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오랜만이네.”
“······네.”
연아는 의자에서 앉은 채로 대답했다.
약간의 경계심과 긴장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무장한 연아의 얼굴을 바라본 에머리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경계하고 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 않아?”
“여기는 회사에요. 앰플의 부사장 씩이나 되는 분이 왔는데, 마냥 반가워 할 수는 없잖아요?”
연아는 끝내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너도 참, 이런면은 아빠랑 판박이구나?”
“전 아빠 손에서 자랐으니까요.”
“음······.”
연아의 대답에 에머리는 살짝 신음했다.
“아직도 내가 용서가 안되니?”
“딱히 용서라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비즈니스적인 용무라면 그것부터 말씀해 주시죠. 여기는 회사니까요.”
비즈니스적인 용건이 없다면 오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에, 에머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가 평범한 모녀지간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첫 단추를 잠가야 하겠지.”
에머리는 조회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마트폰을 이용해, 파일을 전송했다.
“이건 뭐죠?”
“선물.”
“선물이라고요?”
연아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에머리가 보낸 파일을 확인했다.
“이, 이건······.”
지금까지 깨비몬과의 콜라보에 관심을 보낸 것은 B급 브랜드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에머리가 보낸 파일에는 세계 정상급 브랜드 랭킹 10위 안에 자리매김한 7개의 업체에 관한 문서였다.
“······이곳들 전부가 수락했다고요?”
당초 계획은 3개 업체 정도였다. 하지만 무려 7개라니······.
새삼 패션업계 전반에 퍼져있는 에머리의 영향력에 어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내가 한 손 거든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네 제안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거든.”
패션업계 인사들의 이중성이랄까? 그들은 무척 보수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트랜드에 넋을 잃는 것 역시 그들의 본성이었다.
깨비몬의 화제성과 연아의 기획서 내부에 가득한 도도한 제안은, 이미 에머리가 나설 것도 없이 몇몇 마음을 사로잡은 상황이엇다.
“음······.”
“마음에 안 들어?”
다소 석연찮은 기분이기는 했지만, 사업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상위 10대 브랜드의 대부분이 동시에 깨비몬과 콜라보를 시작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깨비몬이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훌쩍 상승할 것은 불보듯 뻔했다.
“감사히 받을 게요.”
사적인 감정보다는 공적인 감정을 앞세워야 했다. 연아는 순순히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래. 앞서 말했듯이 내가 딱히 크게 뭔가를 한 것은 아냐. 이미 네 제안에 흔들리던 시점이었으니까.”
“네.”
에머리는 연아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음을 깨달았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다. 이런 식의 선물만이 모녀지간의 사이를 부드럽게 만든다니.
에머리,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들 모녀간의 사이는 상당히 어그러져 있었다.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
당연한 축하의 말임에도 연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표세인이라고 했지?”
“······네.”
표세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아의 태도가 다시금 딱딱해졌다.
에머리의 말투와 행동 하나, 하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너무 많이 뒤섞인 탓에 본연의 색채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탁해진 감정.
“어떻게 만났어?”
연아는 어린 시절부터 최대한 자신의 부유한 환경을 숨겨왔다. 그것은 제임스도 마찬가지이며, 하다못해 조연준 마저도 그런 것을 드러내어,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지닌 이들의 삶이란, 일반인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기 마련이다.
표세인은 빼어난 능력과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들의 접점을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일종의 사고 같은 거였죠.”
“우연? 사고?”
조금 더 설명이 필요했다. 에머리는 눈빛으로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지만, 연아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자리는 아닌 것 같네요. 여기는 회사니까요.”
공사의 구분.
조회장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주지시킨 가르침의 효과.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조연아라는 인물 자체의 사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의 성향까지 고려한다면, 이것은 거의 가풍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좋아, 그건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자.”
“네.”
“그리고 두 번째 용건은 네 결혼 선물 같은 거야.”
“결혼 선물이요?”
“곧 부회장으로 취임한다지?”
“네.”
조회장은 서서히 권력이양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직함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회장이 손에 들고 있는 막대한 지분 일부가 우선 적으로 연아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재무와 법무.
부회장 취임과 지분 이동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두 팀이 분주한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건 결혼 선물이자, 네 부회장 취임 선물이 되겠네.”
“뭔가 거창하네요.”
“딸이 결혼 전부터 부회장씩이나 달아버리는 집인데, 어쩔 수 없지.”
에머리의 어투에 연아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는 살짝 욱해버렸다.
“저도 노력했어요.”
“누가 뭐래? 네 아버지의 결정이잖니. 그 사람이 자격 없는 사람에게 의자를 내줄 사람이니?”
에머리의 말에 연아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쌓인 감정의 골이 깊다 보니,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도 서로 긴장하거나 위축된다.
에머리는 자신이 더이상 연아를 붙잡고 있는 것은, 딸의 피로감만 더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는 것. 그것이 연아의 부담을 덜어주는 길이라고, 에머리는 판단했다.
“앞선 선물이 네 엄마로서 내 개인적인 것이었다면, 이번 것은 달라.”
엄마로서가 아니라면, 남은 것은 앰플의 부사장 에머리 킴으로서의 용건이라는 말이었다.
90년대 이후, 지나치게 클래식한 디자인 덕분에 젊은층들에게 외면받고 있던 버버리에게 혁신을 가져다준, 천재적인 마케터이자 경영자.
그 기세를 이끌어 앰플이라는 거대 IT기업의 부사장으로 스카웃 된 입지전적인 인물. 그것이 바로 에머리 킴의 정체성이었다.
“곧 정식으로 제안이 있겠지만, 우리는 게임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예정이야.”
“!”
IT분야의 공룡기업인 앰플이 작정하고 게임산업에 뛰어든 다는 것.
물론 그 수순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드디어 본격적인 첫걸음을 떼려 한다는 것은 파장이 만만치 않은 일임은 확실했다.
“세계 유수의 IT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게임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는 솔직히 늦은 감이 있지.”
“그렇죠.”
경쟁사들이 죄다 콘솔 개발이나,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를 개발하는 와중에도 앰플은 그저 디지털 스토어로 벌어들이는 수익에 만족하며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었다.
“사실 남몰래 우리도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기대 이하의 성과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지. 그거 알아?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앰플도 이제는 은근히 보수적인 회사가 되어버렸어.”
확실히 스마트폰 산업을 거머쥔 이래, 비약적인 혁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비슷한 디자인에 스펙을 조금 더 업그레이드하기 급급할 뿐, 오히려 후발주자인 경쟁자들이 여러 새로운 형태의 차세대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와중에도, 앰플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정보를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파트너쉽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다른 이유라면 거대한 경쟁자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더군다나, 근래 대형 IT기업들이 게임 산업에 뛰어드는 형태는, 다름 아닌 공격적인 인수합병이 아니던가?
연아의 입장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안심해, 맥베스를 인수할 생각 같은 것은 없어.”
주가 총액이 수십조에 달하는 거대 기업의 인수를 대수롭지 않게 입에 담는다.
이것만으로도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연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안과 입술이 바짝 말라버린 것.
“이제는 IP 경쟁의 시대잖아?”
“그렇죠.”
“미국에서 지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요즘 한류가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다는 것은 알지?”
한류의 열풍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태풍이 되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기다.
음악과 드라마를 선두로 요리까지도······.
“게임도 한류 열풍에 편승할 수 있을까?”
이미 깨비몬은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게임 자체의 컨셉은 어디까지나 타겟이 한정적이며, 고작 하나의 컨텐츠에 불과하다.
“한류에 편승할 생각 따위는 없어요.”
“어?”
연아의 대답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에머리가 살짝 눈을 깜빡였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게임을 개발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새로운 한류가 되는 거죠.”
“······.”
연아의 말에 에머리는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멋있게 자랐어.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한명의 여자로서 감탄했어.”
에머리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말이야.”
“?”
“만약 우리와 손잡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면, 그 담당자는 역시 표세인이겠지?”
“그, 그건······. 아직 모르죠.”
“좀비로얄과 깨비몬. 근래 맥베스가 내놓은 최고의 히트작들이 모두 그의 손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은 게임 업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대중들에게 아직은 스타개발자라 이름이 나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근래 맥베스와 표세인은 알음알음 주가를 높혀가고 있는 상황.
“나는 최고를 원해. 맥베스의 차기 회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카드를 제시하실 거지?”
“!”
에머리와 표세인을 가깝게 두는 것에는 여러모로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앰플의 부사장으로서의 제안, 그리고 맥베스 차기 회장이라는 입장이 전제되는 상황이라면······.
표세인.
오직 그 이름 세글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
*
“그 문제아 삼인방을 통째로 삼켜버릴 줄은 몰랐군.”
“삼키다니요. 그저 협력하기로 한 것입니다.”
나는 함전무의 표현을 살짝 정정했다.
“그럼, 결정 난 것 같군.”
“이렇게 바로요?”
외부 계열사 대표들이 삼인방뿐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바로 결정이라고?
“다들 기껏해야 수십억대 규모를 넘지 못했어. 뭐 과거처럼 모바일 게임 하나 만들 정도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아니지.”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수명이 긴 컨텐츠는 아니다.
하지만 모바일 게임의 수명은 대형 FPS나 AOS에 비해 수명이 짧은 것도 사실이다.
어렵게 얻은 귀한 판호가 아닌가?
기왕이면 오랜 기간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타이틀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려 천억이라는 압도적인 투자금과 스케일을 준비해온 것은 오직 표세인 뿐이다.
다른 대표들이 준비해온 투자금 전체보다도 표세인 홀로 마련해온 투자금이 훨씬 크지 않은가?
“AOS를 접목한 FPS. 게다가 중국시장 단 하나에 집중해서 동양적인 비쥬얼과 컨셉을 강조했다는 부분까지······. 뭐 하나 나무랄데가 없어.”
그저 일반적인 기획서 한 장이었다면,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지금까지 내가 일궈낸 실적과 이번에 준비해온 막대한 투자금.
모든면에서 완벽했다.
“그런데 전사차원의 프로젝트라······. 이거 모험 아닌가?”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투자업계에서만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려하시는 부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과거처럼 자잘한 게임 몇 개 투척해서 월척을 기다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장인 정신이 깃든 확실한 타이틀 하나! 그것이 회사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아시다시피, 맥베스는 딱히 이거다 싶은 킬링 타이틀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3M이라 불리는 다른 경쟁사에 비해, 맥베스는 이거다 싶은 킬링 타이틀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향후 글로벌 스케일의 AAA급 게입을 개발하려면 수천 명의 맨파워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방식도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말은······. 판호가 연습에 불과하다?”
“예. 판호 타이틀 이후에야 말로 진정한 맥베스의 간판이 될 만한 타이틀을 개발해야 겠지요.”
“좋아. 아주 좋아. 내 후계자는 자네야. 이 시점부터 내 사람들에게 자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도록 확실히 자리매김해 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
갑자기 뭐지?
“지난번 조연준 건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까지 자네 손을 들어주는데······. 정말 주사위 어떻게 안 되겠나? 조만간 회장님이 TRPG 시작할 것 같은데······.”
아······. 음······.
타이밍이 타이밍이라서일까? 섣불리 거절하기가 어렵다.
“아버지께 여쭤보겠습니다.”
이번엔 진짜로 아버지께 좀 부탁을 드려봐야겠다.
< 그 정도는 월매출로도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