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여기입니다.”
양실장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역삼동 뒷골목 인근에 있는 룸 형식의 바였다.
“어쩐지, 문이사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업소네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다음에 한 번 제안해봐야겠습니다.”
“두 분은 요즘 어떠세요?”
아직 설동은 대표가 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짧은 담소를 나누었다.
“딱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죠.”
문득 문이사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문이사와 대동하고 있던 양실장.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물론 그것은 아직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때의 긴장감이 마치 서로 언제 칼을 뽑을지 모른다는 서늘함이 함께 했었다면, 현재는 은은하게 빛나는 잔불 같은 느낌이다.
그래. 분명 그들 사이에는 이제 전과는 확연히 다른 따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요즘 여러모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단순히 업무가 순조롭다는 것과는 별개로 양실장과 문이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어딘가 든든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동시에 만족감이랄까? 편안함이랄까? 그런 느낌도 뒤따르는 것 같다.
“저도 그런 기분입니다.”
나와 양실장은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 웃었다.
그리고 글래스에 담긴 위스키를 반쯤 마셨을 때쯤.
드디어 설동은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늦었군요. 사죄의 의미로 이 자리는 제가 내겠습니다.”
산뜻한 미소로 가벼운 농담을 건내는 남자. 설동은이라는 남자의 첫인상은 제법 호감이 갔다.
그런데······.
잠시 후 자리에 앉으며 나와 양실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묘했다.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느낌.
‘이분, 지금 연기를 하고 있군요.’
‘네, 그렇습니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양실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설동은 대표는 분명 연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원래 이렇게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겠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런 느낌의 연기를 습득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리 호감가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밉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동은 대표는 연기가 능숙한 타입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 허당이라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다.
이를테면, 스스로 보다 더 능숙하게 보이려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
내가 적어도 이정도는 해주고 있다. 이해하지?
라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특유의 어색한 연기와 더불어 묘하게 거부감까지는 가지 않는 그런 느낌이랄까?
“처음 뵙겠습니다. 표세인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설동은입니다.”
나도 손가락이 긴 편이지만, 워낙 마디가 굵은 탓에 그런 티가 잘 나지 않은데, 설동은은 그렇지 않아서 긴 손가락이 인상적이었다.
거친 일을 해보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었다. 외모도 그렇고 손도 그렇고······.
평생 거친 일과는 연이 없는 엘리트라는 인상이 짙다.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생각이 나면 바로 움직이는 습관이 있는 터라······.”
“아닙니다. 저도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기회······. 저희 회사로 이직하시겠다는 뜻은 아닐테고······.”
“당연히 아닙니다.”
묘한 농담에 양실장은 피식 웃었다.
뭔가 이 두 사람.
느낌이 비슷했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닮은 구석은 없지만, 마르고 큰 키 덕분에 슈트가 잘 어울리고 깔끔하고 젠틀한 이미지라는 점이 닮았다.
“언제고 설대표님께 표세인 팀장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기회가 왔군요.”
“흠, 양실장님께서 제게 사람을 소개해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는데요.”
“저도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인생이란 것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양실장은 말미에 나를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확실히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중소 개발사에서 빌빌대던 내가 국내 정상급 게임 개발사의 사장을 소개받게 될 줄이야.
아마 이전 회사에 근무하던 당시의 나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면, 배를 잡고 웃었겠지.
“깨비몬의 메인 디렉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설동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맞습니다.”
“좋은 게임을 개발하셨습니다. 아직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기세를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좋은 게임이더군요.”
“감사합니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치레라는 말이라는 느낌이라서 나 역시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설동은이 다시 양실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표세인 팀장님을 제게 소개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혹시 오른팔 격인 인물을 저희 쪽에 넘겨주실 것도 아닐 테고.”
이 사람 뭔가 인재 욕심이 참 많은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끝내 양실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가 진짜로 원하는 인재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확실히 나야 갑자기 불려왔고, 메인 디렉터라고 한다면 듣기는 좋지만, 고작해야 팀장.
당연히 그 위에 더 높은 직급과 직책을 갖춘 총괄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선 표세인 팀장님에 대해서 설명드리죠. 내부 사정상, 팀장 직급을 유지하고 계시지만, 깨비몬을 개발한 기둥소프트의 대표기도 하십니다.”
기둥 소프트의 대표라는 직함을 언급하자, 설동은 대표의 낮빛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가만, 그 프로젝트가 사내벤처 스타트업이 주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이분이 대표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로 놀랍군요.”
실장 삼인방을 포함, 외부 스튜디오 대표 정도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면 제법 업계 내부에 이름이 알려진 인재들인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별 볼 일 없는 회사의 바닥에서 구르다가, 맥베스로 이직한 후에는 양실장의 그늘에서 실적을 쌓았기 때문에 외부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저 양실장의 총애를 받는 일개 팀장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표세인 대표님.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엠씨 소프트 대표, 설동은이라고 합니다.”
“기둥 소프트 대표. 표세인입니다.”
그저 각자의 이름 앞에 회사의 이름이 붙은 것만으로도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정식으로 인사도 나누셨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오늘 이 자리를 제안하신 이유가 뭔가요?”
“일단은 안부 인사라는 핑계로, 양실장님께 이직을 권하는 것이 첫 번째.”
“늘 변함이 없으시군요.”
양실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맥베스에서의 대우는 고작 실장 아닙니까? 저라면 바로 이사 달아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거절합니다. 그러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양실장이 일반적인 실장들과는 궤가 다른 입지를 가진 것을 익히 알고 있을 테니, 이 대화 전체가 농담 반, 진담 반이란 느낌.
양실장이 한 번 더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채근하자 설대표은 입맛을 다셨다.
“파벌을 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이제와 갑작스럽게 움직인 이유가 뭡니까?”
“승산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승산?”
“예.”
“짐작이 잘 안 되는데······.”
설대표가 고개를 갸웃하자, 양실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로 향했다.
“딱히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표대표님과 만났기 때문이죠.”
“흠······. 확실히 깨비몬 수준의 히트작을 개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어쩐지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습니다?”
“예. 깨비몬은 시작에 불과하지요.”
“시작에 불과하다라······. 그 그림의 완성을 어디까지 보고 계십니까?”
“오랜 시간 동안 맥베스는 업계 3위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제 곧 2위로 오르겠지요.”
“신작 타이틀이 출시할 때마다, 작은 변동이야 늘 있어 왔던 것 아닙니까? 우리라고 이래도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설대표는 아직 역전까지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양실장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양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국내 업계 순위 1위 정도는 첫걸음마지요.”
“1위가 첫걸음마라······.”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게임 강국이라는 수식어에 개발 역시 포함될 수 있음을 증명할 때가 되었지요.”
“하하······. 농담하는 성격은 아니시라고 생각했는데······.”
설대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랜 경쟁자였던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언사가 아니던가?
설대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굳이 그것을 언급했냐는 것이다.
“그래요. 깨비몬 좋은 게임이고, 굉장한 매출이 기대되고 장래성도 높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표세인 대표님께서 해주실 겁니다.”
“호오······.”
바톤이 내게로 이어지자, 설대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구나.
이제야 이해했다.
양실장이 굳이 나를 이곳에 대동한 이유. 굳이 내게 맥베스의 장래 비전을 말하는 역할을 떠넘긴 이유.
우리는 지금 설대표라는 인물을 앞에 두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양실장의 대화다.
그는 지금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한 번 언급했었던, 양실장은 언제나 맥베스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적이 없었다.
양실장은 궁금한 것이다.
과연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라······. 그래요. 그거 좋네요.
“갑작스럽게 대표라는 직함을 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저의 정체성은 일개 기획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하지만 일개 기획자이기에, 높은 분들께서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흥미롭군요.”
“좋은 게임을 만들고, 또 만들고, 단순히 그것을 반복하면 자연스럽게 회사는 성장할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너무나도 당연한 나의 말에 설대표는 당황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저 게임만 잘 만들면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정말로 국내 개발사 대표 중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재미보다 매출을 쫓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이제 시대는 변했습니다.”
“시대의 변화······.”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주가가 하락하는 기현상.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엠씨 소프트는 자사 고유 IP에 과도하게 직착하고 동일한 BM을 고수하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회사다.
국내 2위 개발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선호는 대단치 않으며, 그저 일부 고래 유저들을 집중 공략하여 단기간 최대 매출을 뽑아내는 것에 특화된 회사.
“깨비몬은 이번에 상당한 매출을 거두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계속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기껏 어렵게 성공시킨 핵심 타이틀이 아닙니까? 새로운 도전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이것은 설대표의 경험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국내 대형 개발사 대표들의 경험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이들 역시 첫 시작은 지금과 달랐다.
“단언컨대 게임 컨텐츠 보다 훌륭한 BM 설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깨비몬을 마무리했으니, 새로운 타이틀로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설 것입니다.”
“중국? 판호를 따냈다고?”
마치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냐는 듯한 얼굴. 그는 동시에 양실장을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가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문을 걸어잠근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함전무님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 시장 공략이 결코 쉽지 않아.”
“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반드시 가능합니다.”
“근래 국산 게임들 중에서 중국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둔 케이스는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계속 안먹히는 방법만을 고수하셨으니까요.”
“허······.”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모쪼록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배우라고?”
그래. 잘 보고 배워라.
부디 정신 바짝 차리고 내 행보에 집중해라.
“제가 바라는 것은 맥베스만의 성장이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게임 강국에 개발이라는 키워드도 추가하겠다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개발사들 역시 각성하길 바랍니다.”
“하하······. 하하하. 게임업계 전반을 바꾸어 놓겠다. 역시 표세인 팀장님이십니다. 언제나 제 기대를 훌쩍 뛰어넘으시는군요?”
양실장은 나의 포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 게임업계만큼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는 업종이 따로 없는 법이죠. 맥베스가 성공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업계 전체가 진화할 겁니다.”
모두가 돈벌이가 되는 수집형 자동사냥 게임에 미쳐버린 결과······.
이제는 신작 발표 소식에 오히려 주가가 폭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않나?
이제 더이상 구태의연한 방식이 계속 먹히는 시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자사의 성장이라면 몰라도 굳이 경쟁사들까지 성장하길 바라는 이유가 뭐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대표이기 전에 기획자이고······. 그 이전에 한 사람의 게이머입니다. 좋은 게임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개발사간의 경쟁?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경쟁은 언제나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그만 정신 차리고 좋은 게임 좀 많이 만들어 주시죠.
누구보다도 게이머 표세인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라도 그렇게 하게 만들 겁니다.
< 형님, 어드바이스 좀 해주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