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순위가 바뀌겠군.”
햇살이 제대로 들지 않은 널찍한 사무실. 이곳은 국내 굴지의 게임회사인 엠씨소프트의 사장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소 딱딱한 인상의 남자는 이번에 새롭게 출시한 경쟁사의 게임을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남자의 이름은 설동은.
엠씨소프트의 실세 중의 실세라고 여겨지는 설동은였다.
“변화라······. 그래 그럴 때도 됐지.”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던 국내 게임업계의 순위.
3M이라 불리는 게임업계의 삼대장. 하지만 정작 맥베스는 확고한 3위라는 포지션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는 확고한 간판 타이틀이 없었다.
맥베스라는 이름을 제시했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표작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맥베스의 오랜 문제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탄생했다.
깨비몬.
전례 없는 흥행 가도를 내달리는 최강의 캐시카우가 등장한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설동은은 잠시 머릿속으로 몇몇 인물들을 떠올렸다. 과연 인재의 차이일까? 아니다. 인재풀에서 맥베스에 결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업계 순위란 것은 그런것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은 어쨌건 순위대로 문을 두드리기 마련.
다소 자신들의 실수로 누락이 발생하거나, 더러 이직을 통해 떠나가는 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인재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동은의 곁에 있던 여성이 말했다.
“그럼 내 잘못이라는 거군.”
인재에 문제가 없다면 육성과 그들의 관리에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이들의 정점에 있지 않은가?
“이번에 올라온 보고서입니다. 신입들이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몇 차례 언급한 사례들이 있었다는군요.”
“묵살된건가?
신입의 아이디어가 곧이곧대로 반영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신입을 벗어나면 저들 스스로 아이디어에 필터를 갖추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기란 쉽지가 않은 법.
“직급도 폐지하고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구현해보려 했음에도 쉽지 않군.”
“미국이나 유럽이라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근이 여의치 않으니 채찍인가?”
“채찍이라고 하심은?”
“이런 의견이 가장 많이 누락된 부서, 팀장급, 부장급, 이사급.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관리직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나?”
설동은의 말에 여성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팀장부터 시작해서 이사까지. 한 번에 철퇴를 가한다는 것은 거의 부서 통폐합 수준의 제제일 것이다. 문제는 이 설동은은 실제로 그렇게 할 힘이 있고, 이미 수차례 그러한 일을 해왔다는 것.
“지난번에 2개 부서를 해체한 것만으로도 파급이 만만치 않은 상태인데······ 게다가 그만한 인원들에게 다시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은 걱정 때문에 말을 해보기는 했지만, 여성은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설동은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의도와 일치 하지 않는 조언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언제 우리가 돈 때문에 무언가를 못 한 적이 있나?”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을 쫓고 있기에 대규모 트리플 에이급 게임을 개발하지 않는 것일 뿐.
국내 대형 게임 개발사들치고 돈에 허덕이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드오션이라는 단어조차 빛바래는 시점이건만······.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그 단물을 맛본 회사들의 저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회사가 보유한 게임들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금액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이 게임은······ 재미 요소가 충분하군.”
재미있다. 라는 표현이 아닌, 굳이 재미 요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설동은답다고 여성은 생각했다.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인물임에도 그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물론 시장 조사 차원에서 그는 게임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업무적이며 분석적인 견해로 게임을 ‘수행’할 뿐이다.
지금도 스마트폰을 들어서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조작하는 그의 얼굴 어디에도 게임에 대한 즐거움이나, 흥미 따위는 없었다.
“맥베스는 유독 시나리오 파트가 약하다는 인상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권태인 차장이라는 인물이 깨비몬 개발팀에 합류하고 열정적으로 개발에 임했다고 합니다.”
“새삼 ‘열정적’이라는 단어가 첨부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개발팀에는 맨파워 관리에도 뛰어난 인물이 있다는 거로군.”
“시스템과 컨텐츠 부분에서도 유저들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그렇겠지. 근래 이슈인 서바이벌 크레프팅 요소에 도구를 펫으로 치환시켜서 성장시키고······ 그것을 현물상품들과 연계. 종국에는 NFT 경매 형태의 상품판매 전략까지. 이건 정말이지, 놀라워.”
설동은의 반응에 오히려 여성이 더 크게 놀랐다.
자사에서 개발하는 게임들 조차 이런저런 업계 사정과 지식들을 총동원하며 흠결 잡기에 여념이 없던 사람인데, 깨비몬에 대해서는 호평 일색이다.
“굳이 흠결을 찾자면, 픽셀아트라는 것 정도인가?”
“그 부분에서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정교함이 부족한 대신, 특유의 귀여움이 어필된다는 평이지요. 또한 초반 타겟인 아이들에게는 세부 디테일을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 역시큰 장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확한 디자인 덕분에 기타 현물 상품들 제작에도 독특한 이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깨비몬 캐릭터 상품 출시 시점부터 이 부분을 연구해왔었기에 여성은 깨비몬의 외부 평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틀렸군. 역시 게임업계라는 것은 정말이지 종잡기 어려운 세계란 말이지.”
픽셀 아트는 어디까지나 인디게임의 영역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판매고를 기록한 블록크레프트 같은 제품이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업계 종사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부정형 생물처럼 제멋대로 꿈틀대며 종잡을 수 없는 기분 나쁜 무언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런데, 경쟁사에서 이만한 계획이 진행되는 것을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설동은의 말에 여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설동은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도 자책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맥베스의 개발상황이 암울했다는 것에서부터,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이 사내벤처라는 난데없는 신규 개발팀에서 출발했다는 것.
하지만 이 모든 이유보다도······ 어떤 설동은의 수완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속이 쓰렸다.
“양성태 실장, 알고 계시지요?”
“아! 그렇군. 그 친구가 이 일을 덮으려 했군. 그렇다면 자네로서는 어쩔 수 없었겠어.”
처음의 질책성 발언보다도 이 말이 더욱 깊게 가슴에 박힌다.
양성태라는 인물과 자신은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투가 아닌가?
그럼에도 거기에 반박할 수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에 스스로 화가 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놓친 정보는 그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성태 실장이 새로 파벌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파벌? 양성태가? 가만! 얼마 전 맥베스 조회장의 딸이 실장으로 취임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과 연계된 승계 작업의 일환인가? 그가 킹메이커로 나섰나?”
얼마전 비서로 근무하던 조연아가 조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공표하며 실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곧바로 깨비몬 캐릭터 사업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했다는 이야기는 업계 전체에 큰 화젯거리였다.
처음에는 그 파격적인 투자와 공격적인 마케팅에 모두가 우려의 눈길을 보냈더랬다.
마음만 앞서는 전형적인 금수저의 첫 번째 프로젝트라는 느낌.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굉장한 성과를 이룩했다.
현재 깨비몬의 NFT 상품의 대박 행진에는 조연아의 공로가 적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조연아의 배후에 양성태라······ 이거 그림 나오는데? 앞으로가······”
조연아라는 야심 넘치는 젊은 후계자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한 양성태의 조합.
확실히 이것은 그럴듯한 화학작용이 예상되는 조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성이 먼저 그의 말을 끊었다.
여성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설동은은 자신의 말을 끊는 무례함보다도, 착각이 길어지게 만드는 것을 더욱 크게 문제 삼는 타입이라는 것을.
“조연아 실장의 배후에 선 것은 이걸영 상무입니다. 양성태 실장은 오히려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여······ 외부에서 보기에는 각을 세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면적으로 손을 잡은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완전한 동행 노선은 아니다. 그렇군. 확실히 조회장이라면 좋아할 만한 그런 그림이야.”
자신과는 달리, 맥베스의 조회장은 일종의 방임주의에 가까운 경영철학을 고수한다. 그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각 스튜디오 단위로 잘게 쪼개지기 쉬운 게임 개발사의 특성상 이러한 방임 정책을 취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지만, 조회장처럼 아예 경쟁을 직접 유도하는 인물은 없다.
“자신의 후계자마저 곱게 길러낼 생각은 없다. 이건가? 흥미롭군.”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수년 동안 비서로 근무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요.”
“어떻게 부녀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만큼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별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만 봐도 조연아 실장이 일반적인 재벌 2세와는 다르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실제로 실적도 우수하고요. 그리고 그런 종류의 문제라면······.”
그런 종류의 문제라면 아마도 양성태가 철저히 관리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성은 끝내 그 말을 삼켰다.
“우수하다는 평가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뭐 그것만으로 속단하긴 이르지. 그런데 양실장이 파벌을 구축했다니······ 이건 예상 밖이군.”
조회장의 총애를 받던 양성태가 언제고 사내 정치 중심에 서리란 것은 예상하던 바였지만, 이 시점에 이러한 형태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완전히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뭔가? 뭔가 에피소드가 있나?”
“조연아 실장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사업계획 안이 번번이 표세인 팀장에게 커트 당했다고 합니다.”
“표세인······ 그 친구, 분명 이번 깨비몬의 메인 디렉터였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양성태의 오른팔로 알려진 남자이기도 하지요. 결국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양성태라는 이름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양성태라······”
전례 없는 단단한 정보 통제와 함께, 파벌을 구축.
동시에 표세인이라는 오른팔을 통해 깨비몬이라는 전례 없는 성과까지 이뤄냈다.
전부터 눈여겨보던 인재였지만, 그동안 어떠한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았기에 멀리서 입맛만 다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랜 기간 그저 조회장 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기에 야망이 부족한 것이 단점일까 싶었는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오랜만에 한잔해야겠군.”
설동은은 입술을 축였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김이사와 석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취소하지.”
“알겠습니다.”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기에, 여성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동은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단축번호에 저장된 양성태의 번호를 불러냈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고, 고작 경쟁사에 근무하는 일개 실장급의 번호를 단축키로 저장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가 한때, 얼마나 열렬하게 양성태에게 구애했었는지가 드러난다.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입니다.
“한잔하지. 지난번에 약속했던 것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그럼 지난번에 갔던 그 바에서 볼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
-한 명 더 대동해도 되겠습니까?”
“대동?”
양성태가 누군가를 대동하겠다니? 설동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짧게 떨렸다.
-네.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양성태의 음성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기대되는군······”
어째서일까?
가슴 속에 순간 철렁하고 깊은 파문이 일어난 것을 느꼈다.
“혹시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곧 알아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누구지?”
-표세인. 아마도 이름은 들어보셨겠지요?
순간 또 한 번 가슴 속에 파문이 발생했다.
*
*
*
“엠씨소프트 대표님이요?”
난데없이 웬 엠씨소프트 대표람?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양실장은 실풋 웃었다.
“별거 아닙니다. 일종의 인맥관리 같은 느낌이랄까요? 한번 만나보시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양실장의 제안이라면 거절할 수 없겠지.
게다가 공부······.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무언가 얻어갈 것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동행하겠습니다.”
국내 게임 개발사 3대장 중의 일각인 엠씨소프트 대표를 만난다.
그러고 보면 양실장은 예전에 내가 이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며, 고급 한식당을 소개해주었었다.
“왜 그러시죠?”
내가 혼자서 히죽거리자, 양실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그저······.”
“그저?”
“많이 컷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
“절대 힘을 쓰거나 하시면······.”
제발······. 마커스와의 일은 잊어주세요.
저 그런 놈 아닙니다.
< 게이머로서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