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72화 (172/346)

172.

내가 백회장을 도발한 것은 어디까지나 백회장이 먼저 조회장을 무시하거나, 내 심기를 거스르는 멘트를 날렸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는 이미 저들이 판호 프로젝트를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장이란 끝없는 적자생존을 강요하는 무법지대다. 이것의 명암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경쟁이다.

애석하게도 경쟁이라는 것은 사이좋게 갈라먹을 수 있는 쌍쌍바 같은 제품이 아니다.

가전제품 업계만 봐도 그렇다.

옆 매장에 신상품이 출시되면 바겐세일을 터트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고객 풀은 정해져 있고 고객들의 선택은 언제나 몰아주기 식이다.

‘사실은 거짓말이었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야 한다는 백회장의 말에는 사실 동의 한다.

물론 좋은 게임의 개발이 무조건 최우선 사안이며, 현재 국내 대형 개발사들 대부분이 그 점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 마음을 품은 것은 오래되었다.

하지만 개발자 역시 비즈니스맨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한다.

중요한 것은 개발과 판매는 동등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세일즈와 이윤창출의 중요성을 결코 얕잡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세일즈에 있어, 경쟁자들의 플랜을 공략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는 마침 적진에 투하할 거대한 폭탄(?)의 소재를 쥐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잔 부탁드립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바였지만, 다행히 커피가 있어서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연아는 커피를 좋아한다.

덕분에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세계 각지의 원두들을 섭렵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라는 놈이 워낙 센서티브한 인간이 아닌 탓에 산미가 다르거나, 바디감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왜 더 좋고 나쁜지를 구별못하는 커알못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 혼자 커피를 주문할 일이 있다면 언제나 아메리카노다.

“내 앞으로 달아둬.”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나는 슬쩍 커피값을 대신 지불하려는 염종수를 무시하고 카드를 꺼냈다.

종업원은 잠시 난처해했지만, 보다못한 염종수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내 카드를 받아들었다.

“커피 정도라도 사게 해주시죠.”

“아니, 껌 하나도 곤란해.”

아닌게 아니라, 나도 이제는 어엿한 회사의 대표다.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조폭과 유착이라던가 하는 루머라도 따라 붙으면 어쩌나?

물론 비상장 회사에 주가가 춤출일이야 없겠지만.

“누님은 지금도 가끔 형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언제 한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너 빼고 보는 거면 나야 언제든지, 오케이지. 그리고 누님께는 내가 대접해야지.”

“형님······.”

사람 마음 약해지게 울상 짓기는······. 하지만 이미 나는 몇 년전 이 녀석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분명히 선언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굳이 쫄쫄이 입고 빌딩 사이를 누비는 거미 인간만 책임 소재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소시민 역시도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한때, 촉망받던 금메달리스트 유망주라는 타이틀도 잃어버리지 않았나?

솔직히 예전에는 그때의 일을 자주 후회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협회장님께 석고대죄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억울하게 선수 생활을 접게 된 후배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이 편하면 마음이 복잡한 법.

나는 머리를 비울 겸 특전사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이던 녀석 역시 나를 쫓아 특전사에 지원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이렇게 불편하게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염종수.

나에게는 애증으로 가득한 이름이다.

“솔직히 너 보면 지금도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을 찾을 수는 없지요. 그저 죄송하다는 마음 뿐입니다.”

“허튼소리 말고 가서 일 봐라, 저기 입구 보이네. 나 혼자서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조연준이 전화를 받지 않는 탓에 부득이 하게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

하지만 그 와중에 염종수가 곁에 붙어 있으니, 몹시 심기가 불편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형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너는 왜 내가 널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왜 그렇게 뻔뻔하지?”

이미 배는 떠났다.

게다가 녀석은 아직도 그때의 그 더러운 항구에 머물러 있다.

그런 주제에 용서? 같잖은 헛소리다.

“제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장회장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 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냐? 아주 귀에 못 박히게 들었어. 너희 어릴 때부터 후원해주고, 누나 병원비도 대줬다고. 그런데? 은혜를 갚는 방식이 고작 그거냐? 오래오래 깡패짓 해먹도록 보필하는 거?”

“······.”

내 말에 염종수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안다.

부모없이 자라, 의지할 곳 없던 남매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지를······.

안타깝게도 엘리트 체육에는 돈이 많이 들고, 그만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운동을 접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때마침 염종수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이었전, 장회장이라는 조폭 두목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자신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녀석도 그 손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병을 앓고 있던 누이의 병원비까지 책임져 준다는 말에 염종수는 결국 장회장의 후원을 받아들였다.

염종수는 나보다 한 체급 아래 미들급 유망주로 헤비급인 나에 비해, 메달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평가받았을 정도의 기대주였다.

하지만 협회장 손자놈이 그를 후원하는 조폭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며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따르는 녀석들까지 이용해 염종수를 구타하기 시작. 결국 염종수의 누님까지 들먹이며 괴롭힘의 수위를 넘어서려고 할 때, 결국 염종수는 폭발했다.

이후, 문제는 조용히 덮는 조건으로 염종수는 상비군 자격을 박탈당했다.

나도 여기에 분노해서 철없는 실수를 해버렸다.

내 기분도 모르는 상태로 깝죽거리던 협회장 손자놈이 대련을 신청해왔고······.

나는 녀석의 다리를 부러트려 버렸다. 그리고 나도 결국 아웃.

솔직히, 이것은 사고였다. 녀석의 디딤축이 무너진 순간에 전력으로 돌려차기를 녀석의 무릎에······.

아니, 인정해야지. 화나서 좀 다치라고 한 것 맞다. 그렇게까지 다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상비군 세 명이 나란히 아웃된 이때의 사건은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태권도 협회의 선수관리 문제와 협회장 손자의 갑질 논란 증언이 이따르며 잠시 소란이 벌어졌지만······.

뭐 그래봤자, 협회장은 털끝도 다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이 녀석이 법의 눈길을 피해 음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쉬워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나는 이 녀석이 설령 조직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살갑게 맞이할 생각은 없다.

“우리 사이를 전처럼 회복시키겠다는 허튼 생각은 집어치워라. 지금 그나마 상대해주는 정도가 너희 누님을 생각해서 내가 가진 인내심 박박 긁어서 노력하는 거니까. 이 이상을 바라지 마라.”

“······.”

내가 다시금 단호히 내 뜻을 밝히자, 또한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요즘 큰 회사로 옮기시고부터 승승장구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너 내 뒷조사 하냐?”

“무슨······. 누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냐······. 건강은 좀 괜찮으시고?”

“예. 덕분에······.”

염종수는 몰라도 누님은 무사평온하시길 바란다.

그래서 더욱 이 녀석에게 화가 난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지금 때가 몇신디, 밥대신 술이여.”

와······.

명품 브랜드 로고가 샐틈 없이 빽빽하게 박힌 정장 자켓을 두른 남자였다.

물론 비싼 돈 주고 사는 명품인데······. 어느 정도 남들이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거의 뭐 광고판 수준 아닌가?

“동현이 형님. 지, 지금은······.”

“오메, 이분이 니랑 회장님이 귀가 닳도록 떠들던 그분인겨? 반갑소. 권동현이요.”

“······.”

딱봐도 염종수와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나는 대답대신 시선을 돌리며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였다.

아아, 염종수 하나로도 스트레스 지수가 폭발할 지경인데······. 계속 이런 날파리들이 자꾸 달라 붙으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내가 앵앵대는 소리 듣기 싫어서 손이라도 쓰면 어쩌겠나?

게다가 나에게 있어, 깡패들은 기본적으로 치명타 디버프가 걸린 몹(?)들이라서 대충 쳐도 여기저기 부러지기 십상이다.

“치워라. 슬슬 한계치다. 분명 니네 회장인지 뭔지하는 노인네도 나와 약속했을 텐데?”

나는 예전에 분명히 염종수가 모시는 장회장이라는 노인에게서 내 앞에 자신들 조직원이 보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답을 받았었다.

물론 다음에 다시보면 간판 내리게 해주겠다고 반쯤 협박해서 받아낸 약속이었지만······.

“아니, 얼굴 지수는 멘사급인디, 싸가지는 바닥이시네? 처음 보는 사이지만, 그래도 귀따갑게 이름 듣던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괜찮잖여?”

“형님, 일단 저와 먼저 이야기 좀······.”

“아니, 대체 뭐땜시 저분 이야기만 나오면 너나 회장님이다 싹 입에 자꾸를 잠그시는지, 오늘 나도 좀 알고 시픈디?”

충청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절반씩 섞인 묘한 억양의 남자는 그대로 빈 의자에 앉았다.

“형님······.”

염종수는

“안 그래도, 말씀 많이 들었지습니다. 제가 큰집에 있을 때, 우리 조직 교통정리 깔끔하게 해주셨다고요.”

“······.”

“능력도 없이 연공서열로다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박힌 돌들을 죄다 강제 은퇴시켜주신 덕분에 저나 이 염가 놈 같은 젊은것들이 훌쩍 위로 올라갈 수 있었지요. 다 표세인씨 덕분입니다.”

“표세인씨?”

순간 내가 인상을 와락 구기자, 상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염종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틀렸냐? 하도 특이한 이름이라 듣자마자 딱 외웠었는디?”

“아, 아니······. 맞습니다.”

“아니, 이름이 틀린 것도 아닌디, 왜 그러신대요?”

“쓰읍······.”

나는 잠시 고민했다.

조연준을 설득해서 백회장 진영에 투하하는 거대한 폭탄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사실 변수도 많고 쉽지 않은 계획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시점에 이런 가치 없는 것들에게 붙잡혀서 심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 알겠다. 잡설 나누는 것 싫어하시는구나? 오케이. 본론으로 넘어가서, 저희가 요즘 IT업계 투자 쪽도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디요. 비트코인 열풍 때, 재미도 많이 봤죠. 저희 같은 사람들이 비트코인 덕을 많이 봤다는 것 아십니까?”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장난삼아서 투자 운운하는 모양새가 기가 차다.

“저희가 이래 봬도 50억 원대 투자금을 운용합니다. 그래서 마침 이번에 중국에······.”

묘하게 50억 원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웃어?”

권동현이라고 했던가?

이 얼빠진 건달은 내가 웃으니, 금새 표정이 굳어졌다.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과장해서 전달하는 것에 길들여진 족속.

타고난 체격과 근력으로 타인들과 정상적인 교우를 나누기 보다는 그들을 굴복시키는 음흉한 재미에 젖어,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잔챙이 건달의 모습이 나는 그저 우스울 뿐이다.

“푼돈 좀 만지니까, 세상이 만만하지? 아니지, 남들과는 달리 편한 길만 쫓는 놈들이니, 당연하겠지.”

“푼돈?”

“그럼, IT업계에서 50억이 무슨 엄청난 돈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와, 허세 지리네. 아야, 너랑 회장님이 왜 표세인씨를 그렇게······.”

“내 이름 입에 담지 마라.”

“뭐?”

“부모님께서 고심해서 지은 내 이름이 너 같은 놈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달갑지 않다.”

“허······. 저기요. 뒤에 백 좀 든든해요?”

“혀, 형님! 이제 그만 가시죠.”

“비켜봐. 아니, 사람이 이 정도까지 예의를 차리면 적당히 유도리 있게 행동해야지!”

슬슬 짜증이 치솟는다. 이래서 염종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해묵은 분노와 애석함이 뒤섞여 감당하기 힘든 화학작용이 발생한다.

“하나. 넌 딱히 예의를 지키지 않았어.”

“?”

“둘. 너희 같은 녀석들은 존재 자체가 민폐야.”

“뭐야? 아니 진짜 이게 정신 나갔나!”

순간 권동현이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어깨가 움직이는 순간, 내가 먼저 테이블을 밀고, 내뻗은 녀석의 팔과 덜미를 잡아 당겼다.

쾅! 쨍강!

권동현이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뒤이어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이 발생했다.

“이, 이 새끼가······.”

권동현은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팔과 정장 덜미를 내게 잡힌 상태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래서 진짜 싸움꾼들은 싸움 전에 옷을 벗는 법이다.

상대의 옷은 싸움이 벌어지면 그 자체로 유용한 도구가 된다.

나는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권동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도 교통 정리 당하고 싶냐?”

“!”

띠링!

[마왕 전용기! ‘오만’이 발동합니다!]

이제 내가 깽값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거든?

날파리 퇴치 정도는 이제 문제가 안 돼. 알아 들었냐? 이 깡패 새끼야?

< 네가 그런 소리를 하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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