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생각보다 젊은 분들도 많네.’
나와 연아 정도는 아니더라도 40대 언저리에 있는 이들도 몇 명 보였다.
대기업 오너들의 오찬회라고 하기에 으레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의 식사자리를 연상했었는데, MC소프트의 설동은 대표를 시작으로 오너 이하 전문 경영인들이 몇몇 있는 탓인지 의외로 젊은 면면들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회장을 필두로 맥슨의 백용현 회장과 겜포스의 유지현 대표를 제외하면 대부분 40대 후반이거나 50대 초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모임이라는 느낌이었다.
‘긴장돼?’
내가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반면, 연아는 좀처럼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단정한 자세로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허점하나라도 내비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마치 체육대회 때, 원피스라는 절대 배리어를 시전한 남궁원처럼,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마! 다가오지마!
라는 기세가 은연중에 풀풀 풍기는 느낌이다.
‘인맥관리 필요하지 않아?’
‘그런 건 자리 잡고 나서 해도 괜찮아. 첫인상부터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아.’
‘너무 방어적인 것 아냐?’
‘오빠도 곧 알게 될걸? 이곳은 마굴이야.’
아! 그러고 보니 연아는 얼마 전까지 조회장의 수행비서였다. 아마도 조회장과 동행하여 이곳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자자, 다들 집중해라. 미운 놈 온다.”
미운 놈?
조회장의 괴상망측한 호칭과 함께 느린 걸음으로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노년의 남자.
조회장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흰머리가 없는 편인 반면, 상대는 얼굴에 비해 과하게 흰머리가 많은 타입이었다.
“늦었구만, 요즘 잘나간다고 벌써 윗사람 흉내내나?”
“늦긴, 다 늙어서 낮잠 없어진 자네와 비교하지 말지? 그 보기 싫은 파뿌리는 염색 좀 하던가.”
서로 입가는 이죽거리면서도 눈에는 묘하게 견제의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이 머리 희끗한 노인이 바로 국내 최대 게임회사의 창업자인 멕슨의 회장 백용현.
과거 아케이드 게임의 절대 강자로 출발해 이후에는 자체 개발보다는 인수와 퍼블리싱에 초점을 맞춰, 막대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개발 보다는 사업가로서의 능력이 두드러지는 업계의 거물.
“그쪽이 딸인가?”
백회장이 힐끔 조회장 어깨 너머로 연아를 바라보았다.
“예. 조연아입니다.”
“우리 초면은 아니지?”
“예.”
“쯧,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음흉한 것 아니야? 자기 딸을 비서라고 속이고서는······.”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구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우 같은 잔꾀나 부리는 주제에······.”
“그러는 너는! 음흉한 너구리 같은 노인네가!”
와!
국내 게임 업계 정상급 인사들의 디스전이라고 하기에는 그 수준이······.
여러모로 장난이 아닌데?
나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려 애를 썼다.
“그런데, 이 멀대는 또 누구야? 양실장은?”
“멀대라니? 우리 회사 에이스에게 입 함부로 놀리면 가만 안 둬. 이 친구가 깨비몬 메인 디렉터야!”
“오호······. 깨비몬을 이 친구가······.”
순간 백회장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설대표도 그렇고 백회장도 그렇고······.
좋은 인재다 싶으면 단숨에 눈빛이 바뀌는 것은 이 업계 정상급 인사들의 패시브 스킬 같은 것일까?
“처음 뵙겠습니다. 표세인입니다.”
“직급은?”
“팀장입니다.”
“이사 달아 줄테니, 이쪽으로 넘어오지? 옵션도 두둑히 챙겨주지.”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조회장 앞에서 대뜸 이런 소리를 꺼내다니······.
하지만 이사 직급과 옵션이라······.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맥베스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보통이라면 회장 앞에서 으레 내뱉는 아부성 발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내 경우는 정말 말 그대로 뼈를 묻지 않으면 가정 파탄이므로 진신 100%다.
게다가 이사에 옵션이라······.
이미 0자를 세기가 귀찮아서 들여다보지 않을 정도의 기세로 쌓여가는 깨비몬의 수익이 있다.
스스로 이런 건방진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이제 돈에 혹할 수준은 한참 지나버렸다.
게다가 백회장과 조회장의 분위기를 보니, 이건 그냥 장난에 가까운 멘트인 것 같다.
“어쭈? 단박에 거절해? 길 잘 들었네?”
“직원이 애완동물이냐? 길을 들이긴······. 하여튼 그 나이 먹고도 철이 안 들지.”
“흠······. 지금 문제가 나 철들었는지, 안 들었는지가 중요해? 이 친구 제대로 키우려는 것 아니야? 나 제대로 들어간다?”
“뭐, 할 수 있으면 열심히 해보라고······.”
“어? 내가 채가도 상관없어?”
“자식들 유산 깡그리 털어서 한번 유혹해 보시던지?”
“뭐?”
조회장의 말을 이해 못 한, 백회장이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나와 연아도 조회장의 뒤를 따라 오찬회 테이블에 착석했다.
“자, 그럼 다들 오신 것 같은데 시작해 볼까요?”
단정한 인상의 여성이 오찬의 시작을 알렸다.
‘저분이 겜포스의 유지현 대표님이셔.’
‘저기는 공동대표 체제라고 했었지?’
‘응. 국내 게임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CEO지.’
사실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드물지 않나?
회사 규모와 나이와는 관계없이 모두가 그녀의 리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유대표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정부측에서 P2E(Play to Earn)를 허가할 생각은 없다고 하던데, 이 부분에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 트럭시위 괜찮습니까?”
“그쪽은 커피 트럭을 받았다고······.”
“이번에 e스포츠가 대한 체육협회에 준가입 승인을 받았다던데······.”
아무래도 업무 미팅이 아닌 단순한 오찬회이기 때문일까, 유대표가 시작을 알리자, 저마다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바꾸지.”
“예, 예.”
백회장은 조회장 옆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왜 애꿎은 사람 다른 자리로 보내는 거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리고 다들 네 옆에 앉는 것 싫어해.”
“네 옆을 싫어하는 거겠지.”
모두가 두 거물의 대화를 은연중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각자 자신들의 대화를 하는 틈틈이 조회장과 백회장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엠씨소프트의 설대표는 상당한 지분을 쥐고는 있지만,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에 가깝다고 알고 있다.
결국 멕슨과 맥베스라는 양대 산맥의 실질적 소유주인 백회장과 조회장이야 말로 이 자리의 진짜 거물들인 것.
“조금 전에 분위기가 묘하던데······. 깨비몬 씩이나 되는 게임을 개발한 인재를 고작 팀장으로 묶어두는 것은······. 너무 방심하는 것 아니야?”
백회장의 말에 조회장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회장은 나에게 차기 회장직까지 제의했었더랬다.
하지만 그것을 걷어찬 것은 바로 나다. 그러니 내가 팀장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 본인의 의사다.
또한, 영입 제의에 관한 것이라면 조회장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이제는 기둥 소프트라는 알짜 개발사의 대표라는 직함까지 가지고 있다.
맥슨의 백회장의 배포가 얼마나 클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기둥소프트 대표인 나를 포섭할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진짜 마음 먹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자금출혈을 감수하면서 기둥소프트 자체를 인수해야겠지만······.
문제는 기둥소프트는 따지고 보면 지금 유령회사에 가깝다는 것.
나라는 구심점이 없으면 이제 막 어영부영 실장 삼인방의 개발사들을 흡수해서 구색을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개발 기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맥베스에 있고, 설령 기둥 소프트가 팔려도 내가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기둥 소프트는 비상장 회사라서 누구도 넘볼 수 없기는 하지만······.
“아주 철썩 같이 믿는 모습을 보니······. 수상한데? 왜 딸이라도 내 줬나?”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백회장의 입에서 놀랄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딱히 추측이나 어림짐작도 아닌, 그저 생각없이 툭 내던진 말이었지만······.
조회장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너는 그거 못버리면 언젠가 크게 다칠거다.”
“뭘 버려?”
“구시대적 재벌들 흉내는 그만 포기해. 너나 나나, 코드 좀 만지다가 운 좋게 시대의 흐름에 편승에서 돈 좀 만지게 된 졸부에 지나지 않아. 시대가 어느 시댄데, 자식들을 교섭 재료로 생각하냐?”
“너희 집은 몰라도 우리 집 자식놈들은 다들 만족한다.”
“게임 개발사는 그저 게임만 잘 만들면 된다. 어줍잖은 재벌놀이에 열 올리다가 언제고 크게 한방 먹을 날이 있을 거다.”
“이번에 성적 좀 냈다고 제법 날카로운 훈계까지 시작하시는 군?”
백회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조회장도 상대를 도발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성격이긴 한데, 백회장도 그런 점은 판박이인 모양.
“슬슬 중국자본들 몰려오고 있다. 중국의 공룡기업들이 야금야금 국내 개발사 주식들 주워 삼키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야.”
“그래, 그것 방어하자고 지난번에 지분 공유까지 해가면서 용을 쓰지 않았냐. 그것 때문에 정치권에 돈을 얼마나 쏟아부었어. 네 녀석 제안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긴! 전통있는 대기업들은 가만두고 왜 허구헌날 게임업계만 들볶는 다고 생각하냐? 이게 다 기름칠이야. 이런 것 우습게 생각하면 너 큰 코 다친다.”
“······.”
“예전 중국 진출 때도 함전무가 아니었으면······. 네 꼬장꼬장한 성격에, 중국 땅에 발도 못 붙였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게임만 잘 만든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백회장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자, 주위의 이목이 아예 이곳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더 이상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없었다.
“우리가 어떤 핑계로든 주머니 채워주니까, 곧 셧다운제도 재검토하겠다고 하잖냐. 세상이 원래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
“아닌 말로, 우리가 돈이 없어? 시총이 우리 절반도 안 되는 기업 회장들도 우리 보다 훨씬 더 대우받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입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그거 모르는 것 아니잖아?”
“쯧. 나는 그런 것 마음에 안 들어.”
백회장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조회장은 짧게 혀를 찼다.
“어떤가 그쪽의 젊은 친구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나?”
“예.”
“아니요.”
연아와 나는 동시에 서로 다른 대답을 뱉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그렇게 답할 것을 예상했기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백회장과 조회장이었다.
“회사를 경영함에 있서, 정치를 비롯한 모든 제반 사항들을 예의주시하고 적절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선악이든, 개인의 사상이든, 끼어들 요소는 없지요. 그렇기에 아버지도 지난번 일에 한 손 거드신 것으로 알고 있고요.”
연아는 조근조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흐음······. 그래도 우리 맥베스 차기 회장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신 것 같네. 경영자로서의 마인드는 갖춰진 모양이야. 한데, 표세인 팀장? 자네는 어째서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
백회장의 질문에 조회장 조차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눈빛이 마음에 안 드네······’
나를 향한 백회장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훈계하기 직전, 어른들이 아이를 내려보는 듯한 눈빛이랄까?
물론 내가 백회장에게 연륜으로나 입지로나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아 앞에서 나를 깔아봐도 좋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배알이 꼴린다.
조회장을 깔아뭉개는 발언부터······. 나를 향한 눈빛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그렇다면 나도······.
띠링!
[마왕 후계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칠죄종의 일각인 ‘오만’이 발동합니다.]
“만드는 물건에 자신이 있다면······”
“허!”
저 탄성은 조금 떨어져있던 설대표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설마 천하의 백회장 앞에서 내가 지난번 자신 앞에서 했던 것과 같이 정론을 운운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있다면 굳이 주변 눈치 볼 필요 없지요.”
“지금 그거······. 나에게 한 소리 맞나? 우리 맥슨의 게임에 자신이 없어서 내가 이런다고 말하는 거야?”
“맥슨. 큰 회사죠. 하지만 좋은 회사입니까?”
“뭐, 뭐라고?”
천하의 맥슨 회장이 어디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겠나?
하지만······.
오랫동안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가슴에 품고 있던 이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없다.
“맥머니라는 단어 들어 보셨죠?”
“지, 지금 그걸 감히 내 앞에서······.”
백회장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돈만 밝히는 맥슨의 행보에 유저들이 붙여준 꼴사나운 별명.
“하교 길의 아이들이 PC방에 들러 삼삼오오 맥슨의 게임을 플레이했기에 지금의 맥슨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용료를 최고 5배까지 인상하고는, 사설 경호원과 3개의 전경 중대까지 이용해서 평화시위를 하던 PC방 업주들의 머리통까지 깨부수는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이,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앞이라고······.”
“따지고보면 스스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을 자초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이 자식이!”
흥분한 백회장이 내 멱살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나는 슬쩍 몸을 젖혀 그 손길을 피했다.
“회장님!”
헛손질의 여파로 백회장이 휘청하자, 지켜보던 경호원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백회장을 부축할 뿐, 그 이상의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치고 돈 없는 인물이 어디있나? 감히 경호원들 따위가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경호원 레벨이라면, 정말로 어디 하나 부러트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제압이 쉽지 않을 테니까.
“저는 고작 팀장 나부랭이라서, 다른 것은 모르겠고, 좋은 게임. 좋은 회사를 만들면, 자잘한 것들은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일 것은 고객들이지,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끌끌끌.”
침묵을 끝낸 것은 조회장의 낮은 웃음소리였다.
“다들 들었지? 이 친구가 앞으로 우리 회사를 떠받칠 기둥이다. 꼬우면, 한번 흔들어 보든지.”
조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용현이.”
“뭐?”
“어차피 일 벌어진 것, 한판 붙자. 우리 예전에는 자주 붙었잖아.”
“!”
와, 판 벌어지니, 바로 스트레이트로 선전포고 날려버리시는구나!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나를 두둔해주시려는 것일까?
뭐든 좋다!
우리 회장님 최고!
만약 허튼 수작이라도 들어오면 제가 철저하게 부숴버리겠습니다!
단결!
< 그렇게 오래전의 일 따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