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나는 주말을 맞이해 연아와 함께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어머, 연이 왔구나!”
“아이고, 연이 왔니?”
오늘도 부모님은 현관으로 달려와 연아만 안으로 쏙 들이고는 나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으셨다.
······저도 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팀장······. 아니, 형 왔어?”
그래, 그래도 나를 반겨주는 것은 동생 놈뿐이구나.
“상여금에 관한 첩보를 입수했는데, 간만에 형제끼리 긴밀한 대화가 필요한 시점 아닌가?”
“······.”
그래. 너 답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모두 거실에 모였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반기는 척이라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에이, 반기지. 사과 먹어라.”
“오! 어디 있는데요?”
“부엌 식탁에 있으니까. 가져와 깎아.”
“······.”
뭐랄까, 요즘 회사에서 이래저래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이라서 잊고 있었다.
그래, 내가 원래 집에서 딱히 좋은 대접 받는 캐릭터가 아니었지.
이런 찬밥 취급 오랜만이다.
“어머니,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말인데요.”
“그랬니? 그럼 그게 좋겠다.”
엄마와 연아는 뭔가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반면 아버지는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 TV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가 깎은 사과를 아작아작 씹으셨다.
“그래서, 결혼식은 내년 봄에 한다고?”
“네.”
“뭐 도움 필요하냐?”
아버지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으시고 넌지시 물으셨다.
도움······. 도움이라······.
“뭐 요즘 너 돈 잘 버는 모양이니, 내가 딱히 해줄 일은 없을 것 같다만······.”
“하나 있죠.”
“뭔데?”
“지난번 벽조목 주사위 말인데요.”
“어? 아아, 그 사돈어른 선물로 드렸던거? 왜, 그거 역시 별로 마음에 안 드신데?”
아버지는 살짝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니요.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는데, 혹시 그것과 비슷한 거 하나 더 구할 수 있을까요? 돈은 제가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
“흐음······. 너 요즘 정말 돈 많이 버나 보다?”
네. 아마 자세히 알게 되시면 간 떨어지실 겁니다. 제가 효도할 겸 일부러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는 거죠.
“······뭔가 좀 재수 없어졌는데?”
“······아니, 딴 집은 자식들 돈 많이 벌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더만, 저한테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전에는 할인마트 송사장님 자식들은 돈 잘 버는데, 넌 뭐하냐고 면박주시더니?”
“그 집 애들이 효자지, 지난번에도 송사장 내외 제주도 보내주셨다더라.”
“여행가고 싶으세요? 해외여행 한번 가보실랍니까? 진짜로 한 1년쯤, 한국 땅 못 밟게 해드려요?”
솔직히 1년이 아니라, 10년이라고 못 할 것은 뭔가?
“맞아요. 아버지, 이제 우리 형 클라쓰가 송사장님네랑 비교할 수준이 아니죠.”
“송사장?”
순간 연아의 고개가 훽 꺾였다. 아차! 연아 앞에서 송사장님 댁 이야기는 금지지······.
아무래도 우리 첫 만남과 엮인 에피소드라서 조심해야 한다. 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뭐 돈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너 요즘 뭐 일수하냐? 니들 등치면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해야 한다고 했냐, 안 했냐.”
“그럼, 그럼. 우리 집 장남이······. 아, 아니지! 상여금······. 아버지. 형님께 무례하지 마시죠.”
동생놈은 공격기회 포착과 상여금 관련으로 아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는 것인지, 과부하 상태였다.
“넌 뭘 잘 못 먹었냐? 오늘따라 애가 상태가 이상하네?”
“제가 종종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말을 듣는 편이죠.”
“······.”
세종이 저놈은 어디서 상여금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인지,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다.
“그래서 어머니도 한국에 오셨다고?”
“아······. 네.”
“음······. 그래. 알겠다.”
에머리가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엄마와 연아의 대화에 귀가 쫑긋했다.
다행히도 우리 엄마가 눈치 100단이시라, 에머리와 만나고 싶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셨다.
다행이다.
아직 에머리와 우리 가족들이 만나기에는 시기상조다.
이 문제도 조만간 해결해야겠지.
“아무튼, 갑자기 주사위는 왜? 사돈어른이 하나 더 필요하시대?”
“장인 어른 말고······. 회사에 전무님이 꼭 좀 갖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전무님이?”
“네.”
“그 업계는 골프 대신 주사위라 이건가?”
음······. 그냥 그분들이 좀 특별하다는 느낌이긴 한데······.
“뭐 그쪽 레벨 이야기죠.”
“아무튼 알겠다. 한번 알아보마.”
“감사합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아버지께 전달 드렸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이걸로 함전무에게 마음의 빚은 정리된 느낌.
“형님, 이것 좀 맛보십시오. 사과가 아주 꿀맛입니다.”
“고맙다. 내가 깎은 사과를 선물 받다니······. 감개무량하구나.”
“형님이 깎은 사과라서 더 맛있었던 거군요! 역시 맥베스의 기대주!”
“얘 진짜 왜 이러냐? 너 회사에서 얘 후드려 패기라도 했냐?”
“······네, 뭐······.”
주먹 말고 조만간 돈으로 뺨 한 대 후려칠 예정이긴 합니다만······.
“너 어디서 상여금 이야기를 주워들었냐?”
“마, 말할 수 없다. 나 표세종. 입을 함부로 놀리는 남자가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홍기도구나······.”
“헉! 안돼. 그런거 맞추지 마! 홍과장님한테 미움받으면 안 된단 말이야.”
“홍기도에게 미움받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임마, 지금이 특수한 경우야. 원래 기획이랑 프로그램은······.”
“우리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야! 그리고 홍과장님은 장래에 크게 되실 분이다!”
아······. 이놈들 붙어 다니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소문나서 주가 떨어트리기 전에 어떻게 떼어놓을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그런데 보너스를 네가 주냐?”
“네,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래?”
부모님께는 내가 스튜디오 대표라는 사실을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다. 바빴던 탓도 있고, 실제로 업무 관련 이야기를 잘 안 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내 스스로도 아직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은 탓이 크다.
내 정체성은 아직까지는 맥베스 소속의 팀장, 그리고 개발자라는 마인드가 강하다.
대표라고는 해도, 실제 대표로서 해야 할 업무들은 거진 양실장과 제임스가 대신 진행해주고 있는 탓에 체감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보너스를 뭐 얼마나 주려고?”
“후훗,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가······. 아버님, 제가 거하게 한 번 쏘겠습니다.”
동생놈은 신이 나서 주체를 못 하는 것 같다.
“액수 상당할 거긴 한데······. 세종이 상여금은 특별히 엄마 통장으로 쏘려고.”
“그래라.”
“뭐?! 내 상여금을 왜 니 맘대로 정해!”
“니는 반말이고 임마!”
나는 잽싸게 동생놈의 발목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이른바 앵클락이라 불리는 기술.
“큰돈은 부모님께 맡기는 법이란다. 알겠냐?”
“제, 젠장······. 언젠가 꼭 복수하겠다.”
“그만해라, 아! 배달 왔나 보다.”
오늘은 특별히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통닭과 족발이라는 다소 단백질이 과도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우리는 축구 경기를 보며 거실에서 배달음식을 해치웠다.
“형 그런데······.”
“응?”
“형이랑 형수님, 회사에는 언제까지 비밀이야?”
“음······.”
확실히 이제는 슬슬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 당일에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지만······.
청첩장 돌리면 어차피 들통날 일이 아닌가?
“늦어도 청첩장 돌릴 때 즈음에는 말하겠지? 왜? 설마 너 남들에게 말했냐?”
“나 입 무거운 거 모름?”
“몸무게 많이 나가는 것은 알지.”
“나 요즘 살 많이 빠졌거든?”
운동을 그만둬서 그런지, 확실히 좀 빠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근돼 체형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입단속 잘해라. 특히 홍기도 앞에서는 입 조심해. 그 놈 촉이 장난 아니다.”
“애초에 홍과장님은 묻지도 않아.”
“오~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별일이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어쨌든 홍기도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다름 아닌 양실장과 홍켓몬이니까.
어쨌든 약속은 약속.
회장님과 약속한 대로, 결혼 전까지는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겠지.
솔직히 이제와 커밍아웃 한다고 하면······.
그 파장이 두렵다.
“그래. 옳은 결정이다. 세종이 너도 회사에서 형이니, 형수니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회사는 회사지.”
“나 잘하고 있어.”
아버지의 당부에 세종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세인아.”
“네.”
갑자기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긴말 않겠다만, 여러모로 겸손해야 한다.”
“네. 주의할게요.”
“그래. 뭐 너야 알아서 잘 할 놈이지.”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관심을 끊었다.
그래.
굳이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도록 노력하자.
*
*
*
“아까 아버님께서 무슨 말씀하신 거야?”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에 도착하자, 연아가 넌지시 물었다.
요즘 결혼 준비 관련으로 연아는 우리 엄마를 전담 마크 하는 상황이라, 다른 가족들과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다.
“아니, 뭐 돈 좀 번다고 건방져지지 말아라?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틀린 말이 아니며, 확실히 신경써야 하는 부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별것 아닌 말에 의아스럽게도 연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거 물은 것 아닌데?”
“뭐?”
“아까 할인마트, 송사장. 그런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아······. 그게 거기까지 들렸군요. 아······. 그게 음, 뭐랄까······. 음.”
송사장이 언급되면 할 말이 없어진다. 딱히 내가 잘 못 한 것은 아니지만, 연아가 신경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땀이 난다.
마치 체력저하 디버프 주문이라도 되는 것 같다.
아아, 숨막힌다.
나는 연아의 날카로운 눈빛을 애써 모른척하며 고개를 돌리고 커피를 들이켰다.
“밤에 커피 먹지마.”
“난 커피 마셔도 잘자.”
신입때, 철야를 위해 에너지 드링크와 고농축 카페인을 하도 몸에 때려 부은 탓인지, 일반적인 커피 몇잔 정도는 별 영향이 없다.
“그분 이름도 연아라고 했지?”
“어, 그렇지.”
아버지 지인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대형 할인마트의 주인인 송사장님. 그리고 그 분의 딸 송연아.
별것 아닌 우연에 불과하지만, 그 우연 덕분에 지금 내가 연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인생이란 비쥬얼노벨 게임의 선택지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하나는 별 것 아닌 선택과 우연들이 중첩되어 결국에는 커다란 줄기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줄기를 타고 올라간 이후에야 비로소 결과를 깨닫게 되는 거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자, 최고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그날, 연아와 처음 만나게 되었던 그날······.
나는 실수에 가까운, 그러나 완벽 이상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를 선택했다는 거다.
“사실 경계할 것은 없잖아?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기도 하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오빠의 짝으로 고려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 쓰이지. 나보다 나은 사람일까 봐. 혹시라도 오빠에게 더 좋은 길을 내가 막아선 것일 수도 있잖아.”
연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푸하하하!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왜 그래, 사람들 쳐다보잖아.”
세상에, 연아는 대체 어쩜 이렇게도 스스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걸까?
맥베스의 여신이자, 내 주변에서는 환상종이라 불리는 자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비록 송사장님 따님은 만난 적이 없지만······.”
“?”
“나에게 너 보다 좋은 선택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감을 가지라고요!
환상종씨!
“조만간 자신감을 선물해 줘야겠네.”
“자신감을 선물해?”
연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오퍼레이션 프러포즈!
곧 시작해야겠다.
< 내가 왜 시작가를 1억으로 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