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홍기도 과장과 쉬린칭이 그런 관계였구나.”
나는 연아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홍기도의 이야기를 전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인데······. 마냥 웃을 수가 없다는 부분이 좀 괴롭네.”
그래.
웃긴 이야기인데, 웃을 수 없어서 속이 쓰리달까?
딱 이런 감상이다.
“그래서 대책은?”
“솔직히 아직은 잘 감이 안오네? 예쁘게 리본 묶어 포장해 바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인신공양이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릴······.”
“마음에 없어?”
“오빠, 자기 사람 끔찍이 아끼잖아.”
음······.
반쯤 진심이었는데······. 뭔가 쑥스럽다.
“어쨌든 나는 이번 일 어쩐지 크게 걱정이 안 되네.”
“그래? 상황에 따라서는 상당히 큰 위기라는 느낌인데?”
“이런 예상 밖의 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오빠와 홍기도 과장은 잘 해결할 것 같아.”
“만약 망해서 판호 틀어지면 어쩌지?”
“그럴일 없어.”
“확신해?”
“그럼. 내 남자친구가 하는 일인데 그럴 일 없지.”
순간 뭉클하고 가슴이 울렸다.
애인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연아의 성격상 이런 무한한 신뢰는 정말로 특별한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에 보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장님.”
“그래. 노력하도록.”
“그런데 부회장 취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
“뭐 그럭저럭? 사실 이미 준비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하긴······.”
연아의 성격에 이미 비서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차근차근 대비해왔을 것이다.
“그보다 대학시절 연인이라······.”
“응?”
순간 등골이 오싹하다. 뭔가 좋지 않은 화제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중국 출장 준비를 다 끝내지 못한 것 같네.”
“앉아.”
“넹.”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오빠도 대학교 시절에 연인이 있었지?”
“네. 뭐 그렇죠?”
“몇명?”
아아······.
그동안 잘도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순간이 오는 구나.
참이냐, 거짓이냐.
안타깝게도 언제나 참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곧 결혼할 사이, 거짓말을 해봤자 나중에 발각되면 대처불능의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아니다.
때로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렇지만······.
아니, 아무리그래도······.
그러나······.
그럴까?
머릿속이 카오스가 되어버렸다.
“하나는 확실하네.”
“뭐, 뭐가?”
“한 명이 아니었군.”
“······.”
이 모든 것은 홍켓몬 때문이다!
언젠가 복수하겠다!
홍켓몬, 용서 못 해!
“자, 하나씩 시작하지. 그래도 걱정 마. 고등학교 레벨까지 내려가지는 않을게. 1번부터 시작해 볼까?”
“가, 감사합니다.”
“······안심하네? 고등학교 때도 많았다. 이거야?”
“······.”
*
*
*
“······면목 없습니다.”
쉬린칭은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를 안경 너머로 무심히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있다면서 호언장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요?”
“그, 그것이······.”
고개를 들지 못한 남자의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운용하는 자금을 굴리는 중개인이었다.
‘좀 더 지켜보려 했지만······. 여기까지인가?’
이 남자는 사실 쉬린칭의 어머니가 지켜보라며 붙여준 상대였다. 좋은 학벌에 번듯한 집안의 자제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고용했다.
물론 결혼상대로 붙여준 남자를 고용해버리는 것이 다소 우습긴했지만, 그것이 쉬린칭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정도······.
그녀의 눈에 비친 남자는 한 없이 작고 볼품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자신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만 물러가세요.”
“제, 제가 어떻게든······.”
“됐습니다. 그 정도 푼돈이야,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기회는 모두 드린 것 같군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물러가라는 뜻이었습니다만?”
“아, 네······. 네······.”
마지막까지 어물거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소 빠르군요. 누구나 한 번 정도 실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비서의 말에 쉬린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실수 같은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
딱히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거나 하는 편집증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순간에 실수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면 안 돼. 그리고 그는 하필 이번 기회를 놓쳤지.”
훌륭한 외관이나, 그럴듯한 배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일반적인 가치 기준들은 쉬린칭에게는 딱히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자신의 곁에 설 남자는 거대한 기로에 조언해주거나, 더러는 대신 결단을 내려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작은 기회 조차 잡지 못할 남자는 결코 자신의 곁에 설 수 없었다.
“부국장님의 가치관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 상식에서는 다소 독특하다는 느낌입니다만······. 그래서 그것이 이 남자입니까?”
비서가 가리킨 곳에는 몇 장의 서류가 있었다.
그것은 이번에 상하이를 방문하기로 예정된 맥베스 인사들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사진이었다.
“홍기도 과장. 고작 이 정도 직급의 인물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대기업 회장들 조차 쉬린칭의 눈치를 살펴야한다. 그런데 그런 쉬린칭이 주목하는 남자가 고작해야 과장에 불과하다는 것은 무언가 잘 못 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는 느낌.
비서의 말에 쉬린칭은 홍기도의 사진을 들어 올렸다.
“이 남자가 맥베스로 이직한 이후, 맥베스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
“우연의 일치 아닐까요? 게다가 조사한 바로는 맥베스의 성장세의 배후에는 오히려 이 남자 쪽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텐데요?”
“숨겨진 천재 개발자, 표세인 팀장. 그래. 확실히 그의 지분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지.”
쉬린칭은 순순히 비서의 의견에 동의했다. 맥베스의 무서운 성장세의 배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계속 발견하게 되는 표세인이라는 남자의 흔적.
단순히 메인 디렉터일 뿐만 아니라, 소소한 사내 정치의 흐름 그 중심에서 뚜렷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미디어를 통한 인터뷰나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탓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우연히 홍기도를 조사하다 보니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인정하신다면······. 주목할만한 대상을 오판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 정확히 홍기도야.”
“어째서?”
“인간의 가치에는 여러 가지 자질이 있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중에는 ‘올바른 선택’을 해내는 자질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해.”
“다소 모호하군요.”
언제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딱히 미신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 아님에도, 쉬린칭은 이따금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해 보여도 할 수 없어. 이게 나니까. 게다가 나도 인정해. 아마도 홍기도는 딱히 계산이나 이해타산으로 움직이지 않는 남자야. 무척 감성적인 사고로 행동하지. 하지만 그 결과를 봐.”
“결과?”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회사를 선택했고, 누구와도 정을 붙이지 못한 채로 부서를 전전하다가 갑자기 이 남자 곁에 딱 붙어서는······. 지금에 이르렀지.”
“······그 모든 것이 홍기도가 표세인을 선택한 결과다?”
“그래. 본능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내는 남자. 내 곁에 설 사람은 바로 이런 재능을 갖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건 너무······.”
미신을 넘어서 황당하다. 어떻게 사람이 언제나 올바른 선택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간단한 가위바위보 같은 것 조차,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의식에서 수많은 경험과 이유들을 접목해서 선택한다고 생각해.”
“유사과학 같은 말인데요?”
“아까부터 말했지만, 나는 딱히 과학 따위에 관심 없어. 그런 건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될 뿐이야. 주가의 동향, 시장의 흐름······. 그 어떤 전문가들과 컴퓨터도 이 모든 것을 완벽히 읽어내지 못해. 하지만 의외로 이런 혼탁한 흐름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
“그것이 이 남자의 능력이라는 것입니까?”
“그래.”
쉬린칭은 자신의 비과학적인 추리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가 생기는군. 홍기도가 선택할 만한 남자라니······. 대체 어떤 남자일까?”
쉬린칭은 자신의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고는 이번에는 표세인의 사진을 들어올렸다.
“과거에는 올림픽 금메달 획득 가능성이 유력한 운동선수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참 재미있지.”
운동선수 출신의 천재 개발자. 이런 독특한 이력의 사람이라는 것도 홍기도의 흥미를 유발한 이유일까?
쉬린칭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표세인에 관한 자료들은 전부 결과를 나타낼 뿐, 그의 진짜 인물됨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역시 직접 만나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겠지.”
“뭔가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물론이지.”
쉬린칭의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조금 전 실수한 남자를 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비즈니스로 여기시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인생이란 비즈니스 그 자체야. 그것은 사랑도 마찬가지지.”
“······그것도 동감하기 쉽지 않은 말이군요.”
비서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
*
*
“너 사고 쳤다면서?”
“사고?”
남궁원의 말에 홍기도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문했다.
“중국 최대 VIP가 니 전 여친······.”
“어? 네가 그걸 어디서 들었어?”
“훗, 너만 정보원이 있는 것이 아니지.”
언제나 이런 일은 까맣게 모르다가 모두 끝난후에 사후보고나 듣던 처지였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현재의 남궁원은 상당히 뿌듯해 보였다.
“문이사님에게 들었구나?”
“쳇.”
홍기도가 단박에 정보 출처를 밝혀내자, 남궁원은 혀를 찼다.
“어쨌든 이거 수습 못 하면 너 좀 치명타 아니냐?”
“치명타라······.”
표세인이 이런 일을 두고 자신들에게 직접 페널티를 제기할 타입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에는 찜찜한 것은 사실.
“다 업보지. 맨날 여자여자 노래하고 다녔으니······.”
“대학 때는 달랐다!”
“그럼, 지금은 인정하냐?”
“당연하지! 남자남자하고 다닐 수는 없잔아?”
“······젠장, 너한테 설득되다니.”
남궁원은 분하다는 듯이 또 한 번 혀를 찼다.
“그래서 뭐 대책 마련 안 하냐? 그냥 팀장님에게 맡길 거야?”
“흐음······.”
지금껏 자신이 직접 연관된 일이 없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표세인이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보조에 불과했다.
“하극상······. 쉽지 않군.”
제법 오랜 시간 머리를 굴려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쉬린칭이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솔직히 그걸로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정에 얽힌 앙심이라는 것은 대개 이성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복잡한 상황이라도 표세인이라면 무언가 해결책을 떠올리거나, 나름의 재치로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나름 하극상을 꿈꾸는 홍기도의 입장에서는 이번일 만큼은 마냥 표세인에게 맡기는 것도 좀 싫은 일이었다.
“갑자기 웬 하극상?”
“아아, 그냥 내 개인적인 이야기야.”
“넌 뭘 그렇게 항상 꿍꿍이를 준비중이냐?”
“이건 그런거 아니다.”
홍기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중국 잘 다녀와라.”
남궁원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홍기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뭐? 뭐가 불길해? 중국 가기 싫어서 헛소리하려는 거냐?”
“불길할 때일수록 더욱 표세인 팀장 곁에 있어야 하는 법이지.”
“팀장님이 방패냐?”
“그렇지. 나의 소중한 방패지. 본인도 맨날 자기가 탱커라고 하잖아.”
“아, 하긴······. 아무튼, 잘하고 와라.”
“그래. 너도 잘하고 있어라.”
“너 돌아올 때 쯤 테스트 빌드 뽑아서 놀라게 해줄게.”
“그래. 각자 열심히 해보자.”
불길한 촉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은 상황임에도 홍기도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중국행에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나마 다행이네.’
이럴 때일수록 표세인 곁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력하나마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번 위기 상황 자체가 자신의 과거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홍기도는 강제 긍정 회로를 풀 가동했다.
< 나는 어드벤티지 받아도 되지? >