
“우리 가족이 언제 공짜로 선심을 썼다고? 이건 나보다는 당신 스타일이잖아?”
“끄응······.”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서 조회장은 쉽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조건이란 것은 뭐지?”
“표세인.”
“어?”
갑자기 표세인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나에게 좀 빌려줘야겠어.”
“······내가 허락한다고 해도, 연아가 허락할 리가 없어. 연아와 본인이 친하다고 착각하는 것 아냐?”
“아니, 연아는 허락할거야.”
“뭘 믿고? 애초에 연아의 생각을 읽을 만큼 함께 지내지도 않았잖아?”
두 사람이 이혼한 것은 연아가 한참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된 이후의 모습은 크게 다른 법이다.
하물며,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에머리가 연아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여자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야.”
“어쨌든 안돼. 지금 표세인은 이 회사의 기둥으로 성장하고 있어. 섣부른 장난에 놀아나게 할 순 없어.”
“장난 같은 것 할 생각 없어.”
에머리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파일 하나를 전송했다.
“직접 보고 생각하라고.”
“······잘도 이런 걸 준비해왔군.”
에머리가 보낸 파일을 훑어본 조회장은 살작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제임스에게 들었어.”
“뭘?”
“당신, 예비 사위와 게임을 즐겼다며?”
게임이라는 말에 조회장의 눈동자가 떨렸다.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짙은 우려가 뒤따랐다.
“설마 지금 표세인과 게임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맞아. 예비장모와 예비사위잖아? 친해지기 위해 게임 같은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 가족들 스타일이잖아?”
정확히는 조회장 본인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친자식들보다도 표세인이 더욱 조회장과 이런 부분에서는 성향이 가까웠다.
“먼저 연아와 이야기해. 그리고 연아가 거절한다면, 미련 없이 손 떼라고, 이건 충고가 아니라, 조언이야.”
조언과 충고는 언뜻 비슷해 보이는 단어지만, 충고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의미에서 조언보다 다소 공격적인 의미다.
조회장이 굳이 충고가 아닌 조언임을 강조한 것은 에머리의 성격상 무작정 반대하면 오히려 더 크게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전히 회사를 우선시하는 성격이네.”
여느 아버지, 여느 장인이라면 수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였다.
본인이 직접 꺼낸 용건이었음을 고려하자면, 다분히 도발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정작 에머리의 표정에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걱정마. 살살할거야. 나도 친해지고 싶다고. 연아와 표세인, 모두.”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그때 같은 상황은 사양하고 싶은데······”
오래전 연아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에머리는 무턱대고 연아의 학교에 방문해 연아가 부잣집 딸이라는 것이 들통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에머리의 애정 표현 방식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고, 연아는 언제나, 난처하거나 괴로워했다.
“애초에 인원수만큼의 피자와 치킨이라니······. 미국 기준에서도 좀 황당하지 않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딸을 위한 거야. 그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지 않아?”
“다 늙어서, 귀여움 타령은······.”
“당신이 그래서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거야.”
“이 나이에 인기는 무슨······.”
“이런 어두침침한 사무실에만 갇혀있으니, 세상 물정을 모르지! 외국에 나가봐, 당신 나이에도 인생 멋지게 사는 사람들은 널렸어.”
“내 인생도 나쁘지 않아.”
“기껏해야, 주사위나 주물럭거리는 양반이, 말은 잘하네.”
자신의 취미를 언급하자, 조회장은 순간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혔다.
“마음 같아서는 연아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싶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허락할 테니까, 모쪼록 연아 심기 거스르지 말도록 해.”
“연아 마음은 엄마인 내가 잘 안다니까?”
*
*
*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했다고? 난 정말로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회장실을 나선 즉시, 나는 제임스와 함께 연아를 찾았다.
“이해?”
장모님이 본사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달하자마자, 연아가 뱉은 첫마디였다.
“어머니가 이해하기 쉬운 타입은 아니지.”
반면에 제임스는 무척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연락 한번 없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법이 어디 있어?”
“그거야, 우리 가족들이 딱히 살갑게 연락하고 지내는 타입은 아니잖아?”
제임스의 말에 연아는 살짝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연아도 아마 가족들과 살갑게 연락하고 지내는 타입은 아닐 것이다.
우리 부모님에게는 틈틈이 자주 연락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보다는 목적이 뭐지?”
“그래, 이유 없이 방문할 사람은 아니지.”
이런 점에서는 남매가 합이 척척 맞는다.
“아마도······. 뭔가 우리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건수를 준비해왔을 거라는 느낌인데.”
“틀림없이 그렇겠지. 지금으로서는 깨비몬 관련이 의심스러워.”
“그래, 과거 버버리의 CEO까지 역임했었으니······.”
“가만, 버버리? 지금은 앰플 부사장인데?”
패션기업인 버버리에서 IT기업인 앰플로 이직했다고?
뭔가 굉장한 이력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보다, 엄마 만나보니 어땠어?”
연아는 살짝 내 눈치를 살폈다. 대체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걸까?
멋진 분이라는 느낌이었고, 실제로 능력도 출중하신 분이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은 해야겠네.”
“어?”
“나 장모님께 점수 따도 되지?”
“점수?”
“어떻게?”
연아와 제임스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모양.
“당장, 명확한 아이디어는 없지만······. 조회장님처럼 게임이라도 제시해주지 않으려나?”
연아는 물론 제임스까지 헉! 하고 숨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그럴 수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 닮은 구석이 있어서······.”
아,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일이 쉽겠는데?
< 내가 이렇게 까지 해주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