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AAA급 게임의 개발은 모든 개발자들의 숙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이번 판호 게임이 본래 나의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나는 중국시장 공략이라는 발판으로 다음번에는 진정으로 내가 꿈꾸는 오픈 월드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다소 거칠게 엑셀을 밟은 것은 사실이다.
때마침 함전무가 제시한 미션을 수행할 겸, 실장 삼인방의 개발사를 규합하는 강수까지 펼쳤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무군단의 지지도 약속 받은 상황.
문제는 이 모든 이 모든 것의 진짜 이유.
나는 연아에게 프로포즈를 위한 재물(?)로 이번 일을 꾸몄다.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볼까?
-잠깐?
-시간은 관계 없고, 우리 처음 만난 카페 기억하지?
-기억 못할 수가 없지.
단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만남이 워낙 독특했던 탓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기도 하다.
만약 그날의 작은 우연이랄지, 행운이랄지······. 작은 어긋남 덕분에 만들어진 인연.
그 평범하지 않은 작은 우연으로 시작된 인연의 끈을 끝내 놓치지 않은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알겠어. 조금 늦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지?
-물론이지.
메시지를 끝냈다.
나는 주머니 속의 반지를 매만졌다. 생각해보면 이 반지를 준비한 것도 제법 오래되었다.
“이제 드디어 네가 데뷔할 때가 되었구나.”
서늘하면서도 매끈한 금속 특유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이것만으로 순간 가슴이 요동친다.
“뭐하세요?”
“아······.”
순간 홍켓몬의 등장으로 내 작은 감동의 시간이 끝나버렸다.
“일 안하세요?”
“세상에······.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오다니!”
황당함이 지나쳐서 억울함까지 밀려올 정도!
“너 요즘 뭐하냐?”
막상 판호건으로 홍기도를 차출하기는 했는데, 예상보다 이런저런 사전에 처리할 일들이 많았던 탓에 정작 홍기도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말았다.
“뭐하긴요. 남궁원이랑 함송희쪽 거들거나, 권태인 차장 어시스트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 걸요?”
“헉!”
설마 이 녀석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서 거들고 다닌다니!
이건 조금 감동이다.
조금 전 반지를 매만지며 느꼈던 감동과 홍켓몬의 성장 중에서 무엇이 더 큰지 구분이 안갈 정도!
“크흑······. 드디어 네가 철이 들었구나. 그래, 그게 바로 네게 기대한 유틸이야.”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기 마련.
남궁원이 한가지 큰 일을 맡길 때,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한 다면, 홍기도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서포트 연계에 능숙한 타입이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 주어서 고맙다.”
“이제 깨달은 것 아닌데요?”
“뭐?”
“원래 알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했어?”
“해야 하는 거였어요?”
“안해도 된다고 생각했냐?”
“?”
“?”
순간 싸한 정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뭐랄까, 정식으로 하달 받은 것도 아닌데, 왜 해야하는 거냐고 이마에 써 붙인 것 같다.
“그보다 지금 한가하시면 저희 좀 거들어 주시죠.”
“거들어?”
한가하다는 말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홍기도가 자신을 거들어 달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고, 게다가 ‘본인’이 아닌 ‘저희’라고 한 것이 신경 쓰여서, 사소한 것은 넘어갈 수 밖에 없다.
“남궁원이랑 작전하나 구상 중인데, 포석 역할 좀 해주세요.”
“네가 남궁원이랑 작전을 구상 중이라고?”
처음 남궁원을 포섭할 때부터, 굿캅, 배드캅과 같은 원투펀치의 역할 수행을 기대했었지만, 막상 두 녀석이 워낙 견원지간이라서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더랬다.
그런데, 드디어 이 녀석들이 내가 기대한 케미스트리를 시작하려나?
“자세히 말해봐.”
“지금 남궁원이 실장님들께 컨셉 브리핑 준비중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팀장님이 남궁원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단순히 이번 브리핑만이 아니라, 좀비로얄 때와 같은 컨트롤 타워 역할도 기대하시잖아요?”
정확하다. 다만, 직급상의 문제 같은 것을 우려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내심 기대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남궁원 입지도 세워줘야 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은······. 역시 팀장님이 체면을 구기는 거겠죠?”
“아!”
아마도 남들은 여기까지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워낙 나랑 홍켓몬이 이런 부류의 작전을 많이 수행해온 탓에 나는 바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문이사님께서 그들 셋의 고삐를 쥐고 흔드시는 일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파벌 내부의 입지 문제로, 내가 나서면 문이사와 양실장의 입장이 다소 애매해질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했는데, 내가 그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 스타일대로 직급 따위와 관계없는 업무 프로세스를 내세우는 거다.
내가 알아서 남궁원과 문이사 앞에서 몸을 낮추면, 그들도 내 바람과 앞으로 흘러갈 업무 스타일을 깨달을 것이다.
“근데, 작전이라고 말은 했는데, 남궁원은 알고 있냐?”
어쩐지, 이 녀석 스타일에 저 혼자 작전짜고 남궁원을 장기말로만 여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히 말 안했죠. 팀장님 조력 같은 말을 꺼내면, 길길이 날뛸걸요?”
“흠······.”
“남궁원도 이제 슬슬 팀플레이 익혀야죠. 언제까지 개인기만 믿고 단독플레이하게 둘 수는 없잖아요?”
“개인기를 일절도 안하는 것도 문제지.”
하지만 홍기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차피 곧 이 녀석들도 작게는 한 파트, 크게는 팀을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장래에는 각자의 개발실을 이끌어야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남궁원은 남궁원 특유의 리더쉽으로 프로젝트와 팀원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한 바가 있다.
하지만 동료와 함께 작전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는 어떨지······. 이것만은 홍기도의 말대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남궁원에게 가서 전해.”
“전해요?”
“어. 손발 한 번 맞춰보자고.”
“걔는 연기력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테스트는 해봐야지. 혹시 아냐? 의외로 잘 할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솔직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테스트는 해봐야지.”
그럼, 이제 슬슬 우리 파이터도 연계기 좀 하나 붙여줘 볼까?
*
*
*
“야, 바쁘냐?”
“보고도 모르냐?”
홍기도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남궁원이 눈을 치켜떴다.
비록 문이사와 양실장에 비할바는 아니라지만, 실장 삼인방 역시 나름 차세대 에이스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이미 본인들만의 외부 스튜디오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과 장래성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남궁원은 현재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보통 이정도 직급 차이라면 으레 잘 보이는 수준을 목표로 하겠지만, 남궁원의 바람은 그 보다 한참 우위에 있었다.
‘제압한다! 압도한다!’
자신의 브리핑에 박수 갈채 혹은 넋을 놓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이 아니라면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남궁원은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인 줄은 알겠는데, 잠깐 멈추고 내 말 좀 들어봐.”
“뭔데?”
하지만 남궁원은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은 상태로 대꾸할 뿐이었다.
“팀장님이 작전 한번 함께 해보자고 하셨어.”
“작전?!”
정작 곁에서 듣고 있던 함송희가 펄쩍 뛰듯이 달려왔다.
“뭔데요? 뭔데요? 드디어 언니도 데뷔하시는 건가요?”
“무슨 영화 오디션이냐, 데뷔는 무슨······.”
“그래도 항상 부러워 하셨······.”
“···부러워하긴······. 맨날 둘이서만 시시덕 거리는 모습이, 눈꼴 시렸지.”
남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말해봐.”
“어차피 이번 판호 프로젝트는 네가 리드하게 될 거잖아?”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은연중에 그런 느낌이고, 표세인도 지나가는 투로 그런 기대를 내비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실제로 정해지기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당장 실장 삼인방만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 쟁쟁한 인물들이 고작 과장급의 리드를 받아들일까?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사소한 트집부터 기획적 충돌까지······.
쉽지 않은 난관이 예상된다.
지난번 좀비로얄의 경우는 마무리 단계 채찍질이라는 것과 박대표와 표세인의 전폭적인지지 덕분에 수월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설계도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번처럼 스무스하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당장 파티션 너머에 있는 권태인 차장은 또 어떤가?
시나리오 파트 특화라는 점은 제외하더라도, 그녀 역시 빼어난 기획자다.
직급으로 봐도 권태인 차장을 제치고 자신이 이 프로젝트를 리드할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권태인 차장님 들으시면 어쩌려고 말 조심해.”
“쯧쯧, 너는 이래서 아직 멀었다니까.”
“뭐 임마?”
“표세인 기능사, 표세인 활용능력······. 이거 너 진짜 빨리 시작해야 겠다.”
또 홍기도 특유의 헛소리가 시작됐다. 이 녀석은 꼭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괜한 헛소리로 사람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권태인 차장님은 깨비몬 맡아주셔야지. 스토리 미션은 계속 업로드 되어야 하잖아?”
“음······. 그건 그렇지.”
“어쨌든 약한 소리 그만하고 이참에 표세인 기능사와 활용능력 시작해보자.”
“헛소리는 그만해······. 그럼 지금 팀장님께 가면 돼?”
“응. 기다리고 계셔.”
*
*
*
“부르셨어요.”
남궁원은 다소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홍기도에게 말 들었지?”
“네. 무슨 작전을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면서요?”
“맞아.”
“혹시 제가 못미더워서?”
역시나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보다는 앞으로를 생각해서, 네가 우리 기획팀 에이스인데, 손발도 맞춰봐야지.”
“흠······. 에이스.”
“왜? 종종 그렇게 말했었잖아?”
“아니요. 언제들어도 기분 좋네요.”
남궁원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이 녀석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보기 좋네.
“노파심에 말하지만 손발 맞춰보자는 의미는 널 못미더워서가 아니야. 네가 나를 좀 도와달라는 의미지.”
“그런데······.”
“응?”
“작전 그런 것은 보통 홍기도와 하지 않으시나요?”
남궁원이 슬쩍 홍기도를 향해 턱짓했다.
“나 좀 살려주라.”
“네?”
“천년만년 저 녀석하고만 붙어있을 수는 없잖냐. 그리고 사실······.”
“?”
“나중을 생각해서라면 너희 둘이 독자적으로 손발을 맞춰서 작전도 수행해줘야 하고.”
“쟤랑요?”
순간 남궁원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래도 못하겠다는 말은 안할거지?”
“······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남궁원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너는 참 일을 잘하지.”
“갑자기?”
“하지만······. 일을 편하게 하는 것은 저녀석이 더 잘하지.”
“음······.”
“지금부터 저 녀석처럼 일하는 법을 알려 줄게. 이거 의외로 나중에 도움이 될 거다.”
“제가 저 녀석처럼 되길 원하세요?”
남궁원의 질문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냐. 내가 그러길 바라겠냐? 다만 앞으로 네 역할은 계속 커질 텐데, 사람 체력에는 한계가 있어. 쉽게 갈 수 있는 부분까지 어렵게 갈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돼죠?”
“응. 일단 시작은 아부지?”
“그렇죠.”
내 말에 홍기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번에는 홍기도 따라가서 한 번 배워봐.”
“으······. 저 녀석에게 배우라니······.”
“제가 가르쳐요?”
남궁원과 홍기도가 동시에 뜨악했다.
‘이 녀석들이 슬슬 캐미가 터져줘야 할 텐데······.’
처음부터 바라왔던 기획팀의 원투 펀치······. 이제는 좀 기대해 봐도 될까?
< 우리 같은 사람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