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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56화 (156/346)

156.

사람에 따라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감정상태가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즐거울 때,

누군가는 평온한 상태,

그리고······. 누군가는 분노한 상태인 경우가 있다.

남궁원은 현재 짜증과 흥분이 공존하는 상태였다.

‘미팅 앞두고 이게 뭐람!’

오랫동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생전 처음, 그것도 이만한 규모의 프로젝트의 컨셉을 자신이 설계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

그리고 실장급들의 피드백을 받아 한층 더 완성도 있는 기획으로 다듬는 작업.

상대도 더없이 훌륭하다. 문이사를 중심으로 실장 삼인방.

그들의 감탄사를 끌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회의실에 입장하기 전에 발생한 불쾌한 이벤트.

남궁원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우선 기본적인 사안은 이미 공유해 드렸으니, 간략한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AOS 기믹이 더해진 FPS. 비쥬얼과 배경 컨셉은 철저히 중국풍.

현대의 인물들에게 과거의 위인, 혹은 설화와 신화속 인물들이 빙의하여 펼쳐지는 전투.

AOS 장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간포탑에 가미될 예정인 오행시스템에 의한 유니크한 전략성.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며 기대할 만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는 컨셉이었다.

남궁원은 명료하면서도 힘 있는 언변으로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기획을 설명했다.

남궁원의 부족한 연차를 걱정하던 삼인방도 나무랄 점이 없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일 정도.

“확실히 컨셉 자체는 좋아.”

성진규는 펜 끄트머리를 입에 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자로서 나무랄 데 없는 방향성이다. 독창성과 안정성 두 가지 모두가 갖춰진 기획.

거기에 더해 AOS와 FPS를 결합하기 위해 기획단계에서 손봐야 할 포인트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상황.

“그렇지. 오행 시스템은 다소 버그가 걱정이긴 하지만······. 이건 좀 하드하게 테스트를 병행하면서 물고 늘어져야 겠지.”

최기환 역시 동의했다. 프로그래머들에게 있어 구태의연한 개성 없는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은 상당히 맥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컨셉에는 상당히 유니크한 시스템들이 많기에, 프로그래머로서 다소 가슴이 설렌다.

“무엇보다 이거 상품성 있겠는데······.”

보정훈은 디자인 파트를 담당하는 보정훈은  빙의와 현대인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배경이 현대이니 현대적인 룩셋을 판매가 가능하며, 여기에 더해 빙의라는 측면을 내세워, 다소 환상적이거나, 선협적인 디자인을 추가해도 문제가 없다.

비쥬얼 메이킹에 제약이 적다는 것은 그 자체로 디자이너들을 설레게 하는 법.

“좋아, 시작부터 분위기가 괜찮군.”

문상훈은 주변을 돌아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모두가 긍정적인 에너지가 완연한 가운데, 정작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남궁원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회의는 단순한 브리핑이 아니라, 상호간의 피드백을 주고 받는 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럼 이제 피드백으로 넘어가죠.”

“아, 그래야지.”

“······미리 말씀드리는데.”

“?”

“피드백······. 기대하고 있습니다.”

“?”

그 순간 모두의 눈에 기묘한 형상이 보였다. 남궁원의 등 뒤로 흰 이빨을 드러낸 미친개의 형상.

‘이, 이거 뭔가 분위기가······.’

삼인방은 무언가 크게 잘 못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는 경험 부족한 과장급 인사를 자신들이 다독여주는 자리가 아니었다.

직급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는 기획팀의 미친개가 그들을 물어뜯기 위해 이를 갈고 나선 자리였던 것.

단순히 상급자들을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원은 철저히 준비했다.

삼인방의 입장에서 준비해올 수 있는 피드백에 대한 예시와 그것의 보완점, 그리고 그 이후 얼개까지······.

남궁원이라는 인재가 지닌 장점 중에 하나인 철두철미함이 과도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어째서 이런 인재가 이제야······’

그저 문상훈만이 남궁원을 향해 애닲은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

*

*

“잘 했냐?”

“······그냥저냥.”

미팅을 끝마치고 돌아온 남궁원은 다소 피로하다는 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홍기도는 오랜 경험으로 이럴 때의 남궁원은 피하는 것이 답이라는 사실을 익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더이상 가타부타 말 걸지 않고 냉큼 관심을 끊었다.

나 역시 모니터 너머로 힐끔 남궁원을 살피며 분위기를 가늠했다.

지쳐있다는 것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좋은 징조다.

직급이 부족한 그녀에게 최악의 상황이란, 직급에 눌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채로, 불연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지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냈다면 필시, 나쁘지 않은 회의였을 것이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표팀장.”

“아, 문이사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이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실장 삼인방에게도 목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뭐랄까 문이사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렸다는 듯이 얼굴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반면······.

뒤에 있는 삼인방들은 퀭하고 초췌하다.

설마······. 남궁원 너······.

실장들을 상대로 역딜을 펼친거니?

남궁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궁원도 뭔가 캥기는 것이 있는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혹시······. 회의 중에 문제라도······.”

“아니. 아주 훌륭했어.”

문이사는 호탕하게 대답했고,

“예전에 문이사님 밑에 있을 적에······. 영혼까지 탈탈털렸을 때가 이런 기분 아니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삼인방은 뭔가 과거의 추억까지 읊조리며 넋이 나가보였다.

“아무튼 기획 내용 공유는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세부기획이 나오면 바로, 바로 토스하라고······. 전력으로 서포트 할 테니까.”

“그거 감사한 말씀이네요.”

하지만 정작 그 말은 삼인방의 입을 통해 나오길 바랐다. 어쨌건 실무자는 그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현재 그런 말을 입에 담을 기운 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우리는 가보도록하지.”

“네. 살펴가십시오.”

나는 문이사와 삼인방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남궁원을 불렀다.

“······왜요?”

이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 사춘기 즈음에 캥기는 것이 있는 아이가 부모에게 보내는 눈빛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옥상 가자.”

“······네.”

나는 남궁원과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너 편한대로 해.”

“······네.”

내 지시에 남궁원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벤치에 늘어지듯이 기대고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많이 힘들었냐?”

“솔직히 힘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제 스스로 좀 취한 기분에 너무 떠들었죠.”

“결과는 만족스러웠고?”

“······네. 그런데 저 나름 선은 지켰어요.”

걱정하던 것이 그거였구나, 내가 윗선에 무례했다고 지적할까봐.

“우리 처음에 만났을 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잖아요.”

“맞아. 대부분 그렇지.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모르고.”

“여기서 인정을?”

“하지만, 네가 그러지 못하게 하고 있잖아.”

“네?”

“네가 계속 자신의 주가를 높이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겠냐. 더더욱 잘해야지.”

내 말이 조금 낯부끄러웠던 걸까? 남궁원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낯부끄러운 말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남궁원은 고개를 돌린 채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어려운 것도 없었어요. 모두 호의적이신 상황이었고, 그냥 저 혼자······. 조금 흥분했죠.”

“흥분?”

“뭐랄까······. 준비해오신 내용들이 저를 마냥 두둔해주려는 느낌이랄까? 왜 그렇잖아요. 완벽한 기획이란 것이 어디 있나요. 서로 흠잡으며 물어뜯고, 또 그 과정에서 보완을 거듭하면서 완성시켜 나가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다들 너무 호의적이시니, 반대로 얕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급발진했죠.”

남궁원이 말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그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다들 둥기둥기 해주려고 왔다가, 갑작스럽게 으르렁을 마주하고는 당황했으리라······.

“이래도 칭찬받을만 한가요?”

“응. 물론이지. 그게 네 방식이잖아.”

“하지만······.”

“이 시점에는 네가 리드 디자이너잖아. 네 스타일대로 끌고가야지.”

“······음, 뭐 욕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내 말에 남궁원도 납득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말 나온김에 말인데······.”

“네?”

“너 이번 프로젝트 리드기획으로 끝까지 밀고나가볼래?”

“예? 하지만 팀장님이 계신데······.”

“나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이제 슬슬 기획쪽은 백업이 한계야. 일정조율, 파트간 조율, 외부 업무······. 뭐 슬슬 그런 일들에 집중해야지.”

아직 팀장이라는 직급을 달고는 있지만, 이미 내 입지는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지 오래다.

“흐음······. 그런가요?”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이미 한쪽 입가가 바르르 떨리고 있다. 이건 명백히 웃음을 참고 있는 느낌이다.

“솔직히 이거 탐나는 프로젝트 아니냐. 게다가 네가 처음부터 손댄 작품이고.”

“그건 그렇죠?”

“해봐.”

“······정말로 끝까지 제 스타일대로 해도 돼요?”

“그럼, 우리팀 파이터가 갑자기 약해지면 곤란하지. 보여줘. 네가 누구인지.”

“······진짜죠?”

의심도 많네. 이미 좀비로얄 팀원들 닦달할때는 언제고······.

“대신 한가지만 부탁하자.”

“뭔데요?”

“김순영 차장 알지?”

“알죠.”

“그 사람······. 기합 좀 넣어줘.”

“기합을 넣어요?”

“응. 미친 듯이 굴리고 쪼아줄 수 있겠냐?”

“에?”

과장이 차장을 미친 듯이 굴리고 쪼아 댄다? 이건 남궁원이라도 당황스러운 주문이겠지.

“본인이 원하는 거야. 너도 알잖아. 김차장 요즘 사람이 너무 풀이 죽은 거.”

“그렇죠. 홍기도에게 듣기로는 예전에는 좀 재수 없긴 했어도, 자신만만한 캐릭터였다던데······.”

“숨도 못쉬게 갈궈서 악! 소리 다시 내게 만들어줘.”

“정말 그래도 돼요?”

“본인이 원하는 거라니까?”

물론 이런 그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자신 보다 한 직급 아래의 기획자에게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 보면, 자신감이 문제가 나이라 열불이 터져서라도 원래 성격이 나오겠지.

그저 고분고분하면 기획 입장에서야 편하지만, 그 상태로 올바른 맨파워를 온전히 끌어낼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은 제정신부터 찾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그러다가 반대로 엇나가면요?”

“네가 그런다고 기죽을 타입은 아니잖아?”

이런 부분은 홍기도에게도 부탁할 수가 없다. 우리팀에서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남궁원 뿐이다.

“책임은 표팀장님이 지신다는 거죠?”

“물론이지. 애초에 내 부탁이잖아?”

“알겠습니다. 저만 보면 오금이 저리도록 만들어 놓을 게요.”

“······그래. 그런데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폭력은 안된다?”

“무슨 말이에요! 저 여자에요!”

그래. 너 여잔건 아는데······.

내가 살아온 세계가 그래서 그런가······. 체대 출신 여자들 군기 잡는 거, 너 못봤지······.

“아무튼 부탁한다.”

“라져!”

남궁원이 웬일로 홍기도를 흉내내서 경례로 대답했다.

*

*

*

“그런데 김차장님은 판호건에 붙인다 치고······.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세?”

근래 부쩍 가까워진 윤현창과 김순영은 앞으로 닥칠일을 걱정하며 오늘도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였다.

답답한 마음에 무턱대고 표세인에게 달라붙어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니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 여기들 있었군.”

“한팀장님?”

한팀장 뒤로 팀원들과 더불어 의외의 인물들이 함께였다.

“마침 잘됐네. 합석하지.”

“네.”

쟁반에 커피를 들고 있던 표세종이 힘찬 대답과 함께 커피를 배치했다.

“그런데 저 둘은 왜?”

다른 이들이야 그렇다 치고, 의외의 인물들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양실장님이 이 둘이 오늘부로 우리팀에서 함께 하게 됬다더라고 그리고 파트상 네 밑이다. 현창이 네가 잘 좀 챙겨줘라.”

“······잘 부탁드립니다.”

“지,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인사하는 두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해병대 콤비였다.

“이 둘이 이제부터 제 밑이라고요?”

“파트상 그렇잖아? 잘 좀 굴려서 우리팀 색으로 물들여봐. 그리고 니들 원래 친하잖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한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표세인 이 새끼······. 큭큭큭.”

윤현창은 도살장에 끌려온 소꼴을 하고 있는 해병대 콤비를 보며 키득거렸다.

“마! 표팀장 동생도 있는데, 새끼가 뭐냐.”

“괜찮습니다. 원래 두 분 동기에 친구란 것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입으로는 할 수 없으니, 대리만족도 되고 좋네요.”

“대리만족?”

일평생 하극상만을 꿈꿔온 남자. 표세종은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잘 부탁한다. 새끼들아······.”

“아니, 그분들한테는 말고요.”

표세종이 짜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윤현창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 보약이라도 한 채 지어 줘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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