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오늘 특별한 일 없지? 퇴근 후에 같이 밥 먹자.
표세인의 메시지에 조연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누구?”
김인숙이 묘하게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남자친구에요.”
“어쩐지······.”
“어쩐지?”
“실장님 그거 모르시죠?”
“뭘요?”
“남자친구분하고 연락할 때, 얼굴 바로 풀어지는 거?”
김인숙의 말에 조연아는 싱긋 웃었다.
“어? 부끄러워 하실 줄 알았는데?”
“부끄럽긴요.”
김인숙의 예상과는 달리, 조연아는 배시시 웃으며 조금도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곧 결혼할 사이잖아요.”
“부럽다······. 진짜.”
김인숙은 순도 100%의 진심을 닮아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프러포즈는 어떤식이었어요?”
“네?”
“프러포즈 말이에요. 왜 그렇게 놀라요?”
김인숙의 의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조연아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프러포즈.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는 단어이건만, 정작 자신은 프러포즈를 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뒷배경을 숨기고 있다는 답답한 마음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하려는 생각만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된 이후에는 뭔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탓에······.
“설마 못 받은 것 아니죠?”
“······.”
“정략결혼 아니라면서요?”
“······.”
“정말 정략 결혼이에요?”
“정략 같은 것 없어요. 아버지도 그런 분 아니시고.”
“조회장님 속이야, 저는 모르죠. 하지만 그런데 왜 남자가······. 가만 본인이 먼저 결혼 이야기 꺼낸 거 아니죠?”
“······.”
조연아의 침묵에 김인숙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그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뭔가 고민에 잠긴 듯한, 조연아의 표정 앞에서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낀 탓이었다.
“일단 서둘러야겠네요. 일찍 퇴근하려면 속도를 내야죠. 고민은 그 다음!”
“······참 대단하세요.”
이미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열일모드에 돌입한 조연아를 보며, 김인숙은 감탄사를 흘렸다.
*
*
*
-따각, 따각, 따다다닥!
키보드 우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범인은 표세인.
평소에는 소리가 크지 않은 키보드를 사용하는데, 오늘은 하드 크런치용, 청축 키보드까지 등판했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남궁원의 질문에 함송희는 대답대신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홍기도 말고 어디서 답을 구할 수 있겠나?
‘저건 칼퇴 각 잡을 때 모드인데? 그렇군. 오늘 데이트군. 그것도······. 그냥 데이트가 아닌 모양인데?’
홍켓몬의 예지능력은 오늘도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데이트가 데이트지. 그냥 데이트가 아니면 뭐냐? 똑바로 말 안해?’
남궁원이 핀잔을 주었지만, 홍기도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표세인만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표세인에게로 향하는 홍기도.
“팀장님.”
“왜? 아, 혹시 시끄럽냐?”
키감이라는 것은 개인차가 큰 영역이지만, 기계식 키보드를 좋아하는 이들 중에서는 키보드 소음 때문에 평소 업무중에 기계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유의 딸각이는 소리와 반동 있는 키감은 표세인에게 업무의 활력을 더해주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꺼내지 않는 키보드였다.
홍기도야, 키보드를 보기만 해도 대강 표세인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어폰을 꽂고 함께 열일 모드로 돌입하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
굳이 이제와서 키보드를 신경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때아닌 등판이 신경쓰이는 것.
“사후보고가 없어서 신경쓰였는데······.”
“사후보고? 내가 너한테 보고를 왜······. 아!”
한발 늦게 표세인은 홍기도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다.”
“너무 늦으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진짜 도움 안필요하세요?”
“응. 준비는 다 끝났다.”
“흐음······. 준비가 끝나셨다라······.”
홍기도는 묘한 시선으로 표세인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좀 걸리네요.”
“뭘?”
“항상 바쁘신 팀장님이 남모르게 준비를 끝마치셨다라······. 굳이 준비라는 단어까지 사용하실 정도라면, 식당 예약 정도는 아닐 테고 뭔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준비하셨다는 건데······.”
“어?”
“보통 회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시고······. ”
“기도야.”
“근래에 움직임을 고려하면······.”
“멈춰!”
표세인은 홍켓몬의 긴급정지 스위치(다소 위험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를 눌렀다.
“윽!”
“애들아, 이놈 챙겨라. 그리고 나 오늘 바쁘니까 양해 좀 부탁할게. 금방 끝낼 테니까, 시끄러워도 조금만 참아줘.”
표세인은 홍켓몬의 뒷덜미를 잡아 고양이처럼 들어 자리에 앉혔다.
“넵! 저흰 신경쓰지 마세요.”
“오케이!”
표세인은 다시금 퇴근을 향한 미칠듯한 질주를 시작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언제고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이지만, 이 시점에는 곤란하다.
비록 결혼 날짜가 잡혔다지만,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였다.
아직 프러포즈 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표세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에도 손이 빠르기로 정평난 표세인이었다. 그의 키보드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불타고 있었다.
*
*
*
“생각보다 빨리 왔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칼퇴근한 나보다 30분가량 늦게 퇴근한 것인지, 연아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아니야.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당일에 바로 약속을 잡는 것은 우리의 연애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아는 무슨 일인지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우선 이것.”
“응?”
내가 난데없이 서류를 내밀자, 연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인수작업 마무리 되었구나?”
“맞아.”
“오빠는 참······. 일을 잘한다고 해야할지, 무섭다고 해야할지······. 놀라워 정말.”
처음 내가 맥베스에 오게되었을 때, 연아는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조차도 마찬가지.
별 볼 일 없는 중소기업에서 빌빌대던 녀석이 맥베스에와서 조회장과 모두의 지원을 등에 업고 훨훨 날더니, 이제는 사내벤처라는 이름으로 외부 개발사 스튜디오들까지 꿀꺽 삼켜버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변화다.
“그런데 이걸 왜 여기서?”
평소에도 우리는 데이트 중에 업무 관련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굳이 이런 서류까지 대동하는 경우는 없었으니, 연아는 더더욱 의아해하겠지.
“내가 잘은 모르지만······.”
“?”
“요즘 같은 세상에는 재벌2세라도 회사를 인수하는 것도 여러모로 잡음이 많은 법이잖아?”
내 말에 연아는 살짝 씁쓸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장 외부 주주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모양이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어리니까.”
IT는 워낙 신생이라서 비교 대상이 적지만, 다른 업계의 경우 빨라도 30대, 보통은 40대에 회사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연공서열 중심의 문화가 강력한 한국에서 연아의 나이는 맥베스 정도의 대기업을 컨트롤하기에는 무리라는 의식이 팽배할 것이다.
그리고 주주들의 동향은 임원을 포함한 회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
“일단 전무군단과 실장들만이라도 단결해서, 너를 지지한다면······. 그래도 한결 수월해지겠지?”
“······설마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였다고?”
연아의 큰 눈망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어라? 조금은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굳이 왜 이런 귀찮은 일을 떠맡았겠어? 게임 만들기도 바쁜데.”
뭐 게임 개발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이익이다.
곧 부회장이 되어 회사 경영의 일선에 서게 될 연아를 지원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이 그림을 그렸다.
“오빠에게도 야망 같은 것이 있지 않아? 권력욕은 뭐랄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같은 것 아니야?”
아마도 연아 본인이 그런 야망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주변 환경의 입지나 조건에 따라서 목표하는 자리는 다를 수 있겠지만, 꼬꼬마들의 반장선거에도 열띤 경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나라고 왜 그런 것이 없겠나.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욕망의 방향성이 다른 법이다.
내 경우는 그따위 것보다 연아의 행복이 우선이다.
“나는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야.”
“프러포즈?”
“지난번에 네가 말했었지. 내가 게임 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렇지······. 전혀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확실히 요즘 게임 개발보다는 그 외 업무에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느낌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개발에 필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재미있는 게임의 완성이지, 딱히 기획서만 붙들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아직은 연아도 회사를 완전히 물려 받은 것도 아니지 않나.
“나는 반대로 네가 무탈하게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게.”
“······.”
“조금 멋 없는 프러포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미안해.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프러포즈란 무엇일까 생각해왔거든?”
“프러포즈가 무엇이냐고?”
보통 프러포즈의 의미 따위를 고민하기 보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획자가 아닌가?
연아라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프러포즈의 개념 자체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것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내가 고민한 결과 나는 한가지 답을 도출했다.
무릎을 꿇고 꽃과 반지를 건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와 연아에게는 그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그려갈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유행한다는 고층 타워 전망대를 대관하거나, 유람선 이벤트 같은 것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돈이 있다. 하지만 연아에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벤트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이런 것이었다.
다소 조용한 것이 특징의 전부인 레스토랑. 여기서 그저 남들처럼······.
선물이 다소 특이하니, 그 외에는 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앞으로도 이럴거야.”
“알아.”
“내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너에 대한 집중의 끈을 놓지 않을 거야.”
“알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야.”
“알아.”
“뭘 다 안데.”
나는 무릎을 꿇고 연아의 손을 잡았다.
“이 반지, 그리 비싼 것은 아냐. 전 회사 봉급 쪼개 모은 돈으로 산거라서······.”
“알아. 다 알아.”
연아는 자리에 앉은 채로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TV에서 본 것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그녀의 눈과 입술의 곡선은 내 진심을 모두 알고, 수용하고,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크게 행복해지려고 무리하진 말자. 그냥 지금 이대로, 가끔은 지금 보다 조금만 더, 그렇게 노력해보자.”
“응. 노력할게.”
“어떤 순간에도 서로 보듬어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게 할게.”
연아는 내 손길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가녀린 그녀의 허리를 살짝 당겨 올리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고 촉촉한.
이미 셀 수 없이 많이 경험한 연아의 입술이 오늘따라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더 멋진 프러포즈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은 갖지 않을 거다.
연아라면 내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믿으니까.
-퍼벙펑펑!
“어?”
순간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빛의 향연이 스며들었다.
하늘 위에서 형형색색의 빛무리가 피고 진다.
“이런 것도 준비했어?”
“아니, 그럴 리가.”
“······뭔가 낭만적이네.”
“그러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끽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하다.
그런데······. 누군지 몰라야 하는데, 왜 이렇게 누군지 알 것 같지?
*
*
*
“과장님. 그런데 이거 돈 엄청나게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표세종은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보너스 두둑하게 받았잖아?”
“설마, 그 보너스를 여기에 모두 쏟아부으셨어요?”
“응. 원래 목돈은 이런 데 쓰라고 하는 거잖아.”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정도로는 안끝 날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역시 과장님은 크게 되실 분입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겠지.”
“영광입니다.”
홍기도의 말에 표세종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형과 형수가 기뻐할까요?”
“물론이지. 크크큭, 이것으로 우리의 하극상 계획의 일보를 내디뎠다! 표세인 조차 예상치 못한 한 수!”
“오오오! 이런 것이었군요! 대단하십니다. 역시 홍기도 과장님!”
“하하하! 각오해라, 표세인! 우리 하극상 클럽의 원대한 포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따르겠습니다!”
홍기도와 표세종은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 세례를 만끽하며 허리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 명탐정 홍켓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