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그래서 정확히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윤현창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회사원이 인정받는 법이야 뻔하지.”
“뻔하다고? 잘난 척하는 거냐?”
“음······. 네 앞에서는 잘난척 좀 해도 되겠다. 그치?”
“······. 재수 없는 놈.”
“에이, 염치가 있지. 너 한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냐. 넣어둬.”
“······.”
윤현창은 앓는 듯이 짧은 신음을 흘렸지만, 입이 닳도록 나를 향해 ‘일은 잘해도 사회생활은 못 한다’라고 주절거린 업보가 있는 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뭔데, 그 뻔한 방법이 뭐야?”
“뭐긴, 회사원이야 일 잘하면 그만이지.”
“뭐?”
“진짜로.”
“그럼 우리가 일을 못 했다는 거냐?”
아니, 뭐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일하는 티 보다 라인타기를 더 열심히 하는 티를 냈지.”
“어?”
말이야 맞는 말이지 안 그래?
“그러니까, 일단 그 이미지부터 수정하자.”
“음······.”
뭔가 마뜩잖다는 듯한 얼굴.
“그럼 뭐 바로 문이사님과 다리라도 놔줄줄 알았냐?”
“솔직히 그 정도는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와, 이놈 양심 없는 것 보소.
“헛소리말고 일이나 똑바로해.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 해결될거다.”
“안되면 어쩔래?”
“되면?”
“윽······.”
내가 반대로 세게 나오니, 또 다시 입을 다문다.
그러게 본전도 못찾을 상황에서 왜 이렇게 혀를 길게 늘이실까.
“괜히 요령 부릴 생각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한 번 해봐.”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건데?”
“안 그래도 곧 판호건으로 새 프로젝트 시작되는 것 알지?”
“아, 그 함전무님이 추진하신 다는 것?”
아직 일반 사원들 레벨에는 함전무의 은퇴와 후계자 선정 같은 디테일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은 상황.
더욱이 라인을 잃어버린 이들의 입장에서는 윗선의 정보를 더더욱 엿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건은 전사적 프로젝트로 진행될거야.”
“전사적?”
“응. 그 건으로 또 한 번 부서 이동이 있을 거야. 그러니, 거기에 맞춰서 한번 보여줘. 각자의 능력을. 그리고 김순영 차장님?”
“네?”
“김차장님은 이참에 남궁원에게 붙으세요.”
“남궁원 과장이요?”
“네. 어차피 깨비몬은 마무리단계고, 서버쪽은 대강 정리됐잖아요? 남궁원을 도와서 한발 먼저 판호쪽을 서포트해주세요. 한팀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순영 역시 내 말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회사원은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아야하는 법이 아니겠나?
“하지만 정말 그걸로 될까?”
“안되지.”
“뭐?”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은 디폴트고, 포인트는 액션이지.”
“액션?”
“해병대 운운하더니, 그런것도 안배웠냐?”
“아!”
열심히 하는 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주변에 인식시킬 것인가!
안타깝게도 사회생활 요령에는 이런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물론 이것도 송부장 같은 극한 빌런에게 찍힌 상태로는 의미가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둘은 그런 상태는 아니지 않은가?
“일단 업무에 열정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제가 서포트하겠습니다.”
뭐, 어쨌건 프로그래머들이 열정을 불태워준다면, 내 입장에서야 무조건 이득이지. 흐흐흐.
우선 두 사람의 입지를 바로 잡고 그 뒤에 팀장 선출.
오케이, 이 순서대로 가보자.
*
*
*
“표팀장이 김차장과 윤과장을 감쌌다고?”
“예.”
해병대 콤비는 옥상에서의 일을 곧장 마팀장에게 전달했다.
“그 친구들 원래 앙숙지간 아니었나?”
마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이상무 파벌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던 김순영이 표세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것은 유명한 일화였지 않나?
체육대회 당시에도 노골적으로 서로 각을 세우는 것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물론 깨갱하고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지만···
···.
“천이사님께서 조만간 그쪽을 싹 정리하시는 것 맞죠?”
“어?”
“지난번에 마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었잖습니까?”
일전에 함전무가 미국을 방문한 사이, 천이사가 부장급들을 포섭하려 움직였고, 마팀장 역시 그와 똑같이 젊은 사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이던 차에, 해병대 콤비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술자리 특유의 허풍이 발동하여, 곧 천이사가 함전무의 뒤를 이어 전무 군단을 지휘할 것이고, 경쟁파벌들을 모조리 꺾어버릴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던 것.
“아, 그것이······.”
하지만 정작 마팀장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함전무가 복귀한 이래 회사 내부의 공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게다가 정보도 뒤죽박죽······.’
누군가는 표세인이 양실장과 문이사에게 팽을 당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오히려 그들과 더욱 돈독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함전무와 표세인이 종종 함께 깊은 논의를 하고 있더라는 목격담까지······.
도무지 뭐가 맞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근래의 천이사는 뭐랄까, 빛을 잃었달까? 도이사가 갑작스럽게 전무 군단의 임원들을 결집시키는 와중에 천이사는 철저히 겉돌고 있었다.
마팀장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배를 갈아타야 할 시점인가?’
지금껏 오랜 시간 동안 천이사의 비위를 맞추며 관리해온 인맥이지만, 그것이 아깝다고 침몰해가는 배에 붙어 있어봤자, 함께 좌초할 뿐이다.
“마팀장님?”
마팀장은 이미 해병대 콤비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의 머릿속은 새롭게 잡아야할 동아줄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회전할 뿐.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
해병대 콤비의 힘찬 인사 소리에 마팀장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외부 개발사 삼인방을 대동한 문이사가 있었다.
“복도에서 뭘하고 있나.”
문이사는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마팀장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아직 안녕할지 못할지 모르겠군.”
“네?”
문이사의 뚱딴지같은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문이사는 슬쩍 고개를 돌려 삼인방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오늘 나 좀 안녕하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럼요. 확실하게 준비했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문이사의 뜻을 한발 늦게 알아들은 삼인방의 눈동자 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래. 나 문상훈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예!”
세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본사 직급으로만 따져도 실장, 외부 직함은 무려 대표들이다.
그런 쟁쟁한 인사들이 문이사의 한 마디에 기합이 빡 들어간 모습이라니!
“그럼 가지.”
“예.”
문이사와 삼인방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마팀장과 해병대 콤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문이사님 카리스마는 압도적이네요.”
“정말 천이사님이 문이사님을······.”
“으음······.”
마팀장 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귀국하기가 무섭게 양실장과 손을 잡은 문이사는 잽싸게 실장 삼인방을 휘하에 두고는 점차 두려울 정도의 기세를 내비치고 있었다.
은퇴를 예고한 함전무와 조연아 뒤로 모습을 숨긴 이상무.
본사 최대의 양대 파벌의 수장들의 위세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지금.
단연코 임원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문이사였다.
‘역시 대세는 이제 문이사인가······.’
마팀장은 멀어져가는 문이사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어?”
손에 타블렛과 서류를 한가득 들고 있던 남궁원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가만······. 그러보고 보니, 너 표팀장 밑에 있는······.”
“남궁원입니다.”
“지금 나한테 길을 비키라고 한 거야?”
마팀장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남궁원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천이사의 부진으로 심기가 불편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주친 남궁원은 마팀장의 눈에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바빠? 바쁘면 다야?”
“······.”
노골적인 시비에 남궁원의 미간이 팍 좁아졌다.
“이러다 후회하십니다.”
“후회? 이제는 협박까지? 아주 팀장만 싹수가 노란 줄 알았더니, 팀원들까지 고대로 답습하는 구만? 이래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라고, 하여튼······.”
“익······.”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남궁원이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
뒤에서부터 들려온 소름끼치는 샤우팅!
마팀장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조금 전 자신들을 지나쳐갔던 문이사가 눈알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예? 아, 아니······. 그게······.”
“윗물이 뭐.”
“네?”
“남궁과장 윗물이 왜.”
“그, 그게······.”
조금 전까지 감탄스러웠던 그 위세 그대로를 분노로 환원해 자신에게 쏟아붓자, 마팀장은 그저 어버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는 그저 사내 예의를 가르치려고······.”
“그걸 네가 왜 가르쳐. 팀장 따위가 그런거 하게 되어 있어?”
“아, 아니 그, 그게······.”
“너 천이사 라인이지? 지금 뭐야, 공격이냐?”
문이사의 입에서 라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팀장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몰락한 천이사와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기세를 불려나가는 문이사.
문이사의 눈밖에 나는 것을 싫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당황과 혼란 속에서 마팀장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저, 저는 천이사님 라인이 아닙니다.”
“뭐?”
천이사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마팀장의 말에 문이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 못 알았나? 저 녀석 항상 천이사 꽁무니 쫓던 녀석 아니야?”
“맞습니다. 천이사님이 아끼는 친구죠.”
성진규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긍정하자, 문이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쓰레기네······.”
문이사는 고까운 눈초리로 마팀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본인 조차 이상무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얼마나 고뇌했던가, 조회장의 허락이 아니었다면 그는 여전히 이상무 밑에 있었을 것이다.
“회사 예의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의리부터 좀 공부해야겠어.”
“아······.”
그제야 마팀장은 자신의 실책을 눈치챘다. 태세를 전환하는 것도 우선 천이사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에 했어야 한다.
자신을 마치 역겨운 시궁쥐처럼 바라보는 문이사 눈빛에 마팀장은 식은땀에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끝났다. 자신과 문이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만약 이 사실이 천이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천이사의 기세가 꺾인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는 아직 회사를 떠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천이사의 성격상······.
결코, 이 일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해병대 콤비 역시 슬금슬금 마팀장과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마팀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듯이······.
“어쨌든 남궁과장.”
“······예.”
“이런 쓰레기는 그냥 무시해. 회사생활에······. 아니, 인생에 해가 되는 타입이야.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자네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그리고 네 뒤에는 내가 있다. 앞으로 내가 널 챙겨주겠다.
문이사의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정작 그말을 들은 남궁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없어요.”
“뭐?”
“필요 없다고요.”
“어?”
설마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문이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듯이 뒤에 있던 삼인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삼인방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쯧,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시간 늦었으니, 서둘러 미팅하러 가죠.”
남궁원은 목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터트리지 못했다는 사실과 미팅이 지연되었다는 사실. 이 두가지 때문에 짜증이 잔뜩 치민 상황이었다.
“음······. 저 친구가 버릇이 좀 없긴 하네요.”
최기환이 성큼성큼 회의실로 향하는 남궁원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주 좋아.”
“?”
“그래, 저런 기백! 패기! 아주 좋아. 딱 내 스타일이야! 저런 인재야 말로 이 문상훈이에게 필요한 모습이지!”
“허······.”
예상을 깨는 것은 문이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는 남궁원의 뒷모습을 향해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짓는 문이사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복도 구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
“와, 이거 꿀잼인데?”
“그러게요. 스펙터클하네요.”
표세인과 홍기도는 몰래 상황을 지켜보며 감탄했다.
“저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도 있구나. 남궁원이 밀당에 재능이 있을 줄이야.”
“솔직히 반쯤은 운 아닌가요?”
“원래 그 운을 못 잡아서 인생 꼬이는 법이야. 그리고 너도 전혀 짐작 못 했잖아?”
“음······.”
“너 어쩌냐, 이런 부분까지 남궁원이 레벨업하면······. 너······. 괜찮겠냐?”
“괜히 경쟁 부추기지 마시죠!”
역시 들켰구나, 하고 표세인은 실실 웃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홍기도의 심정이 불편하다는 것쯤은 익히 간파한 상황.
‘좋다. 좋아. 알아서 후속편까지 막 진행되는 구나.’
잘 팔리는 각본은 어련히 후속편까지 착착 진행되는 법이랄까?
표세인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흐뭇했다.
< 잘 부탁한다. 새끼들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