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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67화 (167/346)

167.

표세인이 연아와 만나기 몇 시간 전.

‘뭐였지? 뭔가 엄청난 것을 알아낸 것 같았는데?’

표세인의 비기, ‘강제 종료’에 당해 머릿속이 깨끗하게 리셋 되어 버린 홍기도는 터덜터덜 옥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올라가십니까?”

“너도 같이 갈래?”

“예.”

마침 가던 길에 표세종을 만났다. 두사람은 그대로 옥상으로 향했다.

“컨디션 안좋으세요?”

홍기도가 평소와는 달리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표세종이 살짝 우려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뭔가 아까전에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했었는데 말이지.”

“뭐가요?”

“팀장님 애인?”

“헛!”

조연아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표세종은 다급이 두 손을 휘저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그 건은 노코멘트입니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안 물을 거라니까? 남이 알려주면 뭐가 재미있어? 수학문제도 남이 알려주면 재미 없잖아.”

“으음······. 공감하기 쉽지 않은 주제네요.”

표세종은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했다. 평소에는 티가 나지 않지만 홍기도는 의외로 명문대 출신 속성이 있는 케릭터이지 않나?

“마실래?”

“저는 율무차로 부탁드립니다.”

옥상에 비치된 커피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뽑아 표세종에게 건넨 홍기도는 자신의 커피가 담긴 종이컵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살짝 까딱거렸다.

“흐음······.”

“뭐 짚이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표세인과 조연아가 극구 자신들의 관계를 회사에서 숨기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표세종이었기에, 홍기도의 반응이 다소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의 근래 행보를 보면서 사실 다소 의아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거든.”

“의아하다고요?”

“전무군단을 접수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그 과정에서 외부 계열사를 통합해서 흡수하는 방식은 뭐랄까······. 솔직히 그거 일거리 늘리는 거거든?”

“그런겁니까?”

아직 어엿한 한사람의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표세종에게 있어 사내 정치 레벨의 이야기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회사에서 요즘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함송희의 미션과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소화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퍼즐 조각은 다 모인 느낌인데, 조립하는 방법이 안떠오른다는 느낌이네?”

“으음······.”

뭔가 홍기도가 감을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표세종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홍기도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표세종은 그것을 지켜보며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옥상으로 두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나 오늘 칼퇴야. 너도 요즘 깨비몬 출시해서 안 바쁘잖아? 한잔하자니까?”

“그건 상관없는데, 별일이네요. 언니 요즘 조연아 실장님 밑에서 칼퇴한 적 거의 없지 않나요?”

“맞아. 본인부터가 일 귀신인데, 묘하게 사람 쥐어짜는 스킬도 만만치 않다니까? 그래도 오늘은 웬일로 남자친구랑 데이트한다면서 허겁지겁 서두르더라고.”

김인숙과 권태인은 자연스럽게 홍기도와 표세종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 홍과장님?”

“······.”

“마침 잘됐네. 혹시 홍과장님도 오늘 프리해요?”

김인숙이 살짝 눈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웬일인지, 언제나 웃는 상인 홍기도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조연아 실장님이 오늘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신다고요?”

“네? 아, 네.”

“그래서 칼퇴를 해야 하신다고요?”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어? 설마?”

“어, 언니.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우린 저쪽으로 가요.”

권태인이 김인숙의 팔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남의 연애담만 보면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는 김인숙이 아니던가?

홍기도의 머릿속을 읽는 것은 오래전에 포기한 권태인이었지만,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얼굴이었기에 지금은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홍과장님?”

“갑작스러운 사내 파벌 접수······. 조연아 실장의 데이트······. 칼퇴······.”

“어, 어······.”

홍기도의 중얼거림을 곁에서 듣고 있던 표세종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퍼즐은 맞춰졌다. 나는 답을 알아냈다. 표세인······. 잘도 이런 핵폭탄을 숨기고 있었군. 게다가 진짜로 환상종이었다니!”

홍기도는 자신의 추리를 100% 확신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덜덜 떨었다.

소문 무성하던 표세인의 환상종 여자친구가 다름 아닌 조연아였다니!

맥베스의 프린세스이자, 여신!

“호, 홍과장님······. 형과 홍과장님 사이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거 주변에 퍼져나가면······.”

“이런걸 왜 퍼트려?”

“네?”

“이런 꿀 정보는 오직 나만 알고 있어야 가치가 생기는 법이야. 기억해둬.”

“그, 그렇군요. 좋은 가르침 메모, 메모!”

“가만, 그러고보니······.”

오늘 표세인은 단순한 데이트가 아니라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세종아.”

“네?”

“니네 형······.”

“네.”

“오늘 프러포즈하는 날인가 보다.”

“헉! 진짜요?”

그걸 어떻게? 라는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래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표세종은 홍기의 신묘하다 못해,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 같은 촉이 발동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만해도 따져보면 별것 아닌 요소들을 조합해서 표세인과 조연아의 관계를 추리하지 않았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왜요?”

“팀장님 성격과 조연아 실장님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가급적 돈과는 관계 없는 방식으로 설계했을 가능성이 높지.”

“어······. 그렇겠죠?”

조연아가 돈이 많은 것이야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에 남는 이벤트라는 것는 중요하지!”

“그, 그런 겁니까? 형 말로는 형수님은 번잡하고 남들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던데?”

“그것과 이건 다르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내 말을 100% 신뢰해도 돼! 왜냐하면 나는 누나가 4명이나 있는 집의 막둥이니까!”

“오오!”

남자 형제 둘 뿐인 표세종에게는 마치 전문가 자격증처럼 여겨지는 말이었다.

실제로 홍기도가 여성들과 잘 지내거나 촉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나이 차가 큰 누나들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생존술 중의 하나였다.

일반적인 남성들이 여성의 심경 변화에 둔감한 것과는 달리, 홍기도는 그런 것들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미 그를 제외한 누나들은 모두 기혼.

매형들 중에서 누가 얼마나 인상적인 프러포즈를 해냈느냐를 두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흠······. 뭐가 좋을까, 당장 그 둘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작은 추억이 될만한 인상적인 기억을 연출하는 방법······.”

홍기도는 다 마신 종이컵을 재활용 수거함에 3점 슛이라도 쏘듯이 휙 던지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종이컵은 멋들어지게 골인했다.

“너 표세인 팀장님 오늘 어디에서 데이트하는 줄 알아?”

“네. 알아요.”

평소 표세인이 자신의 데이트 코스까지 일일이 떠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프러포즈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퇴근후에 심각한 얼굴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주변에 의견을 구했었기에, 이건에 한해서는 표세종도 알고 있었다.

“분명 여의도 고층 빌딩에 있는 가든식 레스토랑이라고······.”

“여의도! 그래! 이거다!”

“?”

홍기도는 잽싸게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어, 매형 나. 어어, 아니 그런거 아니고 형네 회사에서 여의도 불꽃축제 진행하는 것 맞지. 전에 그랬잖아. 시험용으로 테스트 불꽃 쏠때도 있다면서?”

홍기도는 한참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돈은 내가 낸다니까? 그냥 몇발 정도······. 아버지 돈 아니야! 나 이번에 상여금 많이 받았어! 아니, 내 돈 내가 쓴다는데도, 왜 그래? 자꾸 이런 식이면, 매형 지난번 골프채랑 회원권 누나에게······. 오케이. 내가 항상 사랑하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교섭이 마무리된 순간 홍기도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와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

*

*

그리고 지금, 모든 작전을 훌륭하게 성공시킨 두 사람은 인근 고깃집에 도착해 있었다.

“하하하, 흡족하다! 팀장님과 형수님이 흐뭇하게 불꽃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훤하구나!”

해당 건물의 각도까지 계산해서 터트린 불꽃이었다.

게다가 미리 레스토랑에 연락을 취해, 지인의 프러포즈 지원사격이라는 것을 알리고 표세인이 조연아와 키스를 나눈 시점에 정확히 폭죽을 쏘아올렸다.

이미 종업원에게는 확인 전화까지 받은 상황, 홍기도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어깨춤을 추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뭘?”

“아니, 솔직히 너무 큰 돈이고······. 동생인 저도 손 놓고 있었는데······.”

“너도 함께 움직였잖아.”

“으음······.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긴한데······.”

“에이, 같이 했으면 공동작전이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프러포즈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함께 움직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홍기도는 천연덕스럽게 공동작전이라고 말한다.

새삼 역시나 그릇이 큰 사람이다 하고 표세종은 생각했다.

“뭐 이것도 다 니네 형한테 배운거긴 하지만.”

“형에게요?”

“그래. 내가 원래 막내에다가······. 샘도 많은 성격이라 남들과 뭘 나누는 것을 잘 못 하거든? 그런데 표세인 팀장님과 함께 있다 보니······. 솔직히 처음에는 뭘 굳이 이렇게까지 나눠주시나 생각할 때도 있었지.”

“형이 원래 좀 나눠 먹는 성격이긴 하죠. 반대로 혼자 먹다 걸리면 눈총 주기도 하고요.”

표세종 역시 표세인의 성격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막내 속성이랄까?

혼자 몰래 먹다가 표세인에게 걸려서 눈총을 사거나 훈계를 들은 것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

“그런데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좀 과하다는 느낌이네요.”

“뭐가 과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돈은······.”

설령 예전에 표세인이 얼마나 홍기도를 챙겨주었다고 하더라도 1억에 가까운 수천만원의 돈을 들여, 프러포즈를 지원하는 것은 이미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일이다.

“돈······. 그래. 뭐 중요하지.”

“엄청 중요하죠.”

홍기도의 말에 표세종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전까지도 부모님의 채무를 돕기 위해 표세인까지 월급 대부분을 쏟아부으며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 자신은 운동을 한다고 식비만 축내고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독한 마음으로 가족들 몰래 프로그래밍 공부에 매진했었지 않나?

“우리 아버지 돈 많거든?”

“아, 그래요?”

“근데 인생 별로 행복하지 않아. 예전에 우리나라 경제상황 롤러코스터 타던 시절에 배신도 많이 당하셨고······. 뭐 이래저래······.”

한국 사람치고 급변하는 경제상황에 쓰린 기억 한 번 없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어쨌건 그때 곁에서 지켜보면서 하나를 배웠지.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라고나 할까? 그리고 사실 표세인 팀장님 곁에 있다보면, 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고.”

홍기도는 표세종이 구운 고기를 냠하고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어떻습니까? 저도 제법······.”

“확실히 나쁘진 않은데······.”

“······역시 아직 안 되는군요.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전 회사에서 이리저리 회식에 불려 다니며 스킬을 갈고 닦은 표세인의 솜씨에 비하겠나?

이런 것 만큼은 쉽사리 연륜을 당해내기 어려운 법이다.

“육화도(肉火道)의 길은 한달음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지.”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한다.”

“넵!”

두 사람은 그렇게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냠냠 고기를 해치웠다.

“그럼······. 다음번에는 무슨 작전을 펼쳐야 할까?”

“다음 작전이요?”

지금 바로 프러포즈 지원 작전을 끝낸 상황이 아닌가?

난데없이 무슨 다음 작전이란 말인가?

“쯧쯧, 그래서 어떻게 하극상을 성공하겠어?”

“아! 그, 그렇군요.”

“명심해! 최종보스에게 항복 선언을 듣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띠링!

[표세인이 최종보스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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