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백회장에게 싸움을 걸고 왔다고?”
“무시당하면 곤란하다고 말씀드린 것은 사실입니다만······.”
문이사와 양실장은 조찬회에서 나와 백회장 사이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하하! 역시 표세인 팀장이야! 끝내주는구만! 천하의 백회장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서 표세인 팀장 뿐일 거야.”
문이사는 처음에는 잠시 당황한 것처럼 눈을 껌뻑이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반면 양실장은 묵묵히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새였다.
“백회장은 다혈질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성격에 맥베스의 성장세에 더해, 표세인 팀장님과의 불화가 더해졌으니······. 단순히 판호 프로젝트에 찬물을 끼얹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군요.”
“저도 그럴 거라고 예상합니다.”
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양실장 역시 피식 웃었다.
“역시 생각이 있으셨군요.”
“사실 가능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었습니다만······.”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이번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개전투를 치루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각개전투?”
문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양실장님은 원래 예상하던 문제······. 즉 판호 프로젝트의 출시에 맞춰, 그들의 공격적 마케팅이나 이벤트에 대한 준비 동향을 주시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하지 않았나? 적들의 노림수야 뻔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떤 규모로 시작될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양실장뿐일 것이다.
“문이사님은 원래 하시던 대로 삼인방에 대한 고삐를 더욱 단단히 조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백회장은 그쪽을 포섭하려 들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맥베스 최고의 개발진이라 할 수 있는 실장 삼인방에게 손을 뻗는 것은 가장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한 수가 될 것이다.
“그거야, 당연하지. 나 문상훈이만 믿으라고.”
좋다. 믿음직하다.
기질의 문제인지, 상황의 적절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장 삼인방은 현재 서로 경쟁체제에 돌입한 상황.
그 심사역이라 할 수 있는 문이사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상황이다. 문이사가 예의주시한다면, 적어도 손 놓고 당하는 일은 없겠지.
“그럼 두분만 믿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곧 중국에 가실 텐데······. 대비책을 실행할 여유가 있으십니까?”
“폭탄 하나 심는 거라서 시간 자체는 그리 걸리지 않을 겁니다.”
“폭탄이요?”
“예. 다만 효과는 확실한데, 타이머가 좀 말썽이라서 어찌 되런지는 모르겠네요.”
“어쩐지 조금 불길한 기분이 드는데요.”
“하하하, 우리쪽에 손해날일은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표세인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그럼 지금 말씀드린 것들 좀 부탁 드립니다. 저는 이 일을 처리하면 곧바로 중국에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요.”
“그렇죠. 모쪼록 회장님 수행 잘 부탁 드립니다.”
“예. 맡겨두십시오.”
나는 그렇게 양실장과 문이사에게 대비를 부탁하고 방을 나섰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
*
*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개의 변을 어떻게 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뭐든 쓰기 나름이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심 이런 상황을 기다려왔다.
조연준.
조씨 집안의 해결되지 않는 골칫거리.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본의 아니게 계속 펀치를 날렸고, 하비를 포섭하는 것으로 완전히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내게 양실장 같은 정보를 다루는 재주는 없지만, 우연하게도 내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 조연준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 내가 양실장에게 이 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조연준 때문이 아니라, 나의 ‘지인’ 때문이다.
나는 홀로 옥상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나다.”
-예. 형님. 요즘 자주 통화하게 되는 군요.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전화한 것이 반가운 모양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 얼굴은 굳어진다.
대학 시절 내 후배이자, 군대 후임이기도 한 녀석.
운동에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군대 전역 후에 다소 좋지 않은 길로 빠져버렸다.
단적으로 말해, 조폭이라 불리는 법치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범법자다.
나는 오래전, 이 녀석을 개도해 보려고 여러차례 노력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렇게 우리는 수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얼마 전 이 녀석이 용케 내 번호를 알아내고는 연락을 취했다.
‘형님. 저 종수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뭐야? 너였냐? 용건만 간단히 해라. 아니지, 우리 사이에 용건 따위 있을 턱이 없으니, 끊는다.’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말씀하실 것까지는 없잖습니까.’
‘내가 예전에 건달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잊었냐? 그걸 기억하면, 지금 너에게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알 텐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예전 일로 큰 형님 설득하느라 쉽지 않았습니다.’
‘설득하지마. 내가 지난번에 분명히 경고했지? 니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사무실 간판 내리게 해준다고.’
‘사무실 간판이라 봤자······. 중고차 거래 사무소입니다만?’
‘말장난하려고 전화했냐? 끊는다?’
‘죄송합니다. 예전처럼 형님과 농담 따먹기 하던 시절이 그리워서요.’
‘용건만 말해.’
‘······제가 요즘 워커힐 카지노에서 알까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박한다고? 잘 어울리네. 그런데 카지노에 알까기도 있냐?’
‘······아니요. 죄송합니다. 대부업을 말하는 겁니다. 단기 고리 많은 고객에게 저희 쪽으로 대출을 전환하는 상품을 알까기라고······.’
‘나한테 지금 뭘 설명하려는 거냐?’
‘죄송합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 카지노에 있는데······.’
‘그래서 뭐? 놀러 오라고? 너 미쳤냐? 우리가 그런 사이야? 그리고 부를 곳이 없어서 카지노로 나를 불러? 게다가 거기 자국민 출입 안 되는 곳 아니야?’
‘······그런 거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 고객 한 명이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면서 돈을 물 쓰듯이 쏟아붓고는 있는데······.’
‘?’
‘계속 형님 이름을 언급합니다.’
‘!’
‘조연준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가급적 염종수와 접점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연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는 그에게 조연준이 카지노에서 머무는 동안 예의 주시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조연준. 아직 거기에 있지?”
-예. 오늘도 수억 날려 먹었습니다. 그냥 돈을 내던지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형님 부탁으로 저 친구 대출은 제 쪽으로 돌려놓기는 했는데······. 이러다간 파산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예의주시하라는 말을 오해한 모양이다.
“돈 꿔줬으면 받아. 조연준······. 그 녀석 돈 많아.”
-정말입니까? 그거 기쁘군요. 올해 목표액 한방에 달성하고도 남겠는데요?
하루 만에 수억씩 날려 먹는 도박꾼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는 녀석이, 올해 목표액 운운하는 것을 봐서는 조연준이 아주 돈을 제대로 날려 먹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지금 간다.”
-여길 오신다고요?
“그래.”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형님을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정말 꼭 한 번······.
나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연아에게 전화했다.
“나야. 지금 바빠?”
업무시간 중에는 가급적 전화보다는 DM을 먼저 보내는 편인데,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직접 말로 전하고 싶었다.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조연준 좀 만나러가려고.”
연아는 내가 조연준과 에머리와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조연준도 그냥 조연준, 에머리도 그냥 에머리라고 부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은 국적 조차 미국인이라서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울 것이다.
제임스부터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았나?
어쨌든 지난번에야 조연준이 맥베스에 직접 시비를 걸었기에 다소 예외적인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나와 조연준의 만남은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번 백회장님과 있었던 일 때문이구나?
역시 연아다.
곧장 내 의도를 파악한다.
“응. 맞아.”
-알겠어. 그렇게 해.
“미안, 기분 별로지?”
-그렇긴 한데······. 말했듯이 회사를 위한 선택이잖아. 나 지난번 백회장님 질문에 딱히 비위 맞춘 것 아니야.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그럴 거고.
“오케이. 알겠어. 다녀올게. 그런데 조연준, 돈 많이 잃었나 보더라.”
-아주 팍 잃어서 길거리에 나앉았으면 좋겠네.
조연준이 상대라면 연아는 정말로 자비가 없다.
“알겠어. 일단 갈게.”
-응. 잘하고와.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나는 통화를 종료하고 곧장 택시를 잡았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워커힐 호텔로 가주세요.”
예전에는 어지간해서는 무조건 대중교통러였는데, 이제는 본능적으로 택시만 보면 손을 뻗는다.
아아, 나도 타락해가고 있구나.
하지만 시간 대비 생산성을 고려하자면, 이제는 이게 맞는 거다.
내가 돈 몇푼 아끼겠다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우습지.
내 어깨에 얼마나 많은 기대가 걸려 있던가?
나는 그렇게 워커힐 호텔로 향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텔 정문 앞에서 정장 차림의 건장한 남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돈 벌이 좀 되는 가보다?”
내가 패션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문이사와 정장을 맞춘 이후로 나름 브랜드를 분간하는 안목은 생겼다.
겉모습만 봐서는 단정한 비즈니스맨으로 착각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과하게 발달된 승모근과 체격 덕분에 한 눈에도 일반인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예. 요즘 괜찮은 편입니다. 한류다 뭐다 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었으니까요. 나름 특수입니다.”
“그래, 니들이 돈을 잘 번다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슴이 아프구나. 오늘도 땀 흘려 이 나라 경제에 이바지하는 모든 선량한 국민들을 위해, 모쪼록 너희의 사업이 번창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이 미친 새끼가······. 억!”
짝!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내 조롱 섞인 도발에 반응한 떡대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직 교육이 덜 끝난 녀석들이라서······.”
“뺨은 저 친구에게 날려 놓고, 왜 사과를 내게 하냐? 건달 티 내지 마라. 호텔 정문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우스운 것은 이런 소요가 발생했는데도 호텔 직원 누구 하나도 이곳에 신경을 쓰는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연준이 있는 곳만 안내해. 그리고 헤어지자, 우리가 얼굴 봐서 좋은 사이도 아닌데······.”
“조연준은 현재 카지노 내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내국인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지요.”
“흐음······.”
그럼 좀 기다려야 할까?
“그럼 조연준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닙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뭐? 내국인 못 들어간다면서?”
“직원은 출입 가능합니다. 저와 함께하시면 문제없습니다.”
“그렇구나, 너와 함께라면 문제없다, 이거지?”
“예.”
염종수는 내 말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과거의 일로 마음에 빚이 있는 덕분에 별 것 아닌 일 하나라도 베풀어 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카지노 출구 앞에 대기할 만한 곳이 있나?”
“연결된 바가 있긴 합니다만······.”
“그럼 나는 거기서 기다리지.”
“형님, 그러실 필요 없이 제가······.”
“괜찮습니다. 건달씨. 제가 겁이 많은 성격이라 작은 호의조차도 좀 버겁네요.”
이것은 딱히 비꼬는 것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럼 바까지라도 모시겠습니다.”
모신다는 한 마디도 거슬린다.
예전에는 참 가까운 관계였는데······. 이제는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거슬리고 부담이 되는 상대가 되어버렸다.
“누님은 잘 계시고?”
“예. 형님 덕분에······.”
“그래. 알겠다.”
나는 염종수의 뒤를 쫓아 호텔에 들어섰다.
< 너도 교통 정리 당하고 싶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