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회장님에 관한 사항 말씀이시군요.”
“네. 표팀장님이 확실히 숙지라고 오라고 했어요.”
홍기도는 양성태가 타준 보이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음, 운남산이네요?”
“바로 아시는군요.”
“그럼요. 대학 시절에 중국인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그중에 차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중국인답게 중국 차가 최고라며 엄청나게 들이댔었죠.”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나쁘진 않은데, 전 커피 파라서요.”
“그러시군요. 혹시 이것도 아시겠습니까?”
양성태는 새로운 차를 준비했다.
“관음이군요.”
관음 혹은 철관음이라 불리는 차. 청나라 시절 건륭제가 그 맛에 반해 자주 즐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고급 중국 차 중의 하나로 유명한 상품이다.
“잘 아시는군요.”
“흠······. 이건 그거네요. 회장님은 그저 바이어 입맛 잘 맞추면 만족하는 성격이니, 중국쪽 인사들 기호를 잘 파악하고 움직여라?”
“······저도 어디가서 눈치 없다는 말을 듣는 편은 아닌데, 홍과장님은 정말 이런 쪽으로는 탁월하시군요.”
“누나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면 대개 이런 스킬 하나쯤 갖게 되는 법이죠.”
홍기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요. 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 하나뿐이라서 딱히 남매간의 갈등 없이 자란 편입니다.”
“헛! 양실장님 여동생분이시라면!”
“?”
홍기도의 반응에 양성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홍기도가 자신의 여동생을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왜 그러시죠? 혹시 다연이를 아십니까?”
“양다연······. 이름부터 흥미롭군요.”
“흥미요?”
양성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양실장님 동생분이면 미인일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 나이 차가 큰 탓에 동생 보다는 반쯤 조카처럼 인식하는 편이지만······. 네. 맞습니다. 저희 다연이 예쁩니다.”
“오오오!”
양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기도는 물개박수까지 치면서 열을 올렸다.
“홍과장님 지금 교제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와, 교제라는 단어 실제로는 처음 들어보네요. 양실장님도 겉보기에는 동안이신데, 역시 나이가 있으시긴 하시군요.”
사십대 초반에 불과하고 주로 자신 보다 연배가 높은 이들과 어울리던 양성태였기에 근래 자신의 나이를 실감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홍기도가 이 점을 콕집어 언급하자, 양성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이와 아내도 항상 저에게 요즘 유행어 같은 것을 잘 모른다고 타박합니다. 사실은 젊었을 적에도 잘 몰랐지만요.”
“양실장님처럼 나이 먹을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지요.”
“하핫, 그런 칭찬은 처음이군요.”
누구나가 양성태를 보면 멋지다거나 스타일이 좋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양성태의 입지나 분위기 때문일까?
실제로 그 앞에서 그런 멘트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이 지긋한 임원급들이 으레 젊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치하성 발언 정도야 익숙했지만······.
홍기도 정도 나이대의 사람에게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처음이요? 양실장님 옷도 잘 입으시고······. 아, 그렇군요. 그거 아내분 픽이었군요.”
“정답입니다.”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홍기도였다.
“아무튼 교제하는 분도 없으신 것 같으니, 관심있으시다면 한번 자리를 만들어 볼까요?”
“지금 여동생분을 저에게 소개해주신다고요?”
“예.”
“왜죠?”
“네?”
“왜 소개해 주시냐고요?”
“어?”
평소 홍기도라면 여자를 소개해준다는 말에 넙죽 절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반응은 뭔가 묘했다.
“제가 무슨 실례라도?”
“실례라기보다는······. 원래 이런건 소개팅 자체 보다 소개팅을 얻어내는 그 고난의 여정이 또 재미인 건데······.”
“으음······.”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일까? 양성태는 홍기도를 요즘 젊은이들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어쨌든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그럼 없던 일로 하지요.”
“······.”
“이번에 왜 또?”
“줬던거 뺏는 법이 어디있나요.”
아아, 정말 쉽지 않은 캐릭터다. 지금까지 홍기도라는 캐릭터를 마냥 긍정적으로 해석하던 양성태는 처음으로 표세인을 동정하게 되었다.
설마 이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진짜로 울먹일 줄이야.
“알겠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 자리를······.”
“그렇게 막 던져주지 말라니까요!”
아, 이 새끼······.
양성태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꿀밤쾅 한 번 시전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일단 이 건은 넘어가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죠.”
“이제는 이게 본론인데······.”
“본론으로 넘어가죠.”
“넹.”
홍기도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회장님 본인은 생각보다 수행하기 까다로운 타입은 아닙니다. 입맛도 무던하시고 딱히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시죠.”
“그렇군요.”
홍기도의 반응은 이미 팍 식은 상태였다. 양성태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만큼 업무 성과에는 남들 이상으로 민감하신 편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회장님이 아닌, 상대측이겠지요.”
“상대측이라······. 여자 없죠?”
순간 양성태는 피식 웃었다.
“항상 여자, 여자 떠드시는 것 치고는 딱히 수작 따위는 부리시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홍기도에 대한 조사는 진작에 끝난 상황이었다.
홍기도는 여직원들과 자주 어울린다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다.
하물며 오히려 은근 철벽남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
그리고 이것을 양성태는 인맥관리 스킬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양성태는 그 답지 않게 계속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고 있었다.
표세인의 수는 읽을 수가 없고, 홍기도의 생각은 오판의 연속.
양성태의 의외의 약점은 다름 아닌 이 두 사람.
적이 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어쨌든 여성은 있습니다.”
“네?”
“함전무님이 보유하신 꽌시의 최중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젊은 여성입니다.”
“젊은 여성?”
“예. 그녀는 중국 공산당 간부의 딸이자, 국가광파전시총국의 부국장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외적으로는 세계 최대 게임기업인 카이두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대단하네요.”
14억의 유저풀을 등에 업고 단숨에 세계 1위의 게임 기업으로 성장한 카이두는 전설을 넘어 신화에 가까웠다.
그런데 젊은 여성이 그곳의 대주주라니···
···.
무엇보다 그녀의 부국장이라는 직함도 예사롭지 않았다. 국가광파전시총국은 판호 발급을 결정하는 게임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관이었다.
그녀가 속한 국가광파전시총국의 영향력과 카이두 대주주로서의 입지를 고려하자면, 그녀가 중국 게임업계에 지니는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쉬린칭.”
“쉬······린청?”
순간 홍기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그런 이름을 듣기라도 했다는 표정.
“쉬린칭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알기는 알죠.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그랬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북경대······.”
“1년 정도 싱가포르 대학에서 유학했습니다. 그때 만났어요.”
“호오, 이거 뜻하지 않은 행운일까요?”
꽌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에서 안면이 있는 상대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이점이다. 하지만 양성태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홍기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뭔가 표정이 밝지 않으시군요.”
“이건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네요.”
“불운?”
“저 중국 못가겠는데요?”
“네?”
“이, 이럴 때가 아니네요. 저 팀장님 좀 만나야겠습니다.”
“지금 표세인 팀장은 회장님실에 계실 텐데요?”
“이거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입니다.”
홍기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양성태는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해두겠습니다. 가시죠.”
“네!”
홍기도는 재깍 달려나갔다.
*
*
*
“그래서 출장 준비는 잘 하고 있나?”
“예. 개발 일정은 순조롭고······. 출장은 뭐 제가 딱히 준비할 일이 있나요.”
“어쭈? 회장을 수행하는데, 준비가 필요 없어?”
조회장이 살짝 농담 섞인 멘트를 날렸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요즘 조회장과 단 둘이 있을 때는 늘 이런 분위기다.
단순히 오너와 고용인이 아닌, 예비 장인과 예비 사위의 관계가 확실히 자리잡은 느낌이다.
“그런 과한 챙김 좋아하시지 않으시잖아요.”
“네가 나를 아냐?”
“이제 그 정도는 알죠.”
“흥, 나이 들면 취향도 변하는 법이야. 시늉이라도 한 번 해봐. 해봐야 알지.”
“제 식대로 모시면 맛집 탐방인데, 무더위에 상하이 탐방 좀 해보시렵니까?”
중국의 IT 기업들은 대부분 상하이나 선진과 같은 남부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인 상하이의 여름 기온은 남부 특유의 습한 기후가 더해져, 끔찍하기로 유명했다.
“내가 땡볕 맞으며 돌아다닐 일이 있나?”
“그래도 가끔 땀흘리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나는 그런 취미 없다. 그런게 싫어서 골프도 안치는데.”
“등산도 안하세요? 요즘 회장님 연배시면 등산 인기잖아요.”
“나이에 맞게 놀아야 한다는 것도 차별이야.”
하긴 취미가 TRPG와 게임인분께 골프나 등산이 무슨 매력이 있겠나.
“허튼소리는 이만하면 됐고, 일단 쉬린칭. 이 이름을 기억해라.”
“지난번 양실장에게 들었습니다. 이번 꽌시 인계에 핵심인물이라고요.”
“그래. 연아 정도 나이임에도 그 입지가 대단하지. 딸이 하나라 그 아비가 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을 것이다.”
듣기로는 판호 발급을 결정하는 기관의 요직에 있고 카이두라는 공룡기업의 대주주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이만한 입지는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꽌시라는 독특한 문화가 팽배한 중국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도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인 아버지의 꽌시를 고스란히 물려받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었으리라······.
“사실 그것 때문에 저도 비밀병기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비밀병기?”
“이번에 동행하기로 한, 저희 팀원. 홍기도 과장입니다.”
“그 친구가 왜? 그냥 통역이라면서?”
“그렇기는 한데 그 녀석이 여성 한정으로는 그 친화력이 어마어마하죠.”
내가 홍기도를 굳이 중국에 동행시킨 것에는 바로 쉬린칭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 친구가 그런 재주가 있다고?”
내 말에도 조회장의 반응은 다소 시큰둥했다.
이해한다.
아마도 홍켓몬을 실제로 보지 않는다면 녀석의 강제친화(여성 한정) 스킬의 가공할만한 위력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곁에서 지켜보며 번번이 놀라지 않았던가.
“아무튼, 직접 보시면 놀라실······.”
-쾅!
지금까지 회장실 문이 이렇게 큰소리를 낸 적이 있었을까?
나와 조회장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전례 없는 회장실 문 브레이커는 다급히 외쳤다.
“저 중국 못가요!”
“아······. 일단 진정하고······. 내가 너를 살려둬야 할 이유를 말해봐. 이거 중요한 거다. 설득 실패하면······. 너 조금 망가질 수 있다.”
나는 조회장의 눈치를 살피며(조회장의 머리 위에는 마치 –조양길은 이것을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홍기도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쉬린칭.”
“쉬린칭이 왜? 딱히 미인계 쓰라는 것 아냐. 그리고 너 원래 잘 하자나. 지난번에 에머리에게도 바로 번호 따더니만······.”
“번호를 따?”
아! 지뢰 밟았다.
“아니, 에머리 번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모델들을 소개해준다고 해서 저 녀석이······.”
“딱히 화내는 것 아니다. 아들뻘보다도 어린데 무슨······.”
조회장은 내 우려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쉬린칭이 왜?”
“쉬린칭······. 제 전 여친이에요.”
< 이거 호러물로 가도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